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學審問(박학심문)
카테고리
작성일
2015. 12. 24. 15:24
작성자
you. and. me.




*17페이지 (한글로 10포인트 글자 기준)  입니다. 아마 여유를 가지고 봐야 할......듯...합니다... 


* 후반부로 갈 수록 오페라에 사용된 실제 음악의 가사가 나옵니다. 아무래도 스토리 흐름상 꼭 필요한 부분이라 넣었습니다.


*실제 오페라의 유령(영화편) 을 각색해서 만든 것입니다.

- 글이 길어질수록 힘이 들어서 끝이 흐지부지..


화려한 무대, 하얗게 분칠하듯 두꺼운 분장. 다채로운 표정들. 높은 목소리로 우아한 목소리를 마음껏 뽐내는 소프라노와 견주는, 나는 보이 소프라노였다. 


“릭-. 이번에 새로 뽑혔다면서?”


“하하, 그렇게 됐소. 그래도 정든 곳을 떠나려니까 마음이 아픈걸.”


“그래도 말이야. 조심하라고.”


그것은 예전의 일이었지만. 힘주어 닫은 옷 가방에서 자동으로 잠긴 자물쇠가 달칵 소리가 난다. 지금은 그저 작은 극장에서 오페라의 시종역이나 잡다한 역으로 대신 뛰고 있었다. 왜 과거형이냐고? 이제는 제대로 캐스팅이 되어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가게 되었으니까. 그것도 엄청난 규모의 연회장을 가진. 모든 성악가라면 누구나 한번 꿈꿔보는 그곳. 화려한 무대 아래에서, 이쪽을 쳐다보는 수많은 시선과 커다란 샹들리에. 생각만 해도 벅찬 기분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지만, 이 흐름을 끊는 극장의 단원이 조금은 거슬린다.


“무엇을 말이오?”


“거긴 말이야.”


마지 듣지 말아야 할 비밀을 말하듯, 그가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내 귓가에 속삭인다.


“오페라의 유령이 나타난다고.”



*



“말도 안 돼.”


날 마중 나온 커다란 검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몸을 감싼 검은 코트가 차게 식어오는 마음을 덥혀준다. 유령이란 게 존재할 리가. 창문 가를 바라보았다. 낡은 건물, 초라한 가로등. 나의 어릴 적, 부모 한 명 없이 자라난 이곳. 교회에서 그저 가끔 살아온 나로서는 처음 바깥세상으로 내디뎌 보는 발걸음. 


“...유령이 있다 한들, 여기에 있는 것 보다.”


말이 다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달리자 잘 포장되지도 않은 도롯가가 덜컹거리기 시작한다. 덕분에 시야가 잔잔하게 흔들리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래, 유령이 나오더라도. 이곳보단 나아. 


눈을 감자, 나를 쓰레기 취급하듯 보던 목사가 눈앞에 그려진다. 허울만 목사의 모습을 뒤집어쓴, 그저 악마였던 사람. 한 손에 들린 채찍과, 나를 내려다보며 웃는 그 얼굴. 서둘러 악몽에서 깨듯 눈을 떴다. 여기만 아니면 된다. 설사 진짜 유령이 있더라도, 이 끔찍한 지옥보단 낫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어느새 깊은 수마에 빠져든 것 같다. 


*


첫발을 내디뎠을 때, 바닥에 닿아오는 돌의 감촉부터 생경했다. 시골보다는 판판하고 더 단단한 듯한, 게다가 문양까지 고급스럽게 들어간 길바닥이라. 낡은 가죽 신발을 내딛고 무거운 짐가방을 혼자 양손에 든 체 나와는 어울리지 않게 생긴, 커다란 오페라 극장의 입구 앞에 섰다. 서성거리는 내가 의심스러웠던 건지 경비 두 명이 이내 다가와 어쩐 일이냐고 물어보기까지 한다. 서둘러 윗옷 자락에 땀에 약간 절은 손을 두어 번 닦아내고는 손을 내밀었다.


“릭 톰슨이오. 이번에 여기에 새로 채용된-.”


“아, 어서 들어가십시오.”


기다렸다는 듯 이름을 듣자마자, 가만히 손으로 몸짓까지 취해 가며 사람 좋은 미소를 보여주는 문지기에게 한번 웃어 준 뒤 설레는 마음으로 활짝 열리는 거대한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입을 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한 체 둘러보기 바빴다. 상상도 못할 광경. 사람 백 명은 너끈히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홀과 홀의 양 끝에 나 있는 계단. 그리고 중앙에서부터 이어지는 2층으로 올라가는 웅장한 크기의 계단이라니. 벽면에는 온통 황금빛의 천사 형상의 조각들이 구석구석 균형 있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리석의 바닥과 금빛으로 둘러 쌓인듯한 벽면이라. 이런 곳에서 드디어 일을-.


