博學審問(박학심문)
카테고리
작성일
2016. 10. 9. 14:09
작성자
you. and. me.



*요즘 날씨가 엄청 추워진것 같습니다.. 슬리퍼만 신던 저의 발꼬락이 춥다고 뭐라도 덮어달라는 군요..



*전쟁 뒤 벨져의 숏컷+ 흑발+로멘틱 클래식 옷 입은게 보고싶은데 노래때문에 감수성이 터져버려서..


*무튼 얼른 가을이 오면 좋겠네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라! 







가만히 발밑에 드리워진 그림자 길이를 쳐다보았다. 햇볕이 잔뜩 내리쬐는 여름날의 그 짧은 그림자는 어느새 키가 이만큼이나 컸다. 그때는 내 무릎에도 오지 않을 작은 아기 수준이었던 그 그림자는 내 가슴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자라버렸다. 가장 좋아했던 녹음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살은, 붉은색과 노란색의 향연으로 바뀌어 있었고, 내가 잡을 수만 있을 것 같았던 하늘은 우러러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파랗고 높아졌다. 파랗고, 높아졌다.



“.......벨져같네.”


고집 센 나의 도련님.


“뭐라고 했나.”


언제 내 뒤로 온 것인지. 순식간에 알싸한 우디향과 같이 커피 향이 내 몸을 감싸는 것에 기분 좋게 웃어버렸다. 잘 잘린 그의 검은 머리카락. 그럼에도 눈에 띄는 얼굴. 그가 끌어안을 때마다 기분 좋게 간질이던 머리카락이 짧아진 것이 아직도 어색해 그의 목 뒷덜미에 손을 뻗어 짧아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내 행동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눈을 휘었다. 예뻐라. 그의 입에 짧게 입을 맞추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라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내가 하지 않아도 그가 했을 거란 걸 알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나에게 따듯한 커피가 담긴 컵을 내밀고는 내 옆으로 와 나란히 걸었다. 


싸우는 사람의 습관이라는 것은 무섭다. 이제는 싸우‘던’ 이겠지만. 나는 이제 더는 시계를 주렁주렁 차지 않았다. 그는 검을 놓았고. 그의 머리카락은 하얀색에서 검은색으로 천천히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내 손 왼쪽 약지에는 은반지 하나가 그의 눈 색과 꼭 맞은 아쿠아마린 하나를 품고 반짝이고, 그의 목에는 내 눈 색과 맞는 에메랄드 보석이 박힌 반지가 걸려있었다. 전쟁과는 멀어진 우리. 그래도 그는 항상 내 왼쪽에 섰다. 어느 위험이 닥쳐도 바로 움직일 수 있게. 그는 항상 검을 들 준비를 하기 위해 손에 반지를 끼지 않았다. 


타고난 검사는 자신의 과거를 잊지 못했다. 목표를 잃어버린 방랑자처럼. 


사람도 몇 없는 한적한 거리를 그와 같이 걷고 있자니 웃음이 나와버렸다. 이런 일상을 꿈꾼 것이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그랑 나란히 아무 근심·걱정 없이 거리를 걸어 볼 수 있다니. 그럼에도 싸움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가 제법 귀여워 보였다. 아니, 어쩐지 조금은 불쌍해 졌다. 그것만이 목표였던 사람이 순식간에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문장 하나가 조금 가슴 아프게 다가와서.


‘이제 뭘 하지.’


그가 싸움이 끝나는 순간 나를 먼저 생각했을까, 그의 미래를 먼저 생각했을까. 안타리우스의 문이 닫히는 순간 그의 뒤에 있던 나는 쳐다보았다. 그의 등을. 한 줄기 빛을 받으며 그 앞에 피로 물든 그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그 모습을. 그리고 어느 순간, 나를 돌아본 그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지.


“릭?”


“아.”


상념에 깨어나 그를 바라보려던 순간 퍽 하고 무언가와 부딪혀 버렸다. 그대로 거리의 가로수에 이마를 찧어 버려 바들 거리고 있자 벨져가 웃는 소리가 난다. 붉어졌을 것이 틀림없는 이마를 매만지며 그를 노려보자 그가 가볍게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고는 ‘무슨 생각을 하길래 앞도 제대로 못 보고 걷는 거지.’ 하고 화재를 돌렸다. 그의 말에 말할까 말하지 말까, 잠깐 고민을 하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그를 힐끔 쳐다보고 웅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그대 생각.”


