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學審問(박학심문)
카테고리
작성일
2015. 12. 11. 00:45
작성자
you. and. me.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슴다...



*앵슷과 해피의 중간입니다.



*소설이니까 가능한 이야기겠죠. 




「사랑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하지만 뜻대로 안 되는 것과 같이

영원히 사랑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J. 라브뤼이엘

 

 

 

달렸다. 자꾸만 달렸다.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모든 것이 다 잘못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뺨을 스치고 흘러가는 것이 눈물인 것을 알지만 닦아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따금 치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들 사이로는 가끔 욕도 들려오는 것 같지만, 그들의 심정을 다 알아줄 여유는 없었다. 공간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무작정 달리며,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릭!!”

 

 

큰 거리 한복판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그와 나의 숨바꼭질이다. 술래는 항상 그였고, 숨는 자는 항상 나였다. 우리는 이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관계다.

 

그러나 늘 그 술래는 날 찾고 있었고,

 

그런 술래를 피해 난 늘 도망갔다.

 

이제는 지친다는 기분만 든다. 더는 울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난 너에게 다시 잡혀 버렸다.

 

“릭.”

 

바쁜 사람들은 거리 한복판에서 우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쫓는 것에 흥미를 주지 않았다. 그의 손은 내 팔을 단단하게 잡고 놔줄 생각은 없어 보였고, 나의 팔 또한 그를 뿌리치고 싶지 않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릭. 돌아가자.”

 

“어디로?”

 

얼굴이 완전히 눈물로 범벅되어버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모든 풍경이 회색빛으로 퇴색하는 것만 같았고, 이 거리에 그와 나뿐이라는 느낌만 받고 있을 뿐이니까.

 

“돌아가. 돌아가시오. 당신이 여기 있으면 안 돼.”

 

“릭.”

 

그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말 없는 동의의 행동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것도 못 한 체 거리 한 복판에 서 있을 뿐이었다.

 

 

*

 

 

“좋아. 그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쉽게 맞출 수 있겠지.”

 

거의 일상의 반은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하곤 한다. 푹신한 침대 베개에 팔을 괴고 머리를 받치는 그는 이내 글쎄. 벨져 홀든은 잘생겼다는 정도겠지.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정답인데.”

 

“항상 물어보는 질문이니까. 지겹지도 않나.”

 

그대가 지겨울 리는 없소. 팔로 그를 가볍게 밀자 그는 순순히 누워 버린다. 그런 그의 위로 올라타 게이트로 휴대용 사진기를 꺼내 그의 얼굴을 찍으려 하자 그는 또 눈을 찌푸리며 카메라 렌즈를 손으로 가려 버렸다.

 

“한 장만.”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그렇게 사진이 필요한가?”

 

결국 카메라는 또 그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협탁 위로 치워지는 카메라를 따라 안타까운 얼굴을 해 보이자 그가 한숨을 쉬며 허리를 붙잡아 온다.

 

“그대는 아직 잘 몰라.”

 

“뭘?”

 

추억을 모르오. 나는 그대와 함께 있는 이 시간 1분 1초가 너무 소중한데. 뭐라도 하나 남겨보고 싶은데, 그대는 너무 여유로워. 그렇게 말해줘 봤자 그는 아마 ‘어차피 계속 함께 있을 건데?’ 라는 말로 반문해 올 것이 뻔하다. 나는 그에게 그저 웃어 보였다. 그는 나의 웃음에 아무런 답을 찾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넌 항상 그런 식이지. 답을 주지 않아.’라고 대답하며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그대가 잘생겨서. 나중에 그대 늙었을 땐 그대랑 똑 닮은 다른 남자나 찾아볼까 하고.”

이때다 싶어 그의 옆구리를 간질거렸다. 간지럼 따위는 안 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그의 옆구리를 만지작거리자 그가 살짝 웃어 보이며 나의 터무니 없는 말에 명답을 내놓는다.

 

“그런 놈이 있어도 소용없지.”

 

묘한 웃음. 그가 이따금 자신 있을 때만 나타내는 표정. 그런 그의 눈을 마주치자마자 뻥 져서 또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차피, 너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버릴 테니까.”

 

그의 말에 나는 정색하며 한 대 때려도 되겠소? 하고 물어보았다. 그런 그는 얼마든지. 하고 눈을 감아버린다.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런 자신감은. 눈을 감은 그는 자는 것만 같았다. 미동도 없는 그를 쳐다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우리’에게 ‘영원’이란 것이 허락될까, 벨져. 눈을 감은 그에게 마음속으로 물어본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항상’이란 단어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눈을 감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자신만만한 그의 입술 끝이 올라간다.

 

벨져. 이런 자신감 넘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

 

그대가 아직 어려서 ‘사랑’이란 진짜 의미를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그래도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이 날 안아주는 이 팔을 사랑해.

