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흑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가기 싫었어 화가나서 벨릭을 썼어
*앵스트 주의
황량하기만 한 거리. 액자를 쫓고 쫓아 겨우 그녀의 흔적을 찾은 곳은, 그녀가 말했던 메트로폴리스였다. 이제 이 긴 여정을 끝내고 싶다, 그런 생각과 함께 저 멀리서 어둑하게 보이는 메트로폴리스 내부로 발걸음을 디뎠다. 사람 하나 살아가는 것 같지 않은 골목. 그녀가 여기에 정말 있는 걸까. 유리 창문이 다 깨져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상가. 가끔가다 스쳐 지나가는 쥐들만이 이곳이 얼마나 황폐한 곳인가를 알려주는 듯했다.
발 한 걸음을 내 딛자 발끝에 치인 돌 굴러가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고, 그 속에서 난 개선문처럼 커다랗게 세워진 문에 기댄 체 날 기다리는 당신을 처음 보았다.
로브를 깊게 뒤집어써 목소리만 이따금 들리는 당신의 얼굴이 궁금했지만, 그보다 급했던 것은 액자를 찾는 일. 루사노 수도원으로 가야 한다는 당신과 함께, 그 수도원의 깊은 곳에 위치한 탑에서 강화 인간에게 보기 좋게 어깨 한쪽을 관통당해버렸다. 아직도 그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에 가끔 상처 위에 손을 대 보곤 한다.
“...뭐, 그가 책임이니 어쩌니 하며 치료해 주는데 도움을 주니까 나야 좋지만.”
릭 톰슨, 33세. 평범한 회사원. 현재 어깨에 구멍 하나를 달고 요양 중. 다른 사람들이라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데 급급할 텐데, 나는 평범한 일상이 아닌 어느 순간부터 목숨을 위해 급급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멋대로 붙여준 타키온이라는 칭호 아래에서.
똑똑.
“타키온. 들어가겠다.”
그의 노크와 목소리에 상처를 보느라 내려간 옷을 추스르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협탁 위에 올려진 낡은 ‘과학과 인간의 문명’ 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내용은커녕 사진도 재미없게 생겼다. 그에게 딱히 ‘들어오시오’ 란 이야기가 없어도 늘 그는 이 시간대에 들어왔다. 그의 개인적 용무가 다 끝나는 시간, 사이퍼란 이유로 별도의 병원에도 가기 어려워 그의 저택 한 방을 아예 개조해 날 여기다 앉혀 놓은 이후로는 늘. 저녁 9시마다 늘 나에게 온다.
“왔소? 일하느라 고생이 많군.”
“......”
너무 일 다녀온 남편 맞이하는 부인의 대사였나. 어색하게 콧잔등을 몇 번 긁고는 그에게 침대 옆 의자에 앉으라며 침대에 삐딱하게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좀 더 바르게 앉아 보였다. 아무렇게나 펴졌던 책의 페이지를 기억할 필요도 없이 덮어버리고 협탁위에 올려두자 그가 느릿하게 다가와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본다.
“상처는?”
“이제 완전히 나은 것 같은데.”
이따금 아픈 것 빼곤 말이오. 그렇게 덧붙이자 그가 옷을 치워보라며 눈빛을 준다. 이젠 하도 이런 눈빛을 자주 받아서 덤덤하다. 처음에는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는데. 당신 앞에서 벗으라고? 물론 남자끼리긴 한데, 그래도 뭔가... 늘 이런 생각에 얽매여 있다가 아예 생각이란 것을 놔 버리니 모든 것이 받아들이기 쉬워진다. 잠옷같이 느슨한 옷의 단추를 풀어 그에게 상처 부위가 여실히 들어가는 맨몸을 보이자 그가 상처 부위를 손으로 한번 쓸어본다.
“새 살이 돋았긴 돋았군.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아서 여차하면 다시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보시오, 나도 회사는 가야지.”
