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學審問(박학심문)
카테고리
작성일
2015. 12. 31. 01:08
작성자
you. and. me.




*지각이다...


*릭의 드물게 욕하는 대사 주의..


*릭의 얼굴 패티쉬 (????) 주의..

*내일도 한 해의 마무리 벨릭을 써야해서 조금 밝은 분위기의 글을 써 봤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치유하라 했다. 그 말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틀린 말일 수도 있다. 나이 33살, 이제는 결혼이라는 것을 앞둔 나이에 거하게 차였다. 내 딴에는 최대한의 사랑을 준 것이었으나, 아마 연인 쪽은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마치 물을 다시 주고, 또 줘도. 밑 빠진 물독에 물을 채우는 것 마냥 더 사랑을 요구하는 그 행동에 나는 자꾸만 물을 들이부었다. 사랑을 부었다. 채워져라, 채워져라. 흘러내려 가는 밑동을 손으로 막아 보지만 손 틈새로 세어나가는 물은 비웃기라도 하듯 손을 밀어냈다. 나는 그렇게 밑 빠진 물독 주변에 고일 정도로 넘쳐나가는 물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만 하는 사랑은 그렇게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내 연인이라는 사람과 헤어졌다.


“어머,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33살이오.”


“와,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는걸요.”


“하하. 아가씨야말로. 다정하고, 따듯한걸.”


그리고 나는 그 첫 사랑을 치유 받기 위해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다. 흔한 연인들의 만남의 장소인 카페에서. 잘 먹지도 않는 치즈 케이크와. 달짝지근한 것을 좋아하지만, 눈앞의 여자가 신경 쓰여서 취향에도 없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키고. 진부한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러나 정성을 다해 눈앞의 아가씨에게 웃어주었다. 아가씨는 너무나 착하고 따듯했으니까. 그런 아가씨에게 바로 우리는 인연이 아니라고 헤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릭 씨는,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나의 이상형을 물어보는 아가씨의 말에 창문을 바라보자 아가씨도 같이 창문 밖을 쳐다본다. 커다란 유리 벽면 너머의 사람들. 겨울바람에 코와 볼이 발갛게 물든 연인들과, 점점 시려오는 발끝을 동동거리는 아이와 엄마. 내 이상형이라. 천천히 입을 여는 순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제 이상형은...”


천천히 스쳐 지나가는 검은 코트의 사내. 눈이 오는 것에도 무색하게 구두에는 눈 하나가 내려앉지 않은 듯 광이 반짝였다. 손에 딱 맞게 맞춰진 듯, 손뼈가 조금 도드라지게 보이는 가죽 장갑. 


“다정하고...”


눈과 비슷하게 하얀 머리카락. 정면을 주시한 시선. 올바른 걸음걸이. 나뿐만이 아니라 내 앞에 앉은 아가씨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걸음 내딛을수록 결 좋은 머리카락은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자연스럽게 어깨 뒤쪽으로 흘러내리듯 움직였다.


“따듯하게 내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시선을 느낀 건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그 사람. 옆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그의 외모가 보이자마자 눈을 껌뻑거렸다. 딱히 사람 외모에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였는데. 하얀 머리카락과는 다르게 짙은 검은 눈썹과, 살짝 끝이 올라간 눈꼬리.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시야에 확 들어오는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런 사람.”


창문 너머라 나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겠지만. 그는 그렇게 나에게 잠깐 시선을 주고 이내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앞을 보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해, 겨울.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



“부장님!! 그 애 별로였어요? 그 애는 부장님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는데.”


“응?”


멍하게 20층 가까이 되는 건물에서 창문밖으로 시선을 주며 커피 한잔을 마시다가 여직원의 목소리에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상당히 걱정하는듯한 눈치에 손사래를 치며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하자 뾰로통한 얼굴로 나에게 이유를 물어보는 아가씨에게 멋쩍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사귀기에는 아가씨가 너무 젊고, 예쁘던걸.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오.”


“에이, 부장님만큼 몸가짐 좋고 다정한 분이 어디 있다고! 게다가 직장 좋지, 직급 좋지. 부장님 어디가 어때서요.”