 

당신이 언젠가 ‘사랑’이란 단어가 절대 좋지만은 않은 것임을 알 때가 되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에게 입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감긴 눈을 살짝 떠보자 그가 또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입을 맞출 때는 눈을 감는 것이 예의라고 늘 말하던 그의 말과는 달리. 민망해져서 그의 눈을 손으로 덮어버리고 이내 살짝 손가락 틈을 벌려 본다. 어두운 손에 가렸지만 빛나는 그의 눈.

 

“푸핫. 눈 좀 감으시오. 그렇게 자꾸 쳐다보면 민망해서.”

 

그런 나의 대답에도 그는 말없이 쳐다보았다. 눈 감아. 눈 감아, 벨져. 그렇게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다시 그의 눈을 가린체 입을 맞추었다. 부디 내가 생각하는 그 모든 말이 다시금 내 머릿속을 지배하지 않기를 빌며.

 

 

*

 

 

문에 기대서 커다란 욕조에 몸을 담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욕조 속에서 가만히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기사단에 있을 때부터의 습관인 듯 좁은 욕실은 싫어하는 것 같은 그의 말에 욕실 바닥을 고쳐서 욕조가 아닌 바닥을 파서, 공중목욕탕과도 같은 모습의 욕실이 되어 버렸다. 덕분에 욕실이 웬만한 방 하나를 차지하는 크기를 가져버려 샤워부스는 결국 다른 방 옆에 조그맣게 욕실 하나를 더 만들어 설치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욕실 바닥에 뻗어 바닥에 고인 물기에 젖어가는 게 보기 좋지 않아 늘 집에서 입는 셔츠와 청바지 차림 그대로 맨발로 욕실 문을 닫으며 그에게 걸어 들어갔다. 천장에 고인 수증기가 뚝뚝 떨어지며 욕조에 파동을 줘도 그는 미동도 없다.

 

“감기 걸리겠소.”

 

그의 옆에 바닥에 궁둥이를 닿지 않게 앉아 그를 바라보며 말하니, 역시나 그는 내 목소리에 감은 눈을 그제야 떠 보인다. 물기 먹은 머리카락을 한번 쳐다본 그가 이내 천천히 욕조에서 일어나는 것에 얼굴이 점점 빨개진다. 오..왜일어나는건데. 왜 일어나는 것이오. 얼굴을 손으로 가려 봐도 이미 손가락 사이는 또 벌려져 볼 건 다 본다. 마치 공포 영화를 보는 사람처럼. 물론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은 공포라 치기엔 엄청 좋지만. 아니. 좋은 게 아니라... 모르겠다. 게다가 앉아서 보니까 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마자 그는 다시 욕조에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몸을 담근다.

 

“어휴, 착하다. 우리 벨져.”

 

그에게 놀리듯 말을 건네 보았다. 다행히 이제 보이지 않는 살색 풍경에 손을 내리고. 말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눈이 조금 휘 번뜩 하게 빛난 것 같다. 잘못 건드렸다. 큰일이다. 서둘러 나는 문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이 모든 것은 마치 광대가 하는 느린 동작처럼 느릿하게만 보이는 것 같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나 보다, 어떻게 그 수중의 중력을 이겨내고 그렇게 빠르게 다가올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 그의 팔이 내 셔츠 뒷덜미를 잡은 것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뭣,”

 

말도 안돼. 반쯤 일으켜진 몸은 이내 그의 악력에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며 첨벙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빠져 버렸다. 갑자기 빠진 덕분에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물이 다 들어오기 시작한다. 괴로워.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공기와 얼굴이 닿자마자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정신없는 이 상황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착 달라 붙는 것에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를 찾기 위해 얼굴의 물기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눈을 뜨자 그가 보인다.

 

“벨져 홀든. 진짜-.”

 

“애 취급 하지 마라.”

“......”

 

그는 화난듯한 말투임에도 부드럽게 날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어린아이 다루듯 이야기해서 화가 난 건가. 그의 뒤로 물을 가르고 지나가 무릎 뒤를 무릎으로 지그시 누르자 그가 휘청한다.

 

“머리 감겨 주겠소.”

 

“하?”

 

“누구 덕분에 옷이 완벽히 젖어 버렸으니까.”

 

이왕 젖은 김에. 나만의, 벨져 홀든 달래주는 법. 웃으며 그를 욕조 모서리에 기대게 한 체 그의 뒤로 넘겨진 머릿밑으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옷에 샴푸가 묻든 말든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듯 거품을 내며 감아 주자 그가 나른한 듯 눈을 감았다가 뜬다.

 

“감기 걸릴 텐데.”

 

“이 정도 쫌이야. 고개 살짝 뒤로.”