내 밥그릇을 당신이 지켜줄 것도 아니면서. 어깨 위에 닿은 차가운 그의 손이 자꾸만 상처를 매만지는 것에 몸을 움츠렸다. 차갑다. 그의 모든 것은 다 차갑게 느껴졌다. 서늘한 눈, 아니면 밤하늘에 떠있는 외로운 존재인 달과도 닮은 그의 머리카락색. 너무 깊고 깊어서 파랗기만 한 심해의 색과 닮은 그의 벽안. 그리고 항상 검을 쥐어서 그런지 단단하고 서늘한 그의 손. 모든 것이 차갑다. 나와는 정반대인 것 같은 사람. 이런 사람이랑 벌써 몇 개월을 이렇게 같이 지내고 있다.
“회사에는 별도로 말해 놓았다. 1년 정도 유급으로 휴가 처리가 되도록 이쪽에서 알아서 처리했다.”
손을 떼고 내 눈을 바라보는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급휴가? 우리 회사에서 그런 제도도 있었나. 귀족은 뭔가 다르긴 다른 건가, 아니면 단순히 그의 말솜씨가 대단했던 걸까. 어떻게 말한 건진 몰라도 일이 잘 풀렸다는 그의 말에 내가 내린 답은 그럼 다행이지만. 하고 말끝을 흐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바깥에 나가 보고 싶은데.”
“......”
“지금쯤이면 눈도 잔뜩 왔을 거고, 베네치아에 가서 곤돌라도 타보고 싶었는데.”
“베네치아까지 가려면 운송수단을 타고 가야 한다. 네 능력은 아직 쓰기엔 위험해.”
그는 말을 자르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저 상처만 보러 온 것이 다인 듯 밖으로 나서려는 그의 잘생긴 뒤통수를 노려보며 내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담아 그를 째려보았다. 그런 시선을 인식한 것인지 그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기에 급하게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며 그를 향해 방실방실 웃어 보이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근처에, 강가에서 곤돌라 정도는 탈 수 있으니까.”
내일은 메이드에게 준비하라 해 두도록 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멍하게 입을 벌리고 방금 무슨 이야기를 들었더라,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짓을 한참을 하고 나서야 드디어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바깥으로 첫 외출을 나갈 수 있구나! 라고 머릿속으로 판단을 마쳤다. 그러자 기쁨에 잔뜩 흥분한 나는 책을 집어들고 다치지 않은 팔로 열심히 퍼덕거리며 뭔지도 모르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드디어 밖에 나가는구나.
“밖에 나가서 도넛이랑, 도넛이랑, 도넛을 사 먹어야지.”
여기선 순 풀만 먹은 것 같다며 오래간만에 홀쭉해진 배를 단단히 채워주겠다 생각했다. 늘 좋아하던 초콜릿 도넛을 실컷 먹어야겠다. 설레는 기분으로 얼른 내일을 위해 자야겠다며 열심히 팔을 휘적거리던 것을 멈추고 협탁 위에 책을 올려 둔 뒤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어차피 소등은 있다가 메이드가 와서 해 줄 것이고.
내일은 부디 좋은 일만 일어나길.
*
“레피드. 내 옷은?”
“네 옷? 버렸지.”
그걸 버리다니! 그 코트가 얼마나 비싼 코트인데! 불편한 팔을 대신해서 그가 옷 입는 것에 대한 시중을 들어 주는 것은 둘째고, 그가 들고온 검은색투성이의 정장에 질려 서둘러 내 옷을 찾았는데 나오는 이야기는 저런 이야기다. 어째서? 왜 버렸소? 하니 당연하다는 듯, 그 구멍이 난 거적때기를 지금 내 옆에서 걸치겠다는 건가. 하는 대답이 나온다. 하긴... 그렇기는 한데 말이오... 말끝을 흐리며 그가 셔츠 단추를 매주고 타이까지 완벽하게 매 주는 것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향기가 난다.
“됐다. 기장은 맞긴 한데.”