“이봐, 자네!!”


“응?”


“거기서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나 말이오? 무거운 짐을 억지로 들어 보이면서도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답답하다는 듯 이내 턱수염이 더부룩하게 달린 남자가 내 손을 덥석 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2층이 아닌 1층의 구석에 달린 작은 나무문 쪽으로. 


“저, 저기.”


“신참, 릭 톰슨 맞지? 이번에 온다고 이야기 들었다. 소문의 그 주인공이로군.”


“...소문의?”


내가 그렇게 유명했나?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그 남자를 따라가자 아무도 없던 한적한 홀과는 달리 이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미어터지겠다. 문을 열자마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고함이 뒤섞여 들려온다. 이따금 대사가 있는 사람들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자기의 대사를 불러보기도 하고, 무용단 아가씨들은 제발 옷을... 좀 잘 ... 이런 것에 익숙해야 하는데 좀처럼 전 극장에선 남자들이 대부분이라 여자들이 불편해할까 공간이 분리된 덕분에, 여자랑 접촉하는 것이 어지간히 힘들다. 맨살이 드러나든 말든 옷 갈아입기 분주한 사람들. 그리고 앞서 나가는 사내가 ‘릭 톰슨 왔다!’ 라고 외치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조용해지고 이쪽을 주시한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껴 몸이 압축에 압축을 거쳐 겨우 다다른 곳. 


“자. 여기가 네 방이야.”


“...... 어째서 방안이 파란색..과, 흰색투성이지?”


열린 낡은 문 사이로 점점 보이는 방 안의 모습은. 가구는 매우 고급질 뿐만 아니라, 독방인 듯 다른 사람의 짐은 보이지도 않는다. 아니, 말하자면 거의 이건 특실 정도랄까. 너무나 푹신한 침대에 한번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남자는 한숨을 푹 쉬며 짐가방을 문 앞에 내려다 주고는 서둘러 주변을 황급하게 살핀다. 뭐하는 것이오? 멀뚱히 그를 쳐다보니 그가 문을 닫고는 그 큰 몸과는 달리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내 옆에 앉는다. 


“왜 그러는 것이오? 아까부터. 마치 괴물을 보는 듯한 취급이야.”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뭘 말이오.”


아, 일단 내 이름은 일루나. 인도에서 왔지. 혼혈이야, 뭐 아버지 쪽을 닮아서 완전 인도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랄까. 가만히 손을 내밀며 한쪽 어금니가 빠진 체 웃어 보이는 그자의 손을 잡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릭 톰슨이오. 그리고 이내 맞잡은 손이 빠르게 당겨지고 다시 한 번 나는 처음 이곳을 오기 전부터 자꾸만 취해지는 귓속말 자세에 미간을 좁혔다.


“너는, 그 유명한 오페라의 유령이 초대한 장본인이니까.”


“...그런게 진짜로 있다고 믿소?”


“...그런게 진짜로 있으니까, 네가 여기 있는 거지.”


앞 말투를 날 그대로 따라 하는 것에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털털하게 웃으며 내 등을 두어 번 두드린다. 유령이 초대했다고? 그래. 말은 안 해줬나 보군. 여기에선 이미 소문이 쫙 퍼졌는데. 그는 침대 위에서 과장된 자세를 취하며 양팔을 가득 벌려 일어났다. 아무래도 발레를 해 본 듯 남자치고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빙글, 도는 모양새도 제법 훌륭했다.


“여긴 오페라 소유주가 있고, 소장이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지. 모든 것은 오페라의 유령의 명령에 움직여. 그는 흉측한 얼굴에, 등은 곱사등이처럼 휘어있지.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날카로운 검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자의 가슴을 팍!!”


마치 손에 검을 쥔 듯한 자세를 취하더니 장렬하게 자결하는 자세를 취해 보이는 그에게 웃어 보였다. 말이 안 통하는군. 유령이라니.


“실제로 본 것 같은 말투인데?”


“...안타깝게도 아무도 아직 보지 못했어. 그냥 추측성 이야기들이 입을 오르내릴 뿐이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여 보이는 그에게 허탈하게 웃어 보이며 겉옷을 벗었다. 손목에 늘 차고 있던 시계를 보았다. 줄도 낡았고, 오래됐지만 항상 분신처럼 여겨온 시계는 어느새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페라는 몇 시에 시작하지?”


“우리는 제법 귀족 계층도 많이 오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께서는 늘 야밤을 좋아하시지. 아마 저녁 7시 즈음 일거야.”


어짜피 넌 오늘 당장 맡은 배역도 없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쉬지그래. 그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이왕이면 좀 더 오페라 극장 안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좀처럼 쉴 수 없으니까. 그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푹 쉬라고.’ 하는 말과 함께 웃으며 밖으로 나선다. 아주 조용하고, 한적해진 방 안. 좁지만 고급스러운 방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서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있으면 나와 보시오.”