 

욕조에서 물을 떠다가 그의 이마를 가린체 물이 눈 위로 올라오지 않도록 고정하고는 물을 부으니 거품기 섞인 물이 청바지를 더 적셔 온다. 그의 은발보다는 더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을 가만히 감겨 주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 감겨준다는 건 처음이구나.

 

“등도 밀어줄까?”

 

“오늘 무슨 일 있나?”

 

왜 갑자기 이렇게 서비스가 좋아졌지. 그냥 그런 기분이오. 싫소? 그는 감은 뒤 단정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딱히 거절하지 않고는 욕조 모서리 겸 욕실의 바닥에 걸터앉았다. 덕분에 그의 온몸에 상처들이 다 보인다. 밤에는 보통 달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그의 몸에 새삼 큰 상처들과 작은 상처들이 뒤섞여 있는 것을 보다가 그의 상처들을 손으로 훑어보았다.

 

나보다 분명 어릴 적부터 이런 전쟁터 속에 뛰어들어 온갖 일을 다 겪었다는 그의 흔적은 이 몸에 하나둘, 다 새겨져 있다. 너무나 큰 상처라 그 흔적이 다 남아 버린. 상처 위로 가만히 입을 맞추자 그의 몸이 살짝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내 입술을 떼 버리고는 그의 등에 말없이 비누거품이 묻은 수건을 위아래로 문지르며 등을 닦아내었다.

 

그가 견뎌온 아픔도, 같이 쓸어 내려갔으면 좋겠다.

"보기 좋진 않겠지.“

 

그의 등을 문지르던 수건을 멈추었다. 그의 뒷모습은 오늘따라 무언가 커 보였다. 훨씬 더 나보다 어른답고, 커다란 나무같이 보였다. 다시금 손을 움직여 그의 등을 문지르며 물었다.

그렇소? 난 괜찮다 생각하는데.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사진과도 같아서.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지만,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때로는 노인일 수도 있고. 때로는 여자일 수도 있다.”

 

그는 그저 오늘 저녁은 간단하게 파스타는 어떨까, 하는 뉘앙스로 말했다. 그것은 그에게 너무나 일상적이었던 것이다. 좀 더 힘주어 그의 등을 밀었다. 상처 자국은 완전히 거품에 가려버렸다.

 

“......”

 

말없이 그의 등에 묻은 거품 위로 물을 뿌렸다.

 

“그러니까, 너 하나 지키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상처는 내가 아무리 닦아 내려 해도, 다시금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덧낸 것 마냥 오히려 더 뚜렷하게 상처 자국을 보여주며. 넌 나를 지울 수 없어. 상처가 마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리고 이내 나 때문에 그의 등에 큰 상처가 생기는 그를 상상해 버렸다. 난 말없이 그를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

 

 

우리가 정확히 연애라는 것을 시작한 지 3년 차가 지났다. 당신은 어느덧 30살이 되어 머리카락도 전보다 길어 졌고, 약간은 앳되었다 싶은 눈매는 더 깊어져 성숙한 무언가를 느끼게 해 주었다. 나 또한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인지 예전보다 눈매가 조금 더 쳐져 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그 모습이 좋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옆에서 당신이 나와 비슷해 져 간다는 것을 눈으로 지켜볼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즐거움이었다.

 

“와. 벨져 머리카락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럴 시간이 있었으면 진작에 잘랐지.”

 

그는 한숨을 쉬며 대충 근처에 있던 끈으로 아무렇게나 머리카락을 묶어 버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뒤로 다가서 빗을 들고 그의 머리카락을 묶은 끈을 풀어버린체 머리를 다시 빗겨주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자꾸만 만지고 싶게 하는 뭔가 마력 같은 게 있기라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단정히 그의 머리카락을 묶어주거든 정수리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순간 벨 울리는 소리가 들려 온다. 밖에서는 벨져 홀든 씨-. 편지 왔습니다! 라고 외치는 우체부의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숙인 내 목을 부드럽게 감싼 체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려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대문으로 다가가는 그의 머리카락은 결 좋게 말꼬리처럼 내려와 있었다. 음. 내가 묶은 거지만 아주 만족스럽군.

 

“편지 왔소?”

 

그의 옆으로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 위로 턱을 올렸다. 그러자 시야에 갈색의 고급스러운 양피지 재질의 편지 봉투에 Holden. 이라는 영자가 기품있게 쓰여 있었고, 붉은색 실링 왁스로 H. 가 크게 박혀 밀봉되어 있었다.

 

“...그대 본가에서 온 것이오?”

 

“그런 것 같군.”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말없이 편지를 뜯기 시작했다. 붉은 실링 왁스 자국이 편지 봉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에 시선을 주다가 그가 꺼내는 편지를 같이 읽어 보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일일이 오는 편지는 그가 혼자 읽었을 텐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편지를 같이 읽기 시작한다.