살을 좀. 정장 마의 단추를 잠그면 뭔가 불편해 보이고, 풀어버리면 너무 자유분방해 보인다며 한참이랬다 저랬다 하는 그에게 그냥 위에 코트를 입을 건데 가는 게 어떻소, 라는 답을 내려주었다. 그는 그제야 코트를 들고 나에게 다가와 코트 단추가 잘 채워져 내 배를 가렸다는 것에 흡족해했다.
...아무래도 초콜릿 도넛 말고 그냥 크리스피 도넛 정도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 도련님. 그리고 친구분.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집사 할아버지가 인사하는 것에 둘 다 ‘친구 아니다, 친구 아니오.’로 일관시켜 버렸다. 내가 이 사람이랑 잘 지내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지. 거의 감금 수준이었다 생각했다. 저택 밖으로는 좀처럼 나가지도 못하고, 거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게 전부였으니까. 팔을 다친 이후로는 능력을 쓰고 싶어도 팔 한쪽이 뻐근해져 오는 것에 혹시나 안 그래도 위험한 능력이 더 위험해 질까 두려워 쓰지도 못했다. 결국은 정말 그 방에서 꼼짝없이 인형처럼 누워 있는 것밖에 한 게 없다.
오랜만에 디뎌보는 바닥은 생각외로 눈 덕분에 폭신했다. 구둣발이 가끔 미끄러질 것 같았으나, 그것 또한 재미있어 바닥을 보며 걸었다. 앞서 가는 그의 커다란 발자국 위로 다시 발을 디뎠다. 마치 한 사람이 간 길처럼. 이거 꽤 재미있는데. 한참을 그렇게 가다가 고개를 올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거벗은 가로수 사이사이로 꽤 신경을 쓴 듯한 가로등이 놓여 있었고, 드문드문 벤치가 강을 마주 보는 자세로 배치되어 있었다. 보통은 길가를 바라보게 해 두는 데 의외군. 거리의 건물들은 오래된 건축 양식의 고풍스러움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었다. 주로 알록달록한 계통의 집들은 마치 정말 베네치아에라도 온 것처럼 아기자기했다.
앞서 가는 그의 뒤를 바라보았다. 넓은 어깨, 반듯한 걸음걸이. 나와는 다른 그. 그의 앞쪽으로 점점 저 멀리서 배 한 척이 돌로 만들어진 강변 나루터에 정차된 것이 보인다. 흥분감에 서둘러 그보다 앞질러 배를 향해 다가가 보았다.
“그런데.”
“흠.”
“곤돌라를 우리 손으로 직접 저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없지 않았소?”
물론 사람이 없어서 한적하긴 한데 말이지. 곤돌라를 움직여 주는 사공은 보이지도 않고, 덩그러니 배만 있다. 옆에 갸우뚱하게 기울여진 간판에는 ‘알아서 노시오.’라고 매우 불 공손하게 쓰여 있는 것에 실소해 버렸다.
기껏, 아무 말 없이 그와 한참 한적한 주택가 사이의 강을 따라 올라오니 남겨진 건 배고, 있는 사람은 둘 뿐이었다. 그도 나름 적잖게 당황한 것인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것에 그를 스쳐 지나가 검은 코트가 더럽혀지든 말든, 적당히 품속의 손수건으로 그와 내가 앉을 자리를 닦아 놓고는 먼저 대놓고 앉아버렸다.
“......”
“연약한 회사원에다가, 팔 한쪽이 망가진 사람이 노를 저을 리는 없고.”
“......”
“잘 좀 부탁하겠소, 레피드.”
여유있게 다리까지 꼬고 앉아 있자니 그가 뜻밖에 선선히 자리에 있는 기다란 막대기로 능숙하게 사공처럼 강바닥을 밀어 배를 출발시켰다. 물론 배를 고정한다고 묶어둔 끈을 풀어내지 않아서 제자리 걸음을 했다는 일화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한참을 그에게 풋. 크흡. 하며 웃음을 가리는 척 그를 비웃자, 그가 그만 웃어라, 하고 한숨을 푹 쉬며 말한다. 적당히 유속이 붙어서 강물 흘러가는 대로 배가 흘러가는 것 같아 그에게 웃으며 당신도 앉으시오. 하고 권하니 그가 노를 배 한 쪽에 걸쳐 놓은 뒤 닦아놓은 자리에 앉았다.