...... 이렇게 말해봤자, 나올 리가 없나. 진짜로 있단 건가. 있으면 한번 보고 싶다. 날 왜 불렀을지. 물어 보고 싶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 둔 체 몸을 뉘었다. 푹신한 베개와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썩 마음에 들어 베개에 볼을 비비며 긴 한숨을 쉬었다. 아득하게 감기는 눈. 몰려오는 수마에 시야가 점점 흐려진다. 


그리고 어두운 밤. 나는 새삼 그 오페라의 ‘유령’이란자에 대하여 더 호기심이 생겨버렸다.


「조만간 보게 될 거다. 푹 쉬도록.」


일어나자 마자 한 사람이 누울 것치고는 제법 큰 침대에서, 내 옆에 놓인 고급 양피지 종이가 담긴 봉투 속 편지에 쓰인 짤막한 글. 그리고 그것을 봉한 붉은 실링 왁스의 가면 문양과 그 옆에는 붉은 장미꽃에 파란 리본이 묶인 체 ‘유령’이 왔다 갔음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


“릭. 준비됐나?”


아. 멍한 정신을 부여잡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보다 조금 낮은 곳에 있는 현악 단의 음악의 선율이 부드럽게 오페라 극장 안을 에워싼다. 이번 연극은 ‘파리넬리’의 Lancia Che Io PiangA. 카스트라토의 높은 음색. 그것을 고려할 만큼의 풍부한 성량이 필요했다. 긴 숨을 들이키고 배에 힘을 주었다. 아무도 없는, 아직은 텅 빈 관중석. 현악 반주에 맞춰 첫 음을 띄우자 사방에서 몰래 구경하던 악단들과 무용수들 사이에서 한탄과도 비슷한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그것도 이내 환하게 불빛을 비추는 샹들리에에 시선을 주자마자 점점 잊히기 시작했지만. 


La scia ch'io pian ga, la du ra sorte.

 

울게 놔두오 내 슬픈 운명.

 

e che so spiri la liberta

 

한숨을 짓네 나 자유 위해.


마치 그 교회에서 첫발을 내딛고 여기에 오는 마차 속의 내가 노래와 겹쳐 보였다. 미간을 찌푸려 버렸다. 가사가 마치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잡념에서 벗어나 다시금 텅 빈 관중석에 시선을 두루두루 주며 침착하게 목소리를 냈다. 1층에 시선을 주었다가, 2층으로-. 그리고 난 거기서 내 노래에 신경 쓰느라 발견하지 못한. 2층의 5번 박스석에서. 


나와 정확하게 눈을 마주치고 있는, 은백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의 얼굴을 가린 가면. 


난 그날 유령을 만났다.



노래를 부르는 내내, 나는 그와 눈빛을 마주했다. 가면 너머로도 감출 수 없는 눈빛. 이쪽을 차분히 내려다보는 그 눈빛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올라가려 한다. 드디어 봤다는 느낌. 그러나 마음 한쪽으로 닥쳐오는 불안감에 나도 모르게 노래를 멈춰버렸다. 내 노래가 멈춤과 동시에 천천히 죽어가듯 사그라져 가는 현악 반주. 


de miei martirisol per pie ta, si

 

내 이큰 고통 다 끊어 주소서...


“....릭?”


지휘자가 당황스러움에 내 이름을 부르는 것에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다시 5번 상자를 봤지만, 이미 그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는. 왜 나를 부른 걸까.


“괜찮나, 자네?”


“아. 괜찮습니다. 다시 한번, 마지막 한 소절만 다시 부탁합니다.”


정중하게 사과를 한 뒤에, 다시금 악보가 팔락거리며 마지막 소절을 연주할 준비를 할 동안에도, 나는 그가 떠난 5번 박스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


“여어, 릭!!! 오늘도 최고였는데!”


유령은 보는 안목이 있나 봐. 지난번 오페라 주인공은 전혀 관객을 모으지 못했는데, 네가 나가는 오페라가 이렇게 할 때마다 히트를 칠 줄이야! 또 일루나는 능청스럽게 자기가 이 오페라 극장의 주인이라도 된 듯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행동에 그저 웃으며 그대도 수고했소, 하고 조용히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복잡한 곳을 벗어나 조용한 내 방에 도착하자마자 창문 가로 달빛이 내려와 침대를 비춘다. 여전히 놓여 있는 파란 리본이 묶인 장미. 한참 침대 가에 다가가 리본이 메여진 장미 잎사귀를 매만지고는 장미를 모아둔 화병에 리본을 풀어 두고는 침대에 바로 누워버렸다.


“장미라.”