 

그래 봤자, 독일어로 잔뜩 쓰여 있어서 뭐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 보겠고, 필체 또한 벨져의 서체처럼 흘림체라도 알아보기 쉬운 흘림체가 아닌 아주 급하게 쓴 듯한 편지였다.

 

“벨져?”

 

“.......”

 

그는 잠시만. 하고 말없이 내 얼굴에 입을 맞춘 체 그렇게 편지지를 들고 서재로 올라갔다. 무슨 내용이길래 저러는 걸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내 그가 알려주겠지 라는 생각으로 부엌으로 갔다. 오늘 메뉴는 무엇을 해야 그가 조금은 고민을 잊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그날따라 그가 1년 전, 손에 딱 맞게 끼워준 반지가 푸른 빛을 띠며 빛을 냈다.

 

 

*

 

 

“잘 다녀오시오.”

 

“미안하다.”

 

“괜찮소. 일 때문인 걸 어떻게 하겠소.”

 

그에게 웃어 보이며 몇 일분의 갈아입을 옷을 챙긴 가방을 내밀었다. 그와 나는 요즘 늘 이런 식으로 대화의 시작을 이었다. 그 편지가 오고 나서 한동안 그는 같이 있어도 무언가 고민에 빠진 얼굴로 항상 한눈팔기가 일수였고, 어느 순간부터는 본가에 가는 시간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언제쯤에 돌아올지 잘 모르겠군.”

 

그는 말끝을 흐리며 반지가 끼워진 내 손을 들어 올리며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의 온기가 반지를 타고 내려오는 것만 같아서 웃어 버렸다. 괜찮다 해도 그러시오. 걱정 말고 다녀오시오. 돌아 올 땐 맛있는 거 많이 해 놀 테니까. 제법 결혼 몇 년 한 부부 같은 대화를 이어 나가자 그의 표정도 조금 풀어진다.

 

“다녀오지.”

 

그는 그 말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전차를 타고 갈 생각인 듯 주머니의 표를 한번 확인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기만을 기다리며. 그의 뒷모습이 어느 정도 멀어질 때 즈음 집 안쪽에서 전화가 울려 온다. 서둘러 전화가 끊길까 봐 거실 한 쪽에 있는 전화기를 들자마자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릭 톰슨입니다.”

 

[엇, 형은?]

 

“아. 방금 출발했소. 저녁쯤이면 도착하지 않을까.”

 

[그래? 괜히 전화했네. 아버지가 너무 득달하셔서 말이야.]

 

“아버님께서? 아버님께서랑 벨져랑 사이가 좋다는 것은 처음 알았소.”

 

웃으며 전화 옆의 소파에 앉아 그가 자주 읽던 책 하나를 책상 위에서 집어내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기 시작했다.

 

[헤에. 좋을 리가. 이번 정략결혼이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하게 하겠다고 엄포한 분이?]

 

“정략 뭐?”

 

페이지를 넘기려는 손을 멈추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몰랐어? 형이 말 안 해줬나. 둘이 같이 살길래 적어도 그 정돈 알려주는 사이라 생각했는데. 며칠 전부터 아버님 몸이 좋지 않은데다가, 다이무스 형도 딱히 결혼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아버님께서 벨져형 한 테 기대를 걸더라고. 형이 완강히 거부 하긴 하는데.]

 

순간 안도의 마음이 먼저 들어 버렸다. 아, 그래. 다행이다. 거절했구나. 그러나 그 이후로 바로 그는 엄연히 한 가문의 차남이지. 그래. 그걸 내가 잊어버렸구나. 그 생각이 그다음으로 들었다. 수화기를 잡은 반지를 낀 왼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작정하신 모양이야. 제대로 혼사 문제에 집중하지 않으면 지금 있는 집을 완전히 엎어 버리겠다 하니까. 덕분에 며칠 정도씩이나 자꾸 열리는 파티마다 형이 얼굴 내민다고 피곤한 지경이지.]

 

‘이번엔 언제쯤에 돌아올지 잘 모르겠군.’

 

순간 그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그렇소?정도로 대답해 주며 다른 말은 꺼내지 못했다. 어차피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다를 지금 내가 말해서는 안되고. 난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으니까.

 

‘그러니까, 너 하나 지키는 것 정도는.’

 

 

“그는 가끔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나에겐 안 해서 탈이오. 일단 잘 알겠소. 그는 출발했으니 곧 도착하겠지.”

 

[그래. 형씨, 어디 안 좋아? 목소리가 영.]

 

“아. 잠시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

 

그래? 그럼 푹 쉬어. 라는 말에 고맙다 대답하며 수화기를 끊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앉아만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 생각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걸까, 벨져. 내가 당신에 대한 짐 하나를 이제야 알게 되었어. 나는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걸까.