과한 칭찬인데. 웃으면서 다시금 자리에 앉아 여직원이 품 안에 든 서류에 시선을 주자 그제야 품 안에 두툼하게 자리하고 있는 서류를 건네준다. 자질구레한 업무까지 하나하나보고받아야 하는 체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정말 확인하지 않으면 어디까지 일이 잘못될지 모르는 보고서가 한두 개가 아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만년필을 손에서 굴리며 하나하나 서류에 사인하자 여직원이 눈치껏 조용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하고 내 사무실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선다.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펜은 어느 순간부터 천천히 회전력이 약해지고 이내 양 끝으로 뒤뚱거리며 주먹을 쥔듯한 내 손 위에 멈추었다. 


어제 분명 그 사람을 따라가려 했는데, 어찌나 걸음이 빠르던지. 게이트란 게이트를 구석구석 열어봤는데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이름이라도 알아둘걸. ...그나저나 내가 왜 한번 본 사람에게 이렇게 집착을 하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금 서류 결재 사인란에 사인을 하려 하지만, 자꾸만 하얀 종이를 보면 볼수록 그 머리카락이 생각나는 바람에 얼굴에 열이 오른다.


“....나 게이였나?”


아닌데. 아닐 텐데. 의자를 빙글 돌리며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내가 게이였었나. 아니, 물론 사람 좋아하는 것에서는 이런 것을 따지면 안 되는 것은 당연하긴 한데,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은 절대 없었는데. 그 엄청난 외모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처음 든 생각이 키스하고 싶다, 라니. 


“으아아악!!!”


나도 모르게 만년필을 쥐고 쾅쾅쾅 하고 책상을 내려찍자 만년필이 ‘주인님 아파 죽겠어요.’ 하고 앞부분이 구깃구깃하게 구부러져 책상에 어설프게 박혔다. 키이스으? 키스? 나 정말 게이였나? 그래서 내 연애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던 건가? 머리를 감싸 쥐고 엉망이 된 만년필을 다시금 들어 서류에 사인하려 하자 볼품없이 구겨진 펜촉이 나를 비웃고 서류에 잉크를 왕창 쏟아 부어버린다.  


“아,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다시 자세히 보고서의 출처를 훑어 보자 상부의 보고서인 것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필 이런 것에 잉크를 번져서는.. 과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재발급받을 수 있는 보고서의, 검게 물든 서류 위의 잉크를 휴지로 꾹꾹 눌러 닦아내고는 한숨을 쉬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아까의 쾅쾅 소리의 여파 덕분에 온 사무실 직원들이 문 열리는 소리에 이쪽을 돌아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서둘러 서류를 보는 척, 커피를 마시는 척 난리가 나다. 하여간...예민하기는. 어색하게 웃고는 바로 내 옆방의 과장 방에 노크하자 문 너머로 ‘들어오세요.’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과장님, 이거....”


“...자네, 불만이 있으면..”


말로하게. 과장의 떨리는 눈빛과 떨리는 손이 이내 내가 내미는 서류를 붙잡더니 내용물을 확인한다. 뒷장까진 안 봤는데. 점점 표정이 굳어지는 과장의 모습에 나까지 서서히 긴장되기 시작한다. 도대체 뭐길래 저런 표정이란 말인가.


“이 서류는 내가 발급한 게 아니야. 후원자로부터 보고받은 것을 내가 전달해 준거지. 복사본도 없고, 다시 직접 스폰서 쪽으로 찾아가서 받을 수밖에 없어.”


“...스폰서가 어딥니까?”


과장은 말없이 떨리는 손으로 주섬주섬 지갑 속의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다른 흰색 일반 명함과는 다르게 번쩍거릴듯한 은 재질의 명함이라니. 이거 진짠가? 이거 팔아도 될 것 같은데. 명함을 받고 뚫어져라 세겨진 글자를 쳐다보자 짧게 적힌 주소와 커다랗게 박힌 ‘Deimus Holden’ 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다이무스 홀든?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과장은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 인중에 손을 댄 체 진지한 태도로 나에게 주의 사항을 알려주기 시작한다.


“이 서류는 후원자에게 제법 고액의 지원을 받는다는 내용이야. 단순히 대체 서류로 꾸밀 수도 없고. 홀든가는 들어봐서 잘 알지?”


아뇨. 모르는데.


“가서, 보고서에 문제가 생겨 사본을 다시 받으러 왔다고 말하면 알아서 다이무스경쪽으로 안내시켜 줄 거야. 행동거지 조심하고.”