이제 조만간 100송이는 넘어갈걸. 이미 몇 송이는 죽어서 잘 말려 좋아하던 책 사이에 껴서 잎사귀 한 장 한 장을 말려 조그만 주머니 속에 담아두고 장미 향이 사라질 때까지 베개 옆에 두고 있긴 하지만. 풀어낸 파란 리본을 손에 쥐고 있다가 이리저리 리본을 만든 뒤 달빛에 비춰 보았다. 선명한 파란색. 


“도대체 왜 파란색이지. 흰색은 이제 이해가 갔는데.”


하얀색은 분명 그의 머리카락을 의미하는 거겠지. 정말 샹들리에에 비치는 그의 머리카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내일도 오페라가 있으니 지금 충분히 자 둬야겠다며. 


습관적으로 켜둔 협탁 위 스탠드를 끄고 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으려는 순간 나는 내 옆에 어느샌가 누군가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달빛에 보이는 은은한 검은 실루엣. 그리고 눕자마자 보이는 , 가면 너머의 푸른 눈과 달빛과 닮은 머리카락. 


난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난 이제껏 그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었다는걸. 


서둘러 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함을 숨기고, 그저 놀랐다는 핑계를 대기 위해 스텐드의 불을 켜려 했으나 팔을 잡아 당긴 체 쉿-. 하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억누르고 순식간에 내 위로 올라탄 그의 몸. 묵직하게 내려오는 그의 몸은 그가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무용수와 호흡을 맞춰야 하는 장면에서 몇 번이나 느껴본 몸무게와 아주 다른, 단단한 근육이 감싼 몸.


“.....”


“..... 오늘 공연도 제법 잘했더군.”


노래를 하는 듯, 속삭이는 듯. 조용한 방안에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가장 이상적인 목소리였다. 나를 내려다보는 탓에 느슨하게 묶어둔 그의 파란 리본도 길게 늘어져 그의 볼 옆을 따라 흘러 내려와 있다. 


“...그대가 그 유령이오?”


“그렇다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파란 눈이 한번 빛난 것 같은 것은 착각일까. 가만히 내 위에 군림한 그를 쳐다보고 나는 입을 열었다. 유령이라. 다른 사람들이 왜 그에게 무서움을 느끼는지 알고 있다. 그는 내가 메인이 아니면 엉망진창으로 오페라를 만들어버리건 했으니까. 이따금 협박 편지도 잊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항상 주인공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매출은 올랐으나, 이것을 그저 당연히 보고만 있을 사람은 없다. 누군가는 분명히 이 상태를 매우 불쾌하게 여기겠지.


“그대가 나를 왜 여기에 초대하고, 나를 그렇게 주인공 자리에 앉히고 싶은지 궁금하오.”


“...너만이.”


“.....?”


“너만이 내 노래를 소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는 이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내려와 침대 밖으로 몸을 옮겼다. 곱추? 추남? 추남은 잘 모르겠다. 가면 뒤는 어떤 얼굴인지 모르겠지만. 곱사등이라 한 사람은 아무래도 그 사실을 정정해야 할지도. 아니 정확하게 정정해 줬으면 하는데. 그는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나는 당연하게 그 손을 잡았다. 지금이 아니면, 무언가를 놓칠 것 같다는. 그런 느낌 하에.


따라오라는 말이 없어도, 그와 나는 몸을 움직였다. 그의 푸른 눈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고 말걸. 그를 따라 나도 모르고 있던 벽 한 칸을 차지하는 책장의 파란 책을 잡아당기자 자연스럽게 책장이 옆으로 밀려난다. 소리도 없이. 


“자.”


다시 한 번 손을 잡은 채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그 지하를 나는 그의 손과 벽에 걸린 횃불에 의지 한 체 한걸음, 한 걸음을 내 디뎠다. 지하의 습한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그의 향기. 그의 거처지인 듯한 이 지하와는 다른 빛을 담은 향기. 그를 따라 한걸음 한 걸음을 내 딛을수록, 점점 환해져 가는 불빛에 눈을 가늘게 떴다. 완전히 계단을 내려가서 처음 마주한 풍경은, 하얀 초가 불타고 있는 황금빛 촛대. 돌로 만든 듯 어색한 돌계단 위에 있는 단상 위에 놓인 파이프 피아노.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여실하게 남아있는 듯, 정돈이 잘 된 듯한 하나의 커다란 방처럼 보이는 이곳. 


“이리와.”


마치 강아지를 다루는 듯한 그의 말투에 미간을 좁혔지만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피아노 옆에는 찢긴듯한 종이도 보이고, 오래 쓴 세월의 흔적이 드러나는 깃 펜이 보인다. 잉크 자국이 묻은 깃 펜의 끝. 그리고 잘 정돈된 꽤 두꺼운 악보집. 손으로 쓴 것이 여실하게 나타나는 그것을 그가 집어 들고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너만이. 부를 수 있다.”