 

그날따라 그가 없는 집 안은 너무나 고요해서 잠깐 눈물이 났던 것 같다.

 

 

*

 

 

“벨져. 살이 말라가고 있어.”

 

그런가.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답이 없었다. 그는 항상 피곤해 보였고, 가끔 아무런 말없이 잘 해주지도 않던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 말에 나도 따라 웃어 보이며 말해주었다. 사랑하오, 나도. 그 말을 아마 몇 번은 들었을 거다. 그리고 그 말이 늘어갈수록 그는 말라갔다.

 

“스트레스받는 일이라도 있소?”

 

나는 내심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그가 나에게 정직하게 말해 조금이라도 짐을 덜기를. 그러나 당신은 완강했다. 몇 달 만에 급격하게 줄어드는 체중. 그럼에도 그는 기어이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인지, 딱히. 라는 말과 함께 홍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신 찻잔을 내려놓고 신문으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살짝 굽혔던 그의 손가락 사이로 반지가 빠져 버렸다. 그리고 이내 반지는 가벼운 물장구 소리와 함께 김이 올라오는 홍차 속으로 빠져버렸다.

 

“.......”

 

그는 자꾸만 말라갔다. 우리 사이에는 대화라는 것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는 힘들어했다. 나 때문에. 나와 이 집을 지켜보겠다는 그의 행동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매일 저녁을 소리 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밤을 새웠다. 점점 야위어 가는 그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벨져.”

 

그래서 나는 항상 나를 지키던 당신을 내가 지켜보려 한다.

 

“당신이 정략 결혼 때문에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았소.”

 

그의 눈이 조금 커져 나에게 향한다. 어떻게 알았느냐 하는 그의 얼굴에 나는 이글 홀든 이 우연히 전화를 했거든. 거기서 알았소. 하고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벨져. 여기까지로 할까.”

 

“뭘?”

 

그는 조금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나 때문에 죽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볼 만큼 자애롭고, 욕심쟁이는 아니다.

“이 정도 연애 장난 정도면. 이젠 그만 할 때가 되었겠지.”

 

때로는 생각한다. 내가 엄청난 사람이었으면. 조금은 당신이 나랑 사랑하는 사이다라는 것을 정정당당하게 밝혔지 않았을까.

 

“헤어져 주겠소? 벨져 홀든?”

 

그러나 나는, 그런 위인이 아니어서. 그저 당신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초라하게 당신을 지켜보려 한다.

 

 

*

 

 

그 후로 어떻게 되었냐고? 내 생각대로 그는 매우 화를 냈다. 그가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내 양팔을 붙잡고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지 말라며 나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결국 마음속에 담고 있던 말을 꺼내버렸다. 말을 꺼내는 순간 눈물이나 버렸다.

 

당신이 내 옆에서 나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그대를 더 사랑할 줄 알았소?

 

그 말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검사였다. 그리고 한 가문의 차남이었다. 그의 연인은 릭 톰슨보다는 타 가문의 귀족 집 여식이 훨씬 더 어울렸다. 그날 이후로 그와 나는 말없이 서로 데면데면 한 체 같은 곳에서 잠을 자는 것 또한 어색해져 나는 손님방에서 자고 그는 원래 침실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더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그를 너무나 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날 나는 편지를 남기고 그 집을 떠나버렸다.

 

안녕.

 

그 한 글자를 남기고, 떠나버렸다. 그가 마지막에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모른다. 난 그저 그 집을 나온다는 게 나에게 가장 맞는 판단인 것을 알았다. 실제로 그는 내가 떠난 이후로 얼마 안 가 홀든 가에 다시 머물게 되었고, 우연히 버리려 모아둔 신문으로 조그맣게 "골목길 살인 사건“의 뒷면인 2면에 크게 ‘홀든가 차남, 결혼.’ 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몇 달 전 신문 속에 보이는 그는 예전보단 살이 올라 있었다. 내 판단은 맞았다. 사진 각도 탓일 수도 있겠지만.

 

“다행이다.”

 

“릭?”

 

“응?”

“뭘 보고 계신 거에요?”

 

아무것도. 웃으면서 신문지를 덮어 버리고는 다시금 칵테일 쉐이커를 집어 들었다. 나는 지금 그와는 아주 멀리 떨어진 한 동내에서 우연히 칵테일 바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와 떨어지기 위해서 나는 일하던 직장도 그만두었고, 원래 혼자 살던 집도 팔아버렸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그저 안가면 그만이었다. 자동으로 잘리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도 덕분에 어디로 간다라는 말을 남기지 않고 그 동네를 떠날 수 있었으니까. 광고지에는 [초보도 가능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귀여운 웃는 아이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바(Bar)인데 아이 얼굴이라니. 그 광고지가 웃겨 나는 결국 그 바에서 일하고 있다. 아침에는 느긋하게 단출한 방 한 칸이 있는 집에서 가끔 떠오른 시나 글을 쓰곤 한다. 내용은 온통 그와 관련되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진 못하지만.