“나쁘지 않군. 베네치아랑 비슷한 것 같아.”
“가봤나?”
어릴 적에. 뱃사공 중에 노래를 정말 잘 부르는 사람이 있었소. 사공이 노를 저으며 팁을 주면 가끔 노래를 불러 줬거든. 뭣도 모르고 흥얼거리곤 했는데. 그 목소리가 다시 들어보고 싶어서. 그때도 연세가 제법 있던 분이었으니 지금은 거의 할아버지 수준이실 텐데, 아직 계시려나 모르겠다. 그에게 웃으며 말해 주니 그가 덤덤히 무슨 노래? 하고 반문해 온다.
“...무슨 노래냐 물어봐도, 이탈리아어라서.”
“그런가.”
“흉내는 낼 수 있소.”
그에게 잘은 못 부른다며 사전에 경고한 뒤 흥얼거리듯 어색한 이탈리아 발음으로 뱃사공이 늘 불러주었던 그 노래를 대충 따라 불러 주었다. 아무도 없는 강변 가에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눈이 와서 하얀 거리. 어릴 적 뱃사공이 불러준 노래. 그러고 보니 어릴 적에는 뭐 때문에 그렇게 항상 신이 났던 걸까. 늘 행복하고, 기분 좋은 나날들의 연속이었는데. 지금은 이제 어른이라 그런 게 느껴지지 않는 걸까. 눈까지 감아가며 불렀던 노래의 끝을 흐리며 천천히 눈을 뜨자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그가 보인다.
“......”
“못 부르는군. 음정, 박자 다 이상하다.”
“그러니까, 못 부른다고 했잖소.”
괜히 혼자 기대해서는.
그래도 풍경이 좋아. 그때도 베네치아에서 눈이 내렸는데, 강이 얼기 전 마지막으로 운행되었던 곤돌라였소. 운이 좋게도 그걸 타고, 제법 오랫동안 사공이랑 이야기를 나누며 강변을 쭉 따라 이동했는데. 그에게 기분 좋게 웃어 보이며 여행이야기를 꺼내자 그가 다리 한쪽을 꼰 체 허벅지 위에 양손을 올린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제대로 못 물어봤군.”
“...맙소사. 그러고 보니 나도 당신 이름은 모르고 있었는데.”
서로 어색하게 말이 없어져 버렸다. 거의 그 집에서 같이 머무른 게 한 달이 다되어 가는데 서로 코드명으로 이름을 부르는 게 끝이었다. 게다가 메이드나 집사들도 ‘도련님’ 이상의 이름이나 호칭을 붙이지 않아서 더더욱 그의 이름을 몰랐고.
결론적으론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이름은?”
“먼저 이름을 물어보기 전에 자기소개 먼저하는 게 예의 아니겠소?”
그의 자세를 따라 하며 웃어 보이자 그가 끼고 있던 가죽 장갑 한쪽을 벗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그는 손을 내민 뒤 무겁게 입을 열며 벨져 홀든 이다. 홀든 가의 차남이지. 그의 맨손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손을 잡았다.
“릭 톰슨. 평범한 회사원이오.”
그의 손은. 뜻밖에 따듯했다.
*
“그래서?”
“게이트를 열 줄 안다는 사실은 그때 깨닫게 된 것이오. 실제로 그걸 제어 할 줄도 몰라서 한참을 혼자 수학여행을 다닌다는 기분으로 여행했지.”
그와 곤돌라에서 거의 한 시간 무렵을 이야기를 나누며 있자니 그에게 정신없이 이야기한다고 서늘하게 그의 뒤로 다가오는 그것을 나는 뒤늦게서야 봤다. 너무나도 낮은 다리가 그의 머리통을 직격타로 칠 것 같은데 그가 이쪽을 바라보느라 아직 파악하지도 못한 것.
“벨.”
“음?”
“벨져 앞!”
