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學審問(박학심문)
카테고리
작성일
2015. 12. 17. 00:07
작성자
you. and. me.




* 현대 AU - 천문학자 릭과 스폰서 벨져입니다.


*벨져 시첨 참 힘드네요.. 릭만 써내렸더니..



“자- 다음은 이쪽이에요. 어린이 여러분, 우리 별은 어떻게 태어나는 걸까요? 아는 사람!”


활기찬 여직원의 말에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서로 손을 들며 자기만의 이야기를 펼쳐 내보인다. 아이들의 맨 뒤에서는 유치원 여선생들도 보인다. 한참 저녁인지라 학부모들의 염려를 덜어주기 위해서 인지 선생님들도 여럿이 왔다. 이런 곳이 좋은 건가. 


“그래도, 이렇게 같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한 번쯤 인사차 들려야 했는데.”


의례적인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아마 일반 가정집 옆에 사는 ‘옆집 아주머니’라는 사람이라면 이런 느낌일까. 둥그런 안경과 걸맞은 둥그런 얼굴. 완전히 보름달이 따로 없군. 어쩐지 원장이라는 직책과 제법 잘 어울리는 외모다. 머릿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난 어디까지나 ‘아이들’을 좋아하는, 착하고 성실한 후원자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줘야 하니까. 아이들은 선생님의 인솔을 따라가며 한 저녁인데도 별 이야기를 듣는다고 정신이 없다.


“......”


적당히 보다가 나오겠지. 원장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며 먼저 나가 있겠다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원장도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금방 나가겠다며 사람 좋은 미소를 보여준다. 감흥 없이 전시실을 빠져나왔다. 별이라니. 


“하늘 쳐다보면 널린 게 별인데.”


뭐가 신기하단 건지. 아무도 없는 듯 한적하고 썰렁한 복도를 거닐었다. 완전히 산 한구석에 있어서 오는 길도 가는 길도 불편할 것 같았는데, 어떻게 도로는 설치해 놨던데. 벽에 걸린 진부한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훑어가던 도중 투명한 유리문으로 만들어진 어두컴컴한 곳을 바라보았다. 


구둣발이 바닥에 부딪히는 뚜벅소리가 완전히 멈춘 고요한 복도. 유리문 너머에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커다란 천체망원경 기계 앞에 앉아있는 인영 한 명. 여기 직원인가? 얼굴이 잘 안 보이는데. 그저 조금 더 가까이서 볼 생각이었는데, 자동문이었는지 유리문이 양옆으로 물밀 듯 사라진다. 활짝 열린 문. 어두컴컴한 곳에서 망원경을 보는 남자라. 호기심 차원에서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그 뒤로 다가가 보았다.


“......”


무엇을 그리 열심히 보는 건지.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게다가 아까 거기는 난방이라도 되어서 따듯했는데, 여기는 산 지역에다가 망원경을 위해 돔에 뚫린 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춥지도 않은 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빈 공간에 한쪽에는 기다란 소파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마도 관측을 하다가 쉬려고 만든 것인지. 모양새는 그렇게 고급스럽지 않았다. 이런 텅 빈 공간에서 혼자 일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니. 아주 이상적인 직업이군. 가만히 숨을 내뱉자 뿌연 입김이 공기 중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인기척을 내 보아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건가. 


이제는 좀 이쪽을 한번 봐 줬으면 하는데, 하는 기분으로 발소리를 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이쪽은 보지도 않고 가만히 손을 뒤쪽으로 내민다.


“아, 거기 서류 좀 주겠소?”


“......”


주변을 둘러봐도 서류가 보이지 않는다. 조금 서성거리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약간 웃음소리가 들려 오며 이내 ‘내 바로 옆 책상에. 미안하오. 지금 새로운 천체를 발견한 것 같아서.’ 하고 말을 꺼낸다. 사람 웃음소리가 이렇게 들릴 수도 있나. 그것도 남자인데. 생각외로 듣기 좋은 음색에 선심을 쓰듯 그가 말한 서류를 넘겨 주었다. 평지에서 계단 한 칸 정도의 크기로 만든 단 위에 올려진 망원경을 의자에 앉아서 보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의 뒤통수에서는 이내 고맙소. 하는 말소리를 끝으로 또 말이 없어진다.