 

“헤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신문에 났나 보네요!!”

 

“도련님이 몰라도 되는 사항이오.”

 

웃으면서 어째 나이는 20살이 넘어가는데 키가 조막만 한 도련님의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으며 앞의 손님이 주문한 칵테일을 만들어 주고는 뒤로 돌아 쉐이커를 닦았다. 이제 제법 일한 티가 나는지 모든 게 익숙하고 능숙하다. 흐르는 개수대의 물을 타고 파란색 칵테일이 미끄러지듯 물을 타고 하수구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의 눈을 닮은 파란색 같았다. 멍하니 개수대에서 쉐이커를 닦고 있자니 문에 달린 조그만 종이 딸랑거리며 울려 퍼진다. 옆에서 도련님의 명랑한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가 들려 올 것 같은데 뭔가 말이 없다. 어디 갔나?

 

“.....어...서.”

 

말을 잊지 못한체 얼굴이 붉게 달아 오른 도련님의 얼굴을 보다가 도대체 누구길래 그러나 하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게이트를 타고 도망가고 싶었다.

 

“사람 한 명을 찾고 있는데.”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당신이 보였으니까.

 

 

*

 

 

“죄송하지만, 여기서 손님이 찾고 있을 사람은 없는 것 같소.”

 

“아니. 여기 있다.”

 

그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짧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항상 긴 머리카락만 보다가 짧아진 그의 머리카락은 익숙하지가 않았다. 분명 신문에서는 그는 긴 머리카락에 살도 조금 올라 있었는데 지금은 짧은 머리카락에 눈매만 더 깊어져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지친 모습.

 

제대로 식사는 했소? 그 말을 내뱉지 못하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릭.”

 

“죄송합니다만.”

 

그의 말을 자르고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날 더욱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그의 손가락에 걸려 있는 그의 반지였다. 그의 손에는 나와 전혀 디자인도, 색상도 다른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런 사람은 잘 모르겠군요.”

 

아저씨. 아저씨 이름 아니에요?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는 도련님을 살짝 밀어내고는 이내 그의 앞에 잔 하나를 내밀었다. 그와 닮은 푸른색의 칵테일. 그는 말없이 그것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릭.

 

그래 내 이름이다. 그가 불러주길 원하는 내 이름이다.

 

“... 결혼했다는 걸 축하한다 말해주길 원하시오?”

 

“릭. 그건.”

 

“벨져.”

 

다시한번 그의 앞으로 좀 더 칵테일 잔을 내밀어 보였다. 그의 손끝이 칵테일 잔을 잡은 내 손끝과 잠시 닿았지만, 그 느낌에 나는 서둘러 손을 빼버렸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우리는 손님. 그리고 흔한 바텐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건 네 생각이겠지.”

 

말없이 내 이름만 부르던 그는 칵테일 잔의 가느다란 몸체 기둥을 손으로 훑으며 말했다.

 

“널 찾느라 조금 여러 가지 대가를 치른 것뿐이야.”

 

어떤 댓가? 당신을 포기한 내 대가보다 그게 큰 걸까. 난 당신에게 다시금 물어보았다. 그래, 지금 당신은 날 가질 수 있는 상황이오? 그대는 결혼한 몸이고. 나는 그대랑 어울리지 않는 그저 일반인에 불과한데.

 

“......”

 

“당신이 그 결혼을. 당신에게 짊어진 짐을 나 하나 때문에 다 버릴 수 있을까.”

 

그에게 대답을 듣기도 전에 도련님의 어깨를 붙잡고 오늘은 몸이 안 좋아 이만 돌아가고 싶은데 혼자서 괜찮겠냐 물어보자, 그는 상황의 심각성을 안 것인지 얼른 가서 쉬라며 벨져와 나를 이따금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머리카락을 한번 매만져 준 뒤 서둘러 라커룸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어떻게 찾은 걸까. 대가를 치렀다는 것은 뭘까. 수많은 고민이 스쳐 지나가고 락커룸 문을 닫으려는 순간 그와 맞닿은 손이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그의 손은 거칠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야위어 있었다.

 

“바보같이.”

 

락커룸 문을 닫고 종이와 펜 하나를 들고 호텔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잔 한잔을 완전히 비운에 날 기다리는 게 확실한 투로 다시금 라커룸에서 걸어 나오는 나를 쳐다보는 그에게 쪽지를 건넸다.