늦었다. 앞드리기엔 그가 뒤를 돌아보는 게 먼저일 것 같아 급한 대로 그의 팔을 잡아당기자 그가 급하게 이쪽으로 쓰러져 온다. 배가 출렁거리며 균형을 잃어 비틀거리는 것과 동시에 다리가 우리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떨리는 눈으로 다리를 쳐다보며 한순간 저 무식한 다리가 이사람 머리를 치고 지나갔을 후의 후폭풍이 엄청나게났겠지.
“무슨 다리를 저렇게 낮게... 벨져, 괜-.”
“......”
“......”
아.
너무 급하게 당겨서 그와 얼굴이 너무 가까워졌다. 완전히 날 위에서 덮쳐 누르는 자세의 그와 눈이 마주쳐서 당황해 버렸다. 그러니까 아까 그 다리가, 당신 머리를 칠 것 같아서. 입을 열면 열수록 하얗게 나오는 입김이 그의 입술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덩달아 그게 이상한 기분이라 점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 입김이 그의 입술을 스친다.라.. 괜히 얼굴이 더워지기 시작하는 것 같아서 그의 손을 붙잡고 있던 손을 빼내어 그의 어깨를 붙잡고 몸을 일으키자 그도 몸을 가누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만 갈까.”
뜻밖에 대답은 그에게서 먼저 나왔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더이상 그 곤돌라에서 얼굴을 붉히지 않은 체 있을 자신이 없어서.
*
“그래도 나름 재미있었잖소.”
“그래.”
그는 드물게 웃어 보였다. 배에서 좀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이 그에겐 좋은 효과를 미친것인지 평소 같았으면 딱딱하다 보일법한 인상이 어딘가 부드럽게 풀려 보였다. 에이, 기분이다. 이번엔 내가 한턱내야겠다며 시내권으로 그와 이동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그의 잘생긴 얼굴 덕분에 부담스러운 시선이 사람이 많은 시내권으로 이동하자 더더욱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이름과 얼굴은 잘 알려진 듯, 벨져 홀든 이다. 벨져 홀든 이야, 하는 이야기가 사방에서 수군거리며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자들의 소리 없는 비명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새삼 그의 인기에 혀를 내둘렀다. 인기 많군.
“배고프지 않소? 아침도 거르고 왔는데.”
“밖에서 지금 사 먹자는 건가.”
“그렇소. 내가 내지.”
그런가. 그럼, 자연스럽게 레스토랑에 들어가려는 그의 손을 붙잡자 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아. 그냥 이름을 부를 걸 그랬나. 그래도 붙잡은 손을 따라 그가 시선을 옮기며 날 쳐다 보는 것에 웃어 보이며 말해주었다.
“이왕 온 거, 오늘은 내가 추천하는 것으로 먹는 건 어떻소.”
“... 그러지.”
승낙 받았다. 그에게 오늘은 제대로 일반인들의 문화를 알려주겠다 다짐하며 지금 차림과는 말도 안 되는 식사인 핫도그 가게로 그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손을 붙잡힌 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따라왔다가 커다란 핫도그에 눈이 두 개 달렸고 손과 다리가 달린 핫도그 마스코트가 커다랗게 박힌 간판의 길거리 음식점에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 핫도그 매운맛 하나랑-. 벨져, 당신은?”
“이걸 꼭.”
“먹어야 하지.”
“그래도 이건.”
“맛있겠지.”
그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간판을 대충 훑어보더니 그냥 같은 걸 달라며 한숨을 푹 쉰다. 핫도그 가게 주인은 호탕한 목소리로 웃으며 핫도그 매운맛 두 개요! 하고 바로 따끈하게 소시지를 불판 위에서 구워준다. 거의 여자 팔뚝 길이만 한 길이의 핫도그. 엄청나게 길긴 길구나. 잘 구워진 소시지를 구멍이 뚫린 기다란 빵 사이에 소스를 뿌린 채 끼워 넣고는 종이봉투로 둘러싸 두 개를 건네주었다.