외근으로 해둘 테니까. 무사히 서류만 받아와. 과장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 옆머리카락을 최대한 위로 끌어올린 대머리가 바람에 흩날려 보이든 말든 나의 등을 떠밀기 시작한다. 어어, 과장님 이거 제가 가는 겁니까? 그럼 네가 일 쳤으니까 네가 가야지. 얼른 다녀와. 그렇게 나는 억지로 닫힌 과장의 사무실 문밖으로 쫓겨나듯 발을 디딜 수밖에 없었다. 다이무스 홀든 이라. 잉크로 엉망이 된 서류 위에 놓인 은빛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게이트로 이동하면 금방이겠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내 사무실로 들어서려는 찰나 보이는 사무실 풍경. 이쪽을 쳐다보다가 황급히 자기 일을 하는 반복되는 사무실 직원들의 행동에 쓰게 웃으며 내 사무실로 들어가 코트를 챙기고는 ‘외근 다녀오겠소. 결재 서류는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내일 와서 처리하지.’ 하고 말을 남기고는 밖으로 나섰다.


따듯한 난로 덕에 훈훈한 사무실과는 다르게 바깥의 공기는 너무나 차가웠다. 


*


좁은 골목길에서 몰래 연 게이트. 서류만 받고 나면 완전 시간에 여유가 있어 진다는 것에 콧노래까지 나올 지경이다. 간만에 일이 일찍 끝났으니 집에 가서 푹 쉬어야겠다. 얼른 일을 끝내야겠다며 게이트 밖을 삐져나오자 마자 나는...


“...여기가 어디야.”


넓은 잔디밭에서 길을 잃었다.


“여기 사람 없소?”


소오-소오-소오. 분명 목적지는 여기가 맞는데. 명함을 다시 찬찬히 훑어보았다. 여기 확실한데. 어째 깔린 건 허허벌판의 잔디뿐이다. 드물게 우거진 나무들이 보이긴 했지만. 확실하게 여기는 잔디와 나. 그리고 하늘 뿐이었다. 일단 걸었다. 어딘지도 모르고 걸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이쪽 근처 지리는 하나도 모르니 다른 곳으로 이동해 봤자 의미가 없으니까. 


잔잔한 잔디 위로 발걸음을 내딛자, 바람에 따라 잔디가 흩날린다. 마치 비가 내리는 듯한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다. 겨울인데도 봄 같은 이곳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나는 기분 좋게 미소를 띠고 걸었다. 걸어가다 보면 어디든 끝이 보이기 시작하겠지.


*


“사람 살려!!!”


겨울이라 빨리 저물어가는 하늘에 나는 슬슬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여긴 도대체 어디야!! 오늘 안에 서류를 받지 못하면 내일 과장한테 한소리 들을 것이 분명해서 집으로 가지도 못하고 나는 덜덜 떨면서 핼쑥해진 얼굴로 외치기 시작했다.


살려- 살려-.


“여기 온 내가 병신이지!!!”


병신이지- 병신이지-


더 슬퍼지기 시작했다. 아, 이젠 진짜 한계다. 아까 아무래도 무슨 나무 옆으로 불빛이 보인 것 같아 그쪽으로 방향을 돌려 걸어간 게 문제였던 걸까. 빛은 무슨, 자꾸만 더 울창한 나무숲과 그 옆에 자리한 나무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 여기서 조난당하는 건가.


부스럭.


“이봐. 거기 누구 있어?”


“있소!!!!”


흐리게 사람의 인영이 보이는 것에 기쁘게 난 그쪽으로 달려갔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다리를 비추고 있는 호야등의 불빛이 오늘따라 너무나 반가웠다. 서둘러 그쪽을 향해 기쁜 발걸음으로 달려가자 천천히 등이 올라가며 사람의 얼굴을 비춘다. 아주 축 늘어진 하얀색인지 뭔지의 머리카락. 게다가 한쪽 눈을 가로지르는 상처. 나는 그 상태로 눈이 풀리고 기절하고 말았다.


동양의 처녀 귀신이란 게 왜 여기 있지, 하며.



*


“으하하하. 형 이 사람, 나보고 기절했어!! 게다가 정원에서 나보고 막 완전히 밀림에서 만난 구세주처럼 막 있소!!!! 하고 달려오는 거 있지.”


다 듣고 있다. 