악보를 펼쳐 이리저리 꼬여있는 음표들의 향연을 그가 연주하기 시작하자, 지하 속에 잔잔한 피아노 음악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그의 한쪽 어깨를 붙잡고 악보를 쳐다보았다. 가사가 있구나. 어색하게 그의 노래에 맞추어 목을 가다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다른 곡들보다 훨씬 안정된 곡. 그럼에도 엄청난 음역을 필요로 하는 음악에 집중해서 차분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 간주 중에 드문드문 보인다.



You have brought me

당신이 나를 데려왔어요 


to that moment where words run dry,

말이 잦아드는 순간 속으로



마주친 두 눈,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눈빛을 마주한다는 것은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같다고. 소리 없는 메시지.


to that moment where speech disappears into silence, silence...

말이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으로, 침묵...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 눈에, 나는 가면 위로 어느샌가 입을 맞추고 있었다.



*



그날 이후로 나는 비밀이 하나 생겼다. 나는 그가 이따금 침실로 날 찾아와 가만히 옆에서 날 지켜보는 것에 익숙해 졌고, 그의 비밀의 공간에서 그와 함께 피아노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에 도취하기 시작했다. 내 몸에선 이제 나의 향기는 사라져 갔고, 오롯이 그의 향기가 배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속에 퍼지는 붉은 잉크같이 너무나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것은 계절이 두 번이 바뀔 때까지 지속하였다.


“맙소사, 또 유령이.”


그러나 그 잉크는 투명한 물을 물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잉크는 보란 듯이 더 붉어지고,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양은 점점 흘러넘치고, 또 흘러넘쳐 주변의 유리잔까지 물들일 정도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나기 시작했다.


“......”


「왜 그를 주인공 역을 맡게 하지 않은 거지. 그 돼지 멱따는 목소리의 성악가를 무대 위에 올려놓다니.」


경고다. 마무리는 그렇게 끝났으나, 천장에 목을 매단 체 축 늘어진 성악가는 다시 돌아오질 못할 길을 건너고 있었다. 그것은 경고가 아녔다. 그것은 그의 말을 어긴 대가였다. 나는 그 장면에 입을 손으로 가린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릭? 릭!!!”


일루나가 부르는 소리에도 괘념치 않고 서둘러 사람들을 밀치고 내 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를 만나야 해. 더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 해야 해. 이러다가는 사람들이. 그 생각을 마치자마자 내가 벗어난 그 지점에서 아마 그 성악가를 아끼던 단원인 듯, 처절한 목소리로 울던 남자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주먹 쥔 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더는 유령의 횡포에 참지 못해!!!! 이렇게 죽어나간 사람이 지금 몇 명이지!? 벌써 한 손을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었어!!”


“......”


서둘러 그를 만나야 해. 높은 사다리 위에 올라 올가미에 목이 걸린 그 성악가를 껴안은 자는 다시 한 번 목청을 높였다.


“유령을 찾아 죽이자!!! 더는 유령의 손에 이 오페라 극장이 움직이지 않게!!!”


죽이자!! 사람들은 중앙에서 마치 장군이라도 된 듯 외치는 사람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 울림은 기다란 복도 끝에 있는 내 방에 도달하기 위해 내가 달리는 속도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기다란 복도에 양옆으로 서서 남자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극장 안을 울리기 시작했다.


내가 차라리 표적이 되었다면. 모두가 내 탓이라 이야기했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텐데. 모든 표적은 그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여기 온 것도 다 그 유령 탓이라고, 너는 죄가 없다고.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천사와 다름없었다고. 지옥 같은 그 교회에서 학대받고 있던 나를 구해준 천사였다고.


그러나 그는 나라는 명목으로 피를 떨구는 붉은 칼을 든. 악마나 다름없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닫게 되어 버렸다.



*



“제발.”


“......”


그대는 왜 내 마음을 모르지? 이대로 가다간 그대가 죽고 말아. 지금 바깥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지 아시오? 당신을 죽이겠다고 눈에 핏대를 올리고 있어.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그날 저녁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내 옆에 어느새 그가 또 누워 있다. 그의 옷깃을 붙잡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눈물까지 흘리며 호소했다. 제발. 


“부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뺨을 매만졌다. 딱딱한 가면으로 가린 얼굴의 반쪽. 매번 바뀌는 가면이었으나 늘 얼굴을 감추는 그 가면.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게 해줘.”


그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뺨에 손을 올린체 나는 그렇게 울며, 제발 이라 몇 번이고 말을 꺼냈다. 조용히 속삭이듯, 제발. 이라고. 그의 뺨을 감싼 내 손 위로 그의 손이 겹치고, 다시 한 번 푸른 눈동자와 눈을 마주했을 때, 그는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당신을, 날 구해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게 해주소서. 그는 한참을 내 입술을 탐했다. 나는 그의 입술을 쫓아가듯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가 내 두 눈을 감겨주고 잠에 빠져든 다음 날로부터. 그는 6개월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협탁위에 놓인 파란 리본을 맨 장미에는 내 눈의 색과 닮은 에메랄드 빛의 반지 하나가 리본과 같이 묶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



“...... 그대 얼굴이 궁금해.”