“많이 파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주인장에게 웃어 보이며 가게 가판대를 빠져나와 그에게 핫도그를 건네자 핫도그 빵 주름보다 더 미간을 구겨버린다. 웃어 보이며 크게 한입 베어 물자 입안에 촉촉한 육즙과 소스가 어우러져 매콤하면서도 맛있는 맛이 입안을 점령한다. 행복한 표정으로 한입 더 베어 물자 그가 이내 어색하게 입을 벌려 핫도그를 한입 먹어본다.
“어허소? 마시찌?”
“......”
그의 눈길은 뭐 먹을 땐 말하는 것 아니다는 눈빛으로 가만히 우물거리며 날 째려보고 있었다. 한참을 우물거리다가 그의 목울대가 울리며 핫도그가 넘겨지는 것을 보고 그에게 기대에 찬 눈으로 감상평을 들려달라는 눈빛을 보내자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군.”
“그렇지? 내가 당신에게 이상한 걸 먹일까.”
웃으면서 그에게 근처 가게에서 커피 한잔을 사서 내밀자 순순히 그것도 잘 받아서 홀짝홀짝 마신다. 뜻밖에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다. 한입 먹고 버릴까 걱정이었는데. 벤치에 앉아서 정장 입은 두 남자가 핫도그나 먹고 있으니 사람들이 쳐다보기 일쑤다.
얼마 남지 않은 핫도그를 한입에 입에 털어 넣고 커피를 마시며 그를 쳐다보았다. 핫도그 한번, 커피 한 모금. 번갈아가며 꾸준히 먹으며 광장을 쳐다보는 그는 내가 쳐다보는지도 모르는지 자꾸 먹기만 한다.
잘생기긴 잘생겼구나. 보통 남자가 머리카락을 기르면 약간은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기 마련인데, 뜻밖에 이 남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짧은 머리카락도 괜찮을 것 같다. 지난번 인 현실 끊기 작전에서 본 그의 형이라는 블레이드는 엄청나게난 짧은 머리던데.
“릭?”
“아.”
미안. 멍하니 그가 이쪽을 바라보는 눈에도 눈이 참 새벽 아침같이 푸른 색이구나, 하고 한참을 바라보는데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상념에서 깨버렸다. 웃어 보이며 다 먹었소? 하고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 쓰레기통에 빈 컵과 종이봉투를 버리고는 그만 가지, 라고 하며 말을 한다.
“그래. 별달리 할 일도 없고.”
“어차피 집 가서도 누워 있기만 할 거잖나.”
비웃음 가득한 그의 목소리에 웃으며 나도 나름 바쁜 몸이오. 자야지, 먹어야지. 얼마나 바쁜데. 하고 대답해주자 그가 나지막이 웃는다. 또 웃는다.
아. 심장 한쪽이 조금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맙소사. 그를 좋아하나 내가? 고작 웃는 거 몇 번으로?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한숨을 푹 쉬고 그의 등 뒤로 다시 돌아가 또 눈 위에 난 그의 발자국을 다시 밟아가며 걸음을 옮겼다.
아, 큰일이다. 다시 왔던 거리를 돌아가다 보니 아까의 그 강변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자꾸 곤돌라에서 있던 일이 생각난다. 가깝다. 가깝다. 가까웠지, 입술. 아냐, 정신 차려 릭 톰슨. 33살에 결혼도 못해서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게 틀림없다. 느릿해진 발걸음을 다시 재촉하며 그의 발걸음을 따라 걸어가자 발자국 끝에 보여야 할 발뒤꿈치가 어느새 앞 축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폭 하고 머리가 무언가에 닿자 그 상태로 몸을 굳혀 버렸다.
“...릭?”
“아.”
당황스러움에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어깨에 닿았던 머리가 올라오자 마자 같은 키의 눈높이의 그의 얼굴이 그대로 보인다. 가깝다.
“아픈가?”
가깝다.
“리-.”
그대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춰 버렸다. 그 순간 나는 다시 기억해 버렸다. 베네치아에서의 그 두근거림. 강과 음악과, 아름다운 그곳 베네치아를 사랑했던 그 순간처럼.