“...이정도면 됐는데, 그만 가도-.”


“......”


“......”


조금 놀랐다. 분명히 어두운 밤이라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는데. 달빛 때문인가. 이쪽을 올려다보는 선명한 녹색의 눈에 숨을 들이켰다. 그래, 이 기분을 뭐라 하면 좋을까. 생각해 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말은 없다. 책은 많이 읽었다 생각했는데. 이럴 때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헛수고였는지도. 


조금 커진 녹색의 눈동자는 달에 비추어 은은한 빛을 내는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은 한 번쯤 손을 머리카락 사이로 넣어 쓸어넘겨 보고 싶다.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부드러워 보였다. 나이는 나랑 동갑 대 인 것 같은데. 멍하게 입을 벌리고 동그랗게 눈을 떠 이쪽을 바라보는 것에서 묘하게 심박 수가 올라간다.


“누구...? 여기는 관계자 외에 출입 금지오.”


“아. 실례. 지나가다 길을 잃어서.”


당황스러움을 감추려고 말을 얼버무렸다. 고작 해 봐야 한 60평 남짓한 공간인데, 내 소유의 저택보다도 한참은 작은 이 크기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하는 나 스스로 우습다 느껴진다. 그래도 그에게는 말이 통했는지 눈동자가 초승달 모양으로 휜다.

“아, 그렇소? 보다시피 여기는 관측하는 곳이라서. 길을 알려줄 테니까.”


“괜찮으니 하던 거나 마저 하는 것은 어떤가.”


“....그렇다면 고맙겠지만,”


왜 자꾸 말을 놓는 것이오? 당돌하게 물어보는 그의 얼굴에 픽 웃어버렸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나랑 비슷한 나이대 아닌가?’하고 말을 하니 그가 ‘그대도 30살 초반?’ 이라며 대답해 온다. ...뭐라고? 


“나는 33살인데.”


그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단 위에서 내려왔다. 가까이서 서 있는 그는 생각보다 키가. 컸다. 앳된 얼굴은 둘째고 같은 키에 체격도 생각보다 좋았다. ‘실례. 나보다 연상이었군.’ 시선을 회피하며 그렇게 말하자 그가 또 낮게 웃는다. 이내 무슨 버튼을 누른 것인지 삑 하는 소리가 나마 자마 기계음이 들리기 시작하며 하늘이, 열린다.


“나이가 나보다 어린데도 반말인 건가. 웃긴 사내로군.”


가볍게 내밀어 진 손. 천천히 열리는 하늘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 덕분에 온 연하게 보이는 그 사람의 얼굴.


“릭 톰슨. 여기 천문관의 소장이오.”


“...벨져 홀든 이다. 오늘 견학 온 학생들의 스폰서 정도라고 해 두지.”


그는 무척이나 별과 닮았다.


마주잡은 손에서 나오는 온기가. 더더욱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



“아하... 그래서, 여기로? 다른 좋은 관측소도 많을 텐데. 새삼 고마운걸.”


“...딱히. 여기도 나쁘진 않다만.”


칭찬이오? 그는 잘 웃어 보였다. 어차피 자가용으로 온 거, 견학이 끝난 학생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나는 ‘별에 관심이 있다.’ 라는 이야기 하나로 그의 환심을 샀다. 덕분에 여기서 좀 더 머물 구실이 하나 생겼다. 물론 당사자는 이런 속내는 모르겠지만. 그가 내밀어 주는 머그잔에는 온통 별이 그려져 있었다. 그 사람과 닮은 컵에 실소해 버렸다. 완전히 애들이 쓰는 컵 같군. 별 속에는 진한 밤하늘과도 같은 커피가 담겨 있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커피라. 