“......”


언젠가 한번은 그렇게 그의 비밀의 공간에서 저런 말을 했었다. 비밀의 공간은 내 책장 뒤. 무슨 연유인지 남자 한 명이 밀어도 꼼짝없는 그 책장과, 그가 당겼을 때는 분명 책장이 열렸는데 도무지 내가 그 책을 꺼내 봐도 그냥 일반 책일 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그는 나를 찾아올 수 있어도 나는 그를 찾을 수 없었다. 나의 이 질문에 그는 피아노 치는 것을 멈추었다. 이쪽을 쳐다보는 푸른 눈. 가만히 그의 머리를 묶은 파란 리본을 당기자 그의 묶어진 머리카락이 풀어진다. 그럼에도 흐트러짐 없이 이쪽을 올려다보는 눈. 홀린 것 마냥 그의 머리카락 속을 파고든 가면의 끈을 잡는 순간 그가 입을 연다.


“에로스와 프시케 정도는 알겠지.”


“......”


“에로스가 말했지. 자꾸만 저녁에 몰래 찾아오고, 얼굴은 보여주지 않는 자신의 남편에게. 왜 나를 보고 싶어하지? 중요한 것은 그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나는 그것만을 그대에게 원하지. 나는 그대가 나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보다 같은 인간으로 사랑하길 바란다고.”


넌, 내 얼굴을 보고도. 그럴 수 있을까? 그는 피아노에서 일어나 한쪽 벽을 허물어 만든 듯한 휘장이 둘러싸여 진 공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가면을 벗기려는 사실 자체가 상당히 불쾌한 듯, 이쪽이 있다는 것을 무시한 채 그저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에 서둘러 그를 따라 그 방으로 들어갔다. 그와 잘 어울리는 앤틱 침대 하나만 자리한 그 방. 그는 겉옷을 벗고 침대 위로 옷을 내려놓은 뒤 나를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프시케. 얼굴이 문제가 아니란 것을. 왜 모를까.”


너는 그 프시케와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은, 그냥 인간인 거겠지. 그의 눈빛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살았던 곳은 지옥 같은 곳이었지.”


휘장을 걷어내고 침대맡에 앉은 그의 옆에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이쪽을 바라보지 않는 그의 얼굴에도 개념이 않고 말을 이었다.


“그대라면 알고 있지 않소? 그것은 길거리의 개보다도 못한 대우였어. 다만 우리가 필요할 때만 따듯한 물에 깨끗하게 씻겨져 노래할 기회를 준 것이 가장 최고의 대우였지.”


거리를 두고 앉은 덕에 그의 어깨에 기댈 수 있는 높이가 되자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 보았다. 편안한 느낌. 나에게 딱 맞춘듯한 그 느낌에 나는 눈을 감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늘 내 구원자를 보고 싶었소. 유령이라, 그런 게 있을까 생각했지.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드는 감정에서는, 두려움보다 기대감과 흥분감. 그리고 설렘이 가득했소. 날 구해준 사람이 당신이구나. 그게 당신이었구나 하는 생각. 그날 연습을 했던 날 당신과 눈이 마주칠 때부터.”


당신은 그 어느 관객보다도 더 날 위해 박수를 칠 사람이란 것을 그날 알아버렸거든.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기댔던 머리를 들어 올리자 그제야 이쪽을 바라보는 가면 너머의 눈이 보인다.


“그대가 어떻게 생겼던, 그대가 꼽추였던 반 불구였던.”


장갑을 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스러운 왕에게 입을 맞추듯 그렇게 입을 뻣뻣한 가죽 위로 맞추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할 수 있어.”


다시 고개를 들어 마주한 그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이 가득했었다.


아. 또 예전 생각에 멍하게 있었나. 서둘러 양 뺨을 한번 찰싹거리며 손으로 정신이 들게끔 뺨을 두드렸다. ...그래도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걸. 


「이 오페라를 하도록 해.」


6개월 만에 오페라 소장에게 간 편지와 함께 거기에는 그의 필체가 분명한 악보와 무대 의상부터 조명, 배경, 무용단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처음 내 부분의 노래를 받자마자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불렀던 그 노래. ...악보가 그라도 되는 듯 손으로 잉크 자국들을 훑어보았다. 아직 내 근처에 있구나. 


“...이걸 빌미로 그 녀석을 잡는 거야.”