다시 한번 두근거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내 얼굴로 날아오는 둔탁한 그의 주먹도.
*
아니, 얼굴이 이게... 집사는 말끝을 흐렸다. 아닌 게 아니라 검사의 주먹은 정말이지 아팠다. 어느새 볼 한쪽이 퉁퉁 부어오르는 것에 나도 모르게 손으로 부어오른 볼을 만지자 따끔한 감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는 그런 나를 두고 그대로 방으로 올라가 버렸고, 집사가 서둘러 차가운 얼음을 감싼 얼음팩을 볼에 대 주며 예의 내 방으로 거의 신줏단지 모시다시피 안내해 주었다.
“넘어지셨습니까?”
“하하. 비슷한 것이오.”
웃어 보이며 얼음팩을 볼에 댄 체 웃어 보이자 집사는 아픈데 말을 하면 더 부어오를 거라며 푹 쉬라는 말과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불쾌했을까. 같은 남자가 입을 맞추었다는 게. 여전히 그의 입술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입술을 매만졌다. 최악이다. 이런 식으로 좋아한다는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이런 기분이구나. 뭔가 좋아한다는 것, 두근거린다는 것.
그러나 거기까지다. 아득히 멀어지는 시야에서 난 보고 말았다. 그의 차가운 표정.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듯한 표정. 그제야 생각해 버렸다. 성급했구나. 그대로 자리에 앞어지고 말았다. 어느새 볼을 차갑게 식혀주던 얼음 주머니는 바닥에 뒹굴고, 잘 다려졌던 양복은 침대 위에서 엉망으로 구겨져 버리고 있었다.
“아프네.”
한 대 맞은 얼굴은 금세 다시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맞은 얼굴보다. 차가웠던 그의 표정에 심장 한쪽이 가시에 찔리는 것처럼 아파지기 시작했다.
내 사랑은 시작되기 전에 끝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베네치아의 뱃사공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똑똑
“실례하겠습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억지로 떠 지지 않는 눈을 들어 올렸다. 문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 그가 아니네. 그 생각이 먼저 나버렸다. 집사는 이내 다시 한 번 노크를 했다. 똑똑. 그와 닮은 노크소리. 더이상 꿈지럭 거리는 것은 실례다 생각하며 화끈거리는 볼 위에 집사가 주었던 얼음 팩을 다시 대고 문을 열자 집사가 정중하게 웃어 보이며 식사준비가 되었다 알려준다.
“그는...”
“먼저 내려가 계십니다.”
평소 같으면 같이 내려갔을 텐데. 미움받고 있나.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코트와 정장 마의를 벗어둔 체 셔츠 차림으로 집사와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커다란 테이블의 양 끝과 끝. 그렇게 마주 보며 하는 식사는 생각 외로 편했다. 그는 먼저 식사 중이었고, 그리고 그와 나의 사이의 거리는 의자 10개 정도가 들어갈 정도로 멀고, 또 멀었으니까.
마치 이제 막 시작된 우리의 사이처럼.
아. 아프다. 고기를 씹는데 어금니 한쪽이 아파 볼을 감싸 쥐자 집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볼에 연고를 발라준다. 괜찮다 해도 재차 연고를 발라 주는 그의 덕분에 볼의 열기는 가라앉았으나 어금니 안쪽의 아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먼저 온 그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그를 스쳐 지나가 문을 열고 다시 내 방으로 가는 동안도, 어금니는 자꾸만 아파졌다.
“이런...”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거울을 통해 입 안쪽을 살펴보자 어금니 옆으로 조그맣게 솟아오른 하얀 무언가가 보인다. 어릴 적에 나지도 않을 것 같던 사랑니가 타이밍도 좋게 이런 때 올라오는구나. 양치 도구를 꺼내 이를 닦았다. 시큰해 오는 볼과 사랑니. 무언가 서러워 졌다. 매운 치약 맛이 입안을 완전히 정복하게 해버렸다. 사랑니를 통해 올라오는 서러움을 닦아내려고.