“조용히 해라, 이글. 그나저나 신기하군. 홀든가 보안 체제가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았나.”


맞게 왔긴 왔나 보구나.


그래도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내 주변을 둘러싼 건장한 남성 두 명의 대화가 오가는 중인데, 뭔가 내가 한 행동이 민망한 짓이란 것 정도는 잘 알겠으니까. 창피해서라도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내가 간 곳이 밀림이 아니고 정원이라니. 여기 정원은 도대체 몇 평이나 되는 거지. 


“나가봐라. 나머진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뭘?”


“글쎄. 단순히 길을 잘못 든 외부인이라면 살려는 두고.”


“아니면?”


“죽여야지.”


그리고 나는 서둘러 눈을 뜨고 답해주었다.


“안녕하시오. 단순하게 길을 잘못 든 외부인이오.”


“......” “으하하!!”


형, 형 나 숨도 못 쉴 것 같아. 아득하게 들려오는 사내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번쩍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카페에서 보았던 그 사내였으니까.


이것이 그 해, 겨울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


“그래서. 서류를 얻으러 왔다?”


끄덕끄덕.


“그리고... 네가 사이퍼라고?”


끄덕끄덕끄덕.



완전 심문이 따로 없다. 비록 침대 위에 누워 있지만. 내가 생각한 사내의 목소리는 내 예상과 같이 매우 좋았다. 이쪽을 쳐다보는 그자의 얼굴을 도저히 마주할 자신이 없어 이불만 내려 보고 있자니. 새삼 드는 생각. 분명 카페에서 한번 마주친 것 같은데, 왜 기억을 못 하지? 나만 기억하고 있나?


“사이퍼가 여기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지?”


“...나는...”


가볍게 침대 밑으로 게이트를 열었다. 나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분명 눈을 마주했는데. 잠시 몇 초라도. 침대 밑으로 훅 꺼지는 내 모습을 그가 크게 쳐다보는 것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나는 그의 등 뒤로 게이트를 열어 의자에 앉아있는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공간이동 능력자니까.”


“......그래서 그곳에 들어온 거로군.”


별로 정확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가 이쪽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황급하게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가까이 오니까 스킨 향인지, 향수 향인지는 몰라도 시원한 향이 근처를 맴돌았다. 게다가 셔츠 한 장 차림의 그의 어깨로 잡히는 근육이 단련된 몸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둘러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앞만을 본체 어색하게 침대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뭐하는거지?”


“아...아니. 방이 참 좋다고 생각해서. 그나저나 서류를 다시 받아야 하는데.”


여전히 그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자니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단둘이 남겨진 이 상황도 어색하고 자꾸 얼굴을 힐끔거리면서 봐도 그 눈이랑 입술밖에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게 뻔하다며 눈을 감아 버리자 그가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어어. 오..오지 마. 오지 마. 


내 앞에 멈춰 선 그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에 슬금슬금 고개를 돌려 그가 있을 방향을 바라보니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히 그의 바지.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올라가며 그의 셔츠, 목덜미를 보고 이쪽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얼굴이 터지고 말았다.


“아까부터 뭐라 하는 것인지. 좀 크게 말할 수는-.”


침착하자. 침착하게, 서류를 달라 하는 거야. 키스, 뭐. 눈이 예쁘다 이런 말을 하면 큰일난다.


“서..류를..”


“...뭐라고?”


미간을 찌푸리고 내 쪽으로 귀를 단체 고개를 숙여 보이는 그 덕에, 어깨 위에 걸친 그의 하얀 머리카락이 스륵거리며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다. 어느새 바싹 다가온 그의 귀. 목 뒤에도 향수인지, 스킨인지를 바르는 것일까. 향이 더 코를 파고들 듯 맡아지는 것에 입이 점점 더 떨리기 시작한다.


심박수가 올라간다. 


사랑은 사랑으로 치료하는 거라 했지. 괜찮을까. 아직 뭣도 모르고 고작 얼굴 하나보고 좋아하는 주제에, 이렇게 어렵사리 다가온 기회를. 그냥 서류만 달랑 받고 넘겨도. 괜찮을까. 이상과 현실은 전혀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는 생각과는 달리 그의 귓가를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조금 돌려 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


“......”