“흐음. 침대에서 하는 그런 거 생각한 건 아니고?”


“우리 도련님은 참, 시간이 지나갈수록 야살스러워지고 있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잘 알지.”


난 그런 거 생각 안 해. 정말? .......한달에 한두 번 정도 외엔. 릭 톰슨, 나보고 야살스럽다 할 처지가 안되는군. 피장파장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쌀쌀해진 가을바람이 우리 둘 사이를 가르듯 지나갔고,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한 붉은 단풍잎이 비 오는 소리를 내며 하나둘 떨어져 지나갔다. 조그마한 단풍잎이 솜씨 좋게 내 커피잔 안에 들어간 것도 모른 채 그의 눈을 쳐다보고 말했다.


“그대는 마지막에 무슨 생각을 했소?”


“끝났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앞을 보고 묵묵히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추곤 날 쳐다보았다. 똑같은 눈높이. 직선으로 마주 닿는 그의 눈동자에 눈을 깜빡거리자니 그가 ‘이름.’ 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에 미간을 팍 찌푸렸다. 


“네가 본능에 따라 생각나더군.”


“내가?”


그래. 그래서 돌아봤지. 아주 우습게도 넌 항상 내 근처에 있었는데. 그 사실을 그때 깨닫게 되었지. 아, 그래. 모든 게 끝나도 넌 항상 내 옆에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 그는 그렇게 말해주며 내 귀를 매만졌다. 말랑한 귀가 마음에 들었던 건지 자꾸 만지작거리며 귀를 쭈물거리는 그 덕에 귀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래. 그리고 네 이름이 생각났지. 릭 톰슨. 그것뿐이야. 그 외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대는 후회해?”


“아니.”


“그러면 그대가 검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그는 가볍게 내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땐 죽여야 할 게 있던 것이고, 이젠 지켜야 할게 생겼기 때문이지.”


하고.



그는 목에 걸려 있던 반지를 풀어내곤 자신의 왼손 약지에 똑같이 끼웠다. 투박하지만 얇은 손가락. 그 사이에 부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그의 반지를 보다가 그가 오른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듯 잡은 것에 말없이 그의 손을 풀고 그의 손을 깍지 끼듯 맞잡았다. ‘그래. 방금 널 못 지킨 것 빼곤 나머진 다 지켜줄 수 있으니 멍만 때리지 마라. 얼굴 커진다.’ 장난스레 말하는 그의 행동에 손을 좀 더 힘주어 잡고 웃어버렸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준다. 가끔 마주하는 그의 눈동자가 좋아 맞잡은 손으로 손장난을 치면 그가 맞잡은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깨물어 버린다. 


“자기야.”


“....... 약 먹을 시간인가?”


“와, 진짜. 이놈의 도련님은 분위기도 없고.”


“무드는 침대에서면 충분하지.”


“각방 침대가 요즘 그렇게 무드 있다면서.”


“집 벽 다 허물어 버리기 전에 조용히 해라.”


“예.”


알게 모르게 친절한 도련님. 순식간에 머릿속의 복잡한 일들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맞잡은 손에서 따듯한 온기가 팔을 타고 심장까지 올라오는 것 같아 오른손으로 심장 쪽을 쓸어 만졌다. 그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 말 한 적 없는데 이렇게 충만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차오른다. 머리카락이 검게 물들어 훨씬 더 어려 보이는 그. 긴 코트 자락이 내 코트 자락과 엉키듯 바람에 흩날리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단정한 차림에 무뚝뚝한 얼굴이지만. 맞잡은 손으로 모든 말을 대신하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럽다.


“벨져.”


“뭐지.”


“그대가 내 첫 사랑이야.”


“.......”


“그리고 마지막 사랑이 되겠지.”


그가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자꾸 앞서 걸어가는 발걸음이 인도 사이를 가로지르는 기찻길에서 멈추었을 때. 딩동 거리며 시끄럽게 울리는 기차 신호등 소리에 묻혔을 때. 내 귓가에 조그맣게 나만 들리듯. 모든 소리를 앗아가는 듯 말했다. 


‘Amo Te, Ema me.’


널 사랑해, 날 사랑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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