 

“대답을 듣고 싶소?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떠났고.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말을 남긴 체.

 

*

 

“릭 톰슨으로 방을 잡아주시오. 있다 일행이 올 예정이라.”

 

안올수도 있지만. 혹시 벨져 홀든 이란 사람이 찾아오면 여분 키를 건네 주겠소? 그렇게 말하고 나니 계산대의 여직원은 알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키 하나를 내밀었다. 방은 2인이 들어갈 방을 잡았다. 키가 달린 열쇠고리의 구멍을 손가락에 끼고 빙글빙글 돌렸다.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나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해 냈다. 어떤 말을 먼저 하면 좋을까. 그리고 결국은 문 앞에 다다를 때까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정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좋은 방을 잡을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조금 화려한 방에 당혹했다. 그래도 침대는 푹신한 게 마음에 들어 침대 위에 누워 버렸다. 그가 올까. 그래도 마음은 이미 온다에 확신을 걸었다. 아무렇게나 코트를 벗어 바닥으로 던져 버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

 

잠깐 졸았나 보다. 어느새 방은 어둑하게 어둠이 깔렸었고, 불은 켜지지 않은 체 눈을 떴다. 창문에서 이따금 달빛이 들어오는 것 외에는 정말이지 조용하고 한적했다. 그는 결국 안 왔나. 그리고 몸을 돌리려 하는 순간 손에 닿아오는 따듯한 것에 나는 몸을 굳혔다.

 

“.......”

 

천천히 몸을 일으켜 협탁 위에 스텐드 가장 낮은 밝기로 켜 보았다. 정말 피곤했던 걸까. 수척해진 그의 짧은 머리카락이 먼저 보였고, 그다음은 내 허리에 팔을 단단히 두른 체 벗어나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그가 보인다.

 

“왜 이렇게 말랐소.”

 

“......”

 

그는 말이 없었다. 당연하지. 그는 거의 몇백 년 만에 잠을 자는 사람처럼 예민한 그의 옛날 행동과는 달리 눈도 못 뜨고 있었다. 얌전히 다시 그의 품으로 들어가니 그의 얼굴이 더 잘 보인다. 얼굴을 손으로 살짝 덮어 보자 예전과는 다르게 뼈가 만져지는 듯한 느낌에 울어 버렸다. 잘 지내라고 당신을 포기했는데. 당신 부인이란 사람이 참 원망스럽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랑 싫어하는 음식이라도 몰래 적어서 보낼걸.

 

“벨져.”

 

메말라서 잔뜩 튼 그의 입술을 엄지 손으로 쓸어 보았다. 내가 없는 동안 그는 어떤 나날을 보냈을까. 튼 입술 위로 입술을 천천히 겹쳐 보았다. 까칠한 입술의 느낌이 그대로 내 입술에 전해져 오는 것에 더 눈물이 쏟아진다.

 

그를 빼앗아 와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버렸다. 이대로 그냥 그랑 모든 것을 포기한 체 어디로 가버릴까.

 

“벨져. 우리 어디로 가버릴까.”

 

여전히 그는 답이 없었다. 어디로 가버릴까. 그곳에서 그냥 우리는 여기 없던 사람처럼 행복해 질까. 난 그럴 수 있소. 당신은 당신 모든 걸 버릴 수 있소? 그의 귓가에 가만히 속삭여 본다. 그러자 허리를 감아온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당신이 보고 싶었소.”

 

 

“......”

 

“그런데 난 갈 수가 없었어.”

 

“......”

 

“내 능력이 이렇게나 멀쩡하게 잘 사용 할 수 있는데. 당신 하나 다시 데려오는 것은 일도 아닌데.”

 

그의 눈을 따라 물길이 하나 옆으로 흘러내린다. 두번째로 보는 그의 눈에서 흐르는 그것에 나는 더 서럽게 울어 버렸다. 한동안 메말라서 더는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엄지손으로 그의 눈물을 훑어 내었다. 울지마. 울지마, 그대.

 

“당신이. 나랑 있으면 너무 힘들어져서. 그게 보기 힘들어서. 그래서 보내준 건데. 왜 이렇게 말랐소?”

 

응? 그제야 그의 눈이 떠진다. 말없이 그의 몸을 끌어안아 보았다. 예전에는 단단하고 넓게만 느껴진 그의 등이 너무나 야위어 있었다. 그가 가만히 허리를 감던 양손을 풀고 한쪽 손으로 머리를 끌어안는 게 느껴진다.

 

“왜 이렇게 말랐소...왜.”