사람들은 어느새 모여서 그를 잡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5번 박스, 항상 그가 비워두라는 그곳. 그곳에서 볼 것이 틀림없다며. 나도 모르게 5번 박스에 시선을 주었다. 가장 주인공이 잘 보이는 그 자리. 정말 당신은 다시 나와 눈을 마주할 수 있을까. 당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차라리 내 눈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내 근처를 맴돌아도, 계속 내 근처에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영영 떠나지 않았으면.


“자, 그럼 바로 연습 시작하지! 난 경찰을 불러 두겠어.”


소장의 호언장담과 함께 단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 또한 단원들 손에 이끌려 연습에 참여하지만, 5번 박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그날 연극은 사람들이 수근 거릴 정도로 매우 암울하고, 어두운 배경으로 시작했다. 가운데에서는 용암을 상징하는 불꽃모양의 비닐이 바람에 솟구쳐 흔들리고 있었고 그런 용암 바로 위에 양 끝에 나선형 계단이 놓인 다리 하나를 만들었다. 아슬아슬한 그 무대. 그곳에서 나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변해 피앙지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배역을 맡게 되었다. 문제는 여장을 하느냐 마냐의 문제였지만. 기존의 주인공은 여자였는데, 사람들은 그저 유령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그런 것은 상관없다며 있는 모습 그대로 보내기로 작정을 했다. 


정말 하기 싫었는데, 모든 사람의 강요로 올라간 무대. 남자 주인공인 피앙지가 뚱뚱한 몸을 이끌고 무대 위에서 젊은 남작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내 남작이 아름다운 사람을 꾀려면 살 좀 빼야겠지. 하고 말하는 것에 피앙지가 장난스러운 말로 되받아치며 살을 빼고 오려는지 무대 뒤로 사라진다, 하는 장면으로 첫 장면이 시작된다.


관객들은 처음 보는 오페라에 어리둥절한 표정. 나 같아도 그렇겠지. 돈 조반니 같은 오페라가 아니고서야 일반적으로 밝고 유쾌한 분위기가 대부분이니까. 음악이 바뀌고, 피앙지로 둔갑한 다른 날씬한 남자 배우가 나올 타이밍에 고개를 돌려 배우가 나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익숙한 목소리.


Past the point of no return,

돌아올 수 없는 곳을 지나쳤소


the final threshold

최종 관문에 다 달았소


what warm, unspoken secrets will we learn?

또 어떤 감춰진 비밀들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Beyond the point of no return...

돌아올 수 없는 곳을 넘어선 지금...



모든 극장 인들은 숨을 죽였다. 하얀 가면을 쓴 하얀 머리카락의 사내. 조명에 빛나는 그의 파란 눈. 그들은 직감했다. 그 사람이 바로 유령이라는 것을. 그러나 아무도 먼저 나서서 그를 잡을 생각은 못한 체 바라만 보았다. 5번 박스석에 집중적으로 투입된 경찰들조차 숨을 죽이고 무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놀란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천천히 바닥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오페라는 끝나지 않았다. 내 부분의 현악 반주가 시작되자 입을 열었다.



You have brought me

당신이 나를 데려왔어요 


to that moment where words run dry,

말이 잦아드는 순간 속으로


to that moment where speech disappears into silence, silence...

말이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으로, 침묵...


I have come here,

나는 여기에 왔어요


hardly knowing the reason why...

이유는 거의 모르지만...


In my mind, I've already imagined,

마음속에서는 이미 상상했어요


our bodies entwining defenseless and silent

우리의 몸이 엉키는 모습을 무방비하고 침묵한 채로


and now I am here with you

지금 난 당신과 함께 있으니


no second thoughts,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이


I've decided, decided...

난 결정했어요, 결정했어요...


두 주인공이 서로 쳐다보며 이내 알 수 없는 눈빛을 주고받는다. 그와 마주하는 눈에서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러 버렸다. 그냥 오지 말지 그랬소. 유령답게 그냥, 내 주위만 맴돌지. 차라리 그랬다면. 이게 당신이 내린 결정이오? 우리는 눈을 마주친 체 높은 나선형 계단을 한발짝 올라가기 시작했다. 


Past the point of no return

돌아올 수 없는 곳을 지나쳤어요


no going back now

이제 돌아갈 수 없어요


our passion play has now, at last, begun

우리의 열정의 놀이는 마침내 시작됐어요


Past all thought of right or wrong

모든 옳고 그름을 떠나


one final question

최종적인 하나의 질문


완전히 계단 위를 올라오기까지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와 박자를 맞추듯 천천히 계단을 올라와 다리의 양 끝에서 섰을 때, 나도 모르게 악에 받친 소리가 나올 뻔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모든 일이 엉망으로 돌아가지 않았어도 될 텐데.


how long should we two wait, before we're one?

우리가 하나가 되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when will blood begin to race

피는 언제 끓어오를까요


the sleeping bud burst into bloom?

잠든 싹은 언제 활짝 피어날까요


When will the flames, at last, consume us?