그의 뺨은 생각보다 더 보드라웠다. 유난히 하얀 피부에 입술을 대었을 때, 차가울 것 같았는데. 그의 뺨은 따듯했다. 오히려 내 입술의 온도보다 더 따듯했던 것 같다. 그래, 입을 맞춘 것은 좋았는데. 그도 나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 상태로 멈춰 버렸다. 어쩌지? 입술 떼야 하나? 때면 나 한 대 맞는 거 아닌가? 항상 저질러 보고 생각하는 타입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의 이런 고민을 해결해준 것은 그의 움직임이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이내 촉-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뺨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린다. 그 소리에 둘 다 몸을 굳혀버렸다. 촉이라니. 물기가 잔뜩 들어간 그 소리에 안 그래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이 더 달아올랐는데. 그는 아무런 표정없이 몸을 다시금 일으켰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


“......”


“...저기, 그러니까 이건...”


뭐라 하지. 그대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소? 이런 소싯적 영화에 나올법한 대사가 먹힐까? 혼란스러움에 이도 저도 못하고 있자니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죽고싶나."


그는 정말 죽일듯이 나를 노려 보았다. 그가 자연스럽게 그의 옆춤에 어느세 차고 있던 검에 손을 올리는 것에 나도 모르게 서둘러 집으로 이동하는 게이트를 열고 도망쳐 버렸다. 당연히 그는 어디로 열리는지 모르니 함부로 나를 쫓아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한숨을 쉬며 평소보다 몇배는 빠르게 닫아버린 게이트가 열린 벽면에 시선을 주다가 욕실로 들어갔다. 일단 세수부터-.


"......하...."


완벽하게 갈아입혀진 옷. 내 옷이 아닌 조금 헐렁한 셔츠에 편안한 바지. 나는 내 옷을 제대로 입지도 못한 체 그렇게 그에게서 도망치듯 내 집으로 온것이었다. 세면대를 붙잡고 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 코트며, 지갑이며. 다 그곳에 두고 왔는데. 몰래 게이트를 열기에는 좌표도 모르고. 게다가 서류도 받아내지 못하니 내일 과장한테 잔소리라는 잔소리는 다 듣겠지. 세면대의 물을 틀고 그대로 쏟아지는 물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차가운 물이 조금은 열에 오른 머리를 식혀주는 듯 했다.


*


"릭 톰슨!"


평소보다 몇배는 기분좋아 보이는 과장이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해사하게 나를 바라보며 내 엉덩이까지 두어번 토닥거리며 웃어보인다. 떨떠름 하게 아...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해 보이니 과장이 자랑스럽게 직원에게 큰소리로 말을 외치기 시작한다.


"우리 릭톰슨 부장이 대단한 일을 했어! 스폰서가 기존 금액의 두배 이상으로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고!"


"예?"


이게 무슨 소리지. 스폰서라면 어제 그곳? 침을 크게 한번 삼켰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것에. 과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의 나에게 종이 한장을 넘겨주었다. 고급스런 양피지 종이. 종이에 적힌 정갈한 글씨.


[친애하는, 릭. 톰슨 부장님께. 안녕하십니까. 홀든가의 차남. 벨져 홀든입니다. 어제 서류를 요청하시고서는 실수로 짐과 함께 서류를 놓고 가시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우편으로 서류를 다시 보내드립니다. 부장님이나 되시는 분이 직접 저희쪽으로 찾아오셔서 서류를 부탁하시는 것에 감명받았습니다.]


감명은 무슨. 살인의 충동이 일어났겠지. 떨리는 눈으로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며 편지의 마지막 끝 글자를 읽었다. 


[서류는 보내드렸으나 짐은 개인 소품이라, 직접 전해 드리는것이 예의인것 같아 과장님과 상의 후 오늘 저희 홀든가로 직접 다시 모셔서 짐을 돌려드리기로 말해 놓았습니다. 그럼 오후에 뵙겠습니다.]


"봤지? 이야.. 그쪽에서 마차까지 다 준비해 주더라고! 릭 부장. 이따 오후에도 외근이네. 잘 다녀오게!"


[벨져 홀든.]


.... 아마 그의 이름이겠지. 내 짐을 언급하는것을 보면.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구겨 쥐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직원들과 경사났네를 외치는 과장. 그리고 서서히 불투명해져 가는 나의 미래. 


그 해 겨울,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해외 도피라는 것을 고민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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