“...소파가 성인 남성 둘이 앉기에는 좀 좁지?”


“괜찮다.”


딱 붙은 것만 빼고는. 이상하게 이 온기가 낯설다. 바로 옆에 사람이 앉았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허벅지랑 허벅지가 맞닿아 온기를 나눈 다라. 생각 외로 나쁘지 않군. 그가 건넨 커피를 한 모금 마셔 봤다. 달다.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이내 한 모금 더 마셔 보았다. 여전히 달다. 단 것은 질색인데. 


“어릴 적에 아버지도 별을 유난히 좋아하셨거든.”


“그래서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는 건가? 효심도 지극하군,”


나와는 전혀 상반되는 이야기에 약간은 차갑게 말이 나가버렸다. 내가 뱉은 말에 그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느껴지는 것을 무시하고 하늘을 바라보자 확실히 도시와는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까만 밤하늘에 달 하나랑, 수많은 별. 금방이라도 이쪽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별의 향연에 눈을 찌푸렸다.


“그대는 별에 관심이 많다 했지.”


“...뭐.”


어느정도는. 말끝을 흐리고 커피를 다시 입에 대었다가 컵을 내려놨다. 달다. 더는 먹었다간 설탕 중독에 걸릴 것 같다고 생각하는 찰나에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 


“벨져. 이리 와봐.”


원래부터 사람이 경계심이 없는 것인지, 인정이 많은 것인지. 내 손을 붙잡는 그의 손길에 잠시 움찔했다. 그도 그걸 느꼈는지 잡은 손을 한번 쳐다보다가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본다. 아. 미안. 그가 이내 손을 빼 내는 것에 아쉽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아쉽다?


이젠 갈 때까지 간 거로구나, 벨져 홀든. 헛웃음을 지으며 그가 얼른 오라는 손짓대로 몸을 일으켜 따라갔다. 이것저것 나는 잘 모르겠는 버튼들을 익숙하게 누르고는 그가 의자에 앉아서 망원경을 뚫어지라 쳐다보더니 그 상태로 또 더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한다. 애도 아니고. 한숨을 쉬며 그의 눈높이에 맞게 하려고 망원경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 옆으로 고개를 숙이자 아까 마신 커피의 향보다 더 달콤한 냄새가 코를 스쳐 지나간다. 덕분에 나도 모르게 귀 끝으로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남자가 이런 향을 써도 되는 건가. 아니, 그냥 설탕 향긴가? 온갖 잡생각에 뒤엉켜 있을 때 그가 고개를 살짝 때어내며 망원경의 렌즈 구멍을 가리켰다. 보라고? 랜즈 구멍을 같이 가리키고 눈도 한번 가리키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한 번 더 짙은 한숨을 내쉬고는 렌즈를 들여다보았다.


파란색. 너무나도 짙은 파란색의 우주 근처에 은색으로 빛나는 별. 그냥 봐도 아름답다-. 라는 이야기가 저절로 나올듯한 광경을 직접 눈에 보고 있자니 귓가로 조그맣게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당신을 닮았지?”


‘새로 발견한 성운이오. 그대 이름이라도 붙일까.’ 자꾸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에 망원경에서 시선을 떼고 이쪽을 쳐다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금 본 별 중에서도 약간 녹색 빛을 띠는 별을 본 것 같은데. 꼭 그거랑 닮았군. 그의 의자 뒤로 굽혔던 허리를 펴자 의자에 앉은 채 고개만 뒤로 넘기며 ‘아름답지 않소?’ 하고 물어보는 그의 말에 다시 허리를 숙여 보았다. 


“그래.”