 

그와 나는 결국 하룻밤을 그렇게 한참 울다가 지쳐 자 버렸다. 그가 가끔 내 이름을 불러 주며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의 품이 가장 편안했다. 오랜만에 느낀 그 행복에 잠깐은 취해도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잠이 들어 버렸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여전히 내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그의 품을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이제 막 결혼식을 치른 사람이다. 지금 날 데리고 간다거나,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일을 크게 만들지도 몰라. 욕심을 또 죽여버렸다. 그를 붙잡고 싶고, 그의 품에 더 남고 싶은 그 욕심을 죽여버렸다. 우리는 왜 이렇게 행복해지지 못할까. 그대가 26살이고 내가 33살이었을 때. 그때가 잘못이었나 봐, 벨져. 우리는 시작하지 않았어야 했어. 만나지 말걸 그랬소.

 

“안녕.”

 

그의 볼에 가만히 입을 맞추고 호텔 밖으로 걸어 나왔다. 잠깐이지만 그의 얼굴을 봐서 다행이었다. 그가 자는 틈을 타 협탁위에 종이쪽지를 남겼다. 벨져. 이젠 진짜 날 잊고 살아가. 차라리 그게 나아, 벨져. 현실과 희망을 동일시해서는 안돼.

 

벨져, 이제 조금은 알았을까.

 

‘사랑’이란 것은 완벽하지 않아, 벨져. 사랑이란 것은 항상 완벽한 행복만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오. 내가 그대를 여전히 사랑하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처럼. 사랑처럼 잔인한 것은 없어.

 

잠깐 호텔을 바라보다가 이내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이번엔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떻게 그의 손에서 벗어날까. 하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릭!”

 

그런 그의 목소리와 그의 얼굴을 멀리서 마주치자마자 나는 달렸다. 자꾸만 달렸다.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

 

 

“돌아가. 돌아가시오. 당신이 여기 있으면 안 돼.”

 

“릭.”

 

그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말 없는 동의의 행동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것도 못 한 체 거리 한 복판에 서 있을 뿐이었다.

 

“릭 톰슨. 어리석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

 

그는 짐짓 화가 난 듯 나를 끌고는 그 마른 몸으로도 날 골목으로 밀쳐냈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그는 표정을 굳히며 눈물범벅이 된 내 볼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려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지금 내 꼴을 보고도 밀어내다니 너도 참 대단하군.”

 

그는 묘하게 웃음기 담긴 말로 나에게 말을 건네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지금 6년 동안 날 버리고, 그래. 그건 버린 거다. 어떠한 동의도, 절차도 없이 날 두고 간 거지. 난 그런 사람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했고, 이내 아버지와의 약속은 지킨거나 다름없으니 바로 파혼해 버렸지. 그 자리에서 말이야. 그리고 난 사람을 풀어 바로 너를 찾았다. 결혼 한번 해 준 댓가 치고는 제법 괜찮은 거래였지.”

 

“......”

 

“나는 분명 네게 말했다. 너 하나 정도 지킬 힘은 있다고.”

 

“......”

 

그래, 너랑 그 집을 지키는 데에는 꽤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지. 네가 떠나서 변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는 말을 끝낼 때마다 이따금 숨을 몰아쉬며 내 얼굴을 매만졌다. 마치 보물을 만지듯 소중하게 만지는 그의 손길에 눈을 감아버렸다.

 

“네가 없는 동안 처음으로 잠이란 걸 자지 못했어.”

 

그리고 여전히 잠은 제대로 자지 못해. 그래도 어제는 두번째로 제대로 된 잠을 잔 것 같군. 그렇게 오래 잔 건 네가 가고 난 뒤에 처음인데. 그는 여전히 피곤한 듯 이따금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더 망가졌다.”

 

그가 가만히 품에 나를 끌어 안는 것에 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겼다.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너에게 간다고 약속하면.”

 

그 말에 나는 그의 옷깃을 그러 쥐었다. 아냐, 벨져. 그런 희망 섞인 말은 하지마. 내가 기대하게 하지 마시오. 그를 떨어트리려 애를 썼지만, 마른 몸에서 나오는 악력은 엄청났다.

 

“그땐 네가 날 원래대로 고쳐 줄 수 있을까.”

 

응? 릭 톰슨. 옛날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모든 걸 포기할게 릭 톰슨. 그러니까 제발 더는 도망가지 마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그래, 벨져. 내가 당신을 고쳐줄게. 원래대로.

 

다시 26살 때의 당신으로.

 

거의들리지 않을 듯한 말투로 말했지만, 그는 알아듣기라도 한 듯 나를 좀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난 그렇게 6년간의 도피 생활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때로는 생각했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까, 하고.

 

모든 사람이 누린다는 그 행복. 왜 우리는 못 누리냐 생각해 보고 원망도 해 보았다.

 

왜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사랑해야 하느냐고 원망도 해 보았다.

 

 

 

그렇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너무나 힘들어서. 그렇게 힘들게 만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난 그 사실을 40살이 되어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