그 불꽃은 언제 우리를 불태울까요


천천히 불꽃의 바로 아래인, 다리의 중앙으로 다가가자, 그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다리의 중앙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점점 그리운 체향이 밀려오고, 날 바라보는 눈빛이다가 오는 것에 목이 메여 온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 그가 내 손을 들어 올리자 항상 끼고 있던 에메랄드 빛 반지가 빛을 낸다. 


Past the point of no return

돌아올 수 없는 곳을 지나쳤어요


the final threshold

최종 관문에 다 달았어요


the bridge in crossed, so stand and watch it burn

이미 다리를 건넜어요. 일어나서 불타오름을 지켜봐요


We've passed the point of no return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곳을 지나쳤어요


천천히 손을 붙잡은 체 모든 사람이 다 쳐다보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입을 맞추는 그. 그리고 이내 떨어진 입술과 동시에 속삭이듯 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 오랜만이군. 노래가 끝나고 조용한 무대 위로 나는 그의 머리 뒤로 묶인 가면의 끈을 서둘러 잡아채 당겼다.


“.....”


그와 동시에 닫히는 커튼. 빛이 차단되기 직전에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흉터라고는 하나 없는 얼굴. 오히려 극장 안에 꾸며진 천사모양의 조각보다 훨씬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있는 것에 그의 뺨에 손을 대 보았다. 콧날 위로 손가락을 얹은 체 천천히 손을 내리자 그가 얼굴을 훑어 내리는 내 손바닥에 입술을 비비듯 맞춘다.


"......“


“내가 프시케였으면 당장 당신의 심장에 겨눌 칼과, 당신의 흉측한 얼굴을 비춰낼 불빛을 당신에게 들이밀었겠지.”


그의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내리고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몇 번을 해도 부족한 듯한 입맞춤에, 다시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린다. 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 당신에게 말이오. 울음만, 목소리 반이 섞인 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온다. 잠깐의 재회도 잠시, 서서히 다음 장으로 올라가기 위해 분주하게 사람들이 무대를 해체하려는 것과 동시에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 오는 소리가 들린다. 


“...Ich werde zurück hier sein, um Sie zu nehmen.”


다시, 돌아오지. 그는 그 말과 함께 바람이 솟구쳐 오르는 불꽃모양의 비닐이 펄럭이는 바닥 속으로 뛰어내렸다. 서둘러 경찰이 붉은 커튼을 걷어 보았으나 이미 그는 사라진 직후. 끝도 보이지 않는 그곳으로 떨어지는 내내 마주친 눈빛. 그리고 내 손에 언제부터인지도 모르는 사파이어 빛의 내 반지와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쥐여준 체. 그는 그렇게 행방이 묘연해 졌다.




*



“벨 져. 손 좀...”


“언제는 천사라며.”


조용히, 벨 져. 아니 무슨, 그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잘도. 네가 먼저 천사라 했잖나. 천사가 친히 손을 잡아주겠다는데. 내 말에는 져줄 생각을 하나도 없는 것인지 그는 붙잡은 손을 그대로 잡은 체 탑 했을 고쳐 썼다. 하얀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그의 검은 모자에 한번 시선을 주었다가 마주 잡은 손을 쳐다보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가죽 장갑이 없는 맨손.


그리고 나란히 껴 있는, 에메랄드 빛 반지와 사파이어 빛깔의 반지.


“...그래서, 오늘은 어디로 갈까?”


“집으로.”


“...집은 어디에 포함하지 않는 걸로 하겠소.”


야박하군.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와 나는 그렇게 잊힌 추억인 폐허와도 같은 오페라 극장을 지나쳤다.


그가 떠난 이후로, 그는 약속대로 나를 데려오러 왔고, 나는 마치 영화 속 주인공 마냥 그와 함께 새벽을 틈타 오페라 극장을 빠져나왔다. 그날 이후로 유령이 떠난 오페라 극장은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린 체 그날을 기점으로 점점 수입이 들어오지 않아 문을 닫아버렸다. 사람 한 명도 없는 이곳, 오늘은 그곳에서 열리는 경매장을 잠시 구경 갔다 왔지만, 우리가 경매장에서 구매한 것은 아주 단순한 파란 리본 하나 뿐이었다.


*아래 음악은 마지막에 쓰인 벨져와 릭이 다리 위에서 부른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메인으로 틀어 놓고 싶었는데, 그냥 마지막에 넣습니다... 오페라의 유령 보세요.. 



' 벨져릭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릭] Hello, baby.  (0) 2015.12.29
[벨져릭] 크리스마스  (0) 2015.12.26
[벨져릭] 당근캐러 갔다가 (수위)  (0) 2015.12.17
[벨져릭] 플로네타리움  (0) 2015.12.17
[벨져릭] 생일 선물-1  (0) 2015.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