아름답군. 눈과 눈이 얽힌다. 그의 눈은 별 한 줌을 뿌려 놓은 것 마냥 반짝거렸다. ‘...그래?’ 묘하게 느려진 그의 대답에 답을 해준다. 그래. ...그래? 다행이오. 녹색 달이 초승달 모양으로 휜다. 지금이라면 달의 온기를 한 번쯤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대로 달과 같이 휘는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위치가 달라 미묘하게 어긋난 입술이었지만. 온기는 그대로였다. 그는 생각외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가 힘주어 의자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무서운 건가. 이상한 건가. 어긋난 얼굴의 자세로는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 입술을 떼는 순간 또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태양처럼 얼굴이 붉어진 네가 커다란 눈을 가끔 깜빡거리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



나는 그 직후 그곳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오히려 머릿속은 너무나 깨끗해 졌다. 차 창문에 팔을 얹고 늘 그랬던 것처럼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며 지나가는 숲의 풍경을 이따금 쳐다보았다. 숲길이 울창한데도 달빛이 군데군데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나뭇잎을 타고 흘러내리는 녹색의 빛이 차 창문 속으로 투과되는 것만 같아서 나는 그 자리에서 차를 멈추고 핸들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여기는 온통 그사람 천국인 건가. 하는 생각과 함께. 


그날 이후로 아주 깨끗해 진 머릿속은 온통 별로 가득 차 버렸다. 나도 모르게 일하는 틈을 타 몇몇 직원에게 시켜 별에 관한 책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내용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네가 그것과 연관되어 있으니까. 그를 떠올리기 위한 일종의 매개체일 뿐. 


“한 달인가?”


그사람에게 입을 맞추고 난 지 정확하게 한 달이다. 이젠 그 날짜가 잊히지도 않는 것에 이마를 감싸 쥐며 책상 한쪽에 잔뜩 쌓인 책 한 권을 골라잡고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9시. 그곳에 도착하면 11시쯤 되겠지. 연락 한통도 넣지 않고 그냥 차를 몰고 이성을 무시한 채 움직였다. 사방에서 어딜 가냐는 물음에는 별도로 대답하지도 않은 체. 자꾸만 울리는 전화기조차 배터리를 분리해 버린 뒤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었다. 


답답하고 갑갑한 빌딩 숲을 지나서 한참을 들어가다 보면 나오는 숲길.

오늘도 이 숲길은 그 사람으로 가득했다.


*


“...벨져?”


“...깨운건가.”


아니, 아니. 들어오시오. 그는 얼른 들어오라는 듯 어깨에 가볍게 두른 숄을 대충 추스르고 문을 열어주었다. 닫힌 입구를 생각하지도 못하고 차를 몰아 왔건만,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하고 생각하고 문을 힘있게 발로 한번 차자마자 덜컹거리는 소리에 그가 깼나 보다. 바로 안쪽에서 불이 켜지고 낯익은 인영이 걸어나온다. 자다 일어난 것인지 붉게 충혈된 눈이지만, 나를 발견한 그는 또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떠 보인다. 


“여기서 생활하는 건가?”


“음...아무래도 그렇지?”


도시에서 살면 여기까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말이오. 그는 웃어 보이며 다시금 우리가 처음 만났던 관측관의 문을 열었다. 잠은? 그에게 물어보자 그가 웃어 보이면서 우리가 앉았었던 소파를 가리킨다.


“저게 내 침대인데.”


“... 자라.”


그렇지만 그대가 앉을 곳이 없잖소. 괜찮아. 잠은 다 깼으니 이리 오시오. 그는 웃으며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옆자리를 두어 번 두들겨 보았다. 지난번과 똑같은 위치. 이번에는 다행히도 완전히 돔이 닫혀서 따듯하게 실내가 덥혀져 있다. 그가 어쩐 일로 왔소? 하고 물어 보는 것에 나는 말없이 책만 건넸다. 이거 하나 준다고 여기까지 온 것이오? 당신도 은근 헛똑똑이군. 그가 웃으며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엇을 찾는다. 뭘 찾는가 했더니 이상하게 생긴 막대기에 육각형으로 구 형태를 만든 스텐드 같은 것을 들고 오더니 스위치를 누른다. 


“...이건.”


“플로네타리움. 당신은 이런 것 처음 보려나.”


마치 가상의 우주에 있는 것 마냥 온 방 안이 우주처럼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 플로네타리움의 그림이 움직이는 거겠지만. 신기하게 유성 떨어지는 것까지 표현이 되어 있다. 그가 졸린 눈으로 눈을 한 손으로 비비며 플로네타리움의 아래쪽으로 비치는 불빛 밑으로 글을 읽으려 하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졸린 눈으로 퍽이나 읽히겠군.”


“그래도 그대가 선물 주러 여기까지 왔는데. 읽어봐야지.”


한숨을 쉬며 그의 손에 든 책을 빼앗아 어둑하지만 희미하게 빛나는 불빛에 의존하며 책을 펼쳤다. ..하필이면 가져온 게 무슨 소설 책류다. 그도 제목은 크게 씌어서 보이는 것인지, 당신 이런 책을 나한테 선물한 의도가 무엇이오?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고는 ‘나는 이런 책 볼 나이가 지난 것 같은데...푸핫.’ 하고 웃어 보이며 얼른 읽어 보라는 듯 호기심 담긴 눈빛으로 종용한다. 그래 봤자 붉게 달아오른 눈의 토끼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 어느 한 시골에서-.”


진부한 이야기. 시골 마을의 양치기 목동이 스테파네트란 아가씨의 소식을 듣기 위해 마을에서 오는 사람들을 기다린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스테파네트란 아가씨가 목동이 사는 산으로 직접 올라와 목동을 만난다는 이야기. 게다가 그날 따라 스테파네트란 아가씨는 드레스까지 입고 있었다나. 읽는 내가 점점 아이가 되어 가는 느낌에 한숨을 푹 쉬니 옆에서 그가 비몽 사몽한 목소리로 ‘계속 읽어주시오.’ 하고 말을 흐린다. 잘 것 같은데. 안잘 것이오. 계속 읽어줘. 말은 그렇게 해도 눈은 반쯤 감긴 그의 모습을 잠시 보다가 마저 읽었다.


그러던 그녀는 목동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러 산을 올라왔다가 이내 소나기 때문에 발이 묶여 목동과 하룻밤을 보내...... 벨져, 이거 19금이오? 아니. 조용히 해라. 말은 그렇게 하는데 자꾸만 앞뒤로 붉은 글씨 19를 찾아본다. 다행히 없다는 것에 안도 하며 보냈다. 하고 다시 마무리를 짓자 그가 웃어버린다.


“그리고-. 소녀가 소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어깨 위로 툭 하니 무거운 것이 기대어 온다. 달큼한 차향이 다시금 올라온다. 


「소녀가 소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을 때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


기대어 오는 그의 머리를 한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가끔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은 예상대로 부드러웠다. 매만지는 손길에 그가 잠결인지, 진담인지. 그래서? 뭐라 말했소? 하고 웅얼거리듯 말이 들려온다. 


“... 수많은 별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다.”


릭? 그의 이름을 불러 보지만, 잠든 사람은 답이 없었다.


수많은 별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별 하나가. 몸을 조금 움직여 그의 고개 위로 얼굴을 숙여보았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다. 라..


다시한번 맞닿은 입술의 체온. 한 달만의 입술의 온기는 제 주인을 찾기라도 한 듯, 심장을 다시금 울리기 시작했다. 


벨져?


눈을 감은 체 상당히 졸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벨져. 이번엔 도망 안 갈 거지?


그의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자세를 고쳐 그가 편하게 어깨에 기대 올 수 있도록 어깨를 낮추었다. 그래. 그 대답하나에 그는 안심이라도 한 듯 깊은숨을 내쉬며 완전히 수면에 빠져들었다.


가만히 하늘에서 움직이는 별을 쳐다보았다.


예전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름답군.’ 이라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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