그리고 저녁 9시.
그가 올 시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루한 그 책을 들고 침대 머리맡에서 책을 읽었다. 이번엔 뜻밖에 글이 잘 들어왔다. 사진도 제법 괜찮았던 것 같다. 내용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이런 내용을 자랑스럽게 알려주고 싶었던 그는.
아침 9시가 되어도 오지 않았다.
*
점점 움직이기 쉬워지는 팔과, 더이상 나를 막아둘 이유도 없어진 지금. 나는 그래도 다시 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그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의 집에 있기를 다섯 달 째.하얀 입김 위로 눈이 녹아 사라졌지만, 이내 녹은 눈보다 더 많은 양의 눈이 입김을 뒤덮어버린다. 하얀 눈이 머리 위에서 수없이 떨어지는 것은 진풍경이었다.
온 집들은 다 무채색이 되어 가고 있었다. 거리의 나무에서는 눈으로 만든 얼음꽃이 피어나고 있었고, 사람들의 옷은 더욱 두꺼워 지었다. 나도 얼른 가야지. 종종걸음으로 저택 안에 들어서자 집사가 수건을 내밀어 눈이 잔뜩 묻은 옷과 머리카락을 말려준다.
“내가 하겠소.”
“아닙니다. 이런 건 제가 해야죠.”
사양 하려 해도 이내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그가 들어서는 것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당연한 듯, 메이드에게 옷과 머리카락을 맞기는 그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자연스럽게 그에게 인사를 건네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반응 뿐이었다. 쓰게 웃으며 이내 뽀송뽀송해진 옷과 머리카락에 집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의 옆방인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그의 방에 가본 적이 없다 생각하자 그의 방에 대한 호기심이 늘어간다. 어떻게 생겼을까? 그 다운 푸른색과 하얀색 가구들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상상의 나래를 풀면서 그의 방문을 바라보고 웃어 보이자 이내 옆으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비켜라.”
“아. 미안하오.”
그대로 옆으로 비켜선 나를 뒤로 한 체 방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의 문을 붙잡자 그가 이쪽을 쳐다본다.
“벨져, 시간 있으면-.”
“없다.”
“......”
“그리고 함부로 내 이름 부르지 말도록.”
“......”
“타키온.”
그 이름에 나는 문을 잡았던 손을 바로 놓아주고 말았다. 그래, 타키온. 내 이름이지. 그것도. 그에게 웃어 보이며 실례했소. 하고 대답해 준 뒤 그를 피해 도망치듯 내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타키온.
닫혀버린 문 손잡이를 붙잡은 체 문에 기대어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타키온. 타키온이라. 예전에는 그 이름으로 불려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바닥으로 가라앉아버린 탓에 고개를 떨군 바닥으로 무언가 투명한 것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이런. 어느새 눈이 방 안까지 들어온 걸까. 굳게 닫힌 창문을 보고 웃어버렸다. 눈이 녹아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나 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며 그대로 얼굴을 손으로 덮어버렸다. 더이상 눈이 녹지 않게.
그리고 이내 또 한 번 그를 마주해야 할 저녁이 오고야 말았다. 그를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까. 차라리 식사자리에 나가지 않았으면 하는데, 이번에 손님이 오셔서 이왕이면 같이 드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하는 집사의 권유에 애매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침착하자. 심호흡.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밝게 웃는 그의 얼굴을 먼저 보았고, 그 미소를 그대로 받고 있는 옆의 귀여운 아가씨를 그다음으로 보았다. 이대로 문을 닫고 나가버릴까. 하는 순간, 집사가 릭님, 이쪽으로. 하고 자리를 안내하는 것에 결국은 나가지도 못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어머, 누구시죠?”
“집에서 머물고 있는 사람이다. 사정이 있어서.”
그의 소개에 웃어 보이며 다소곳이 인사하는 아가씨에게 정중하게 인사해 보였다. 잠시 머물게 된. 릭 톰슨이라 하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며 늘 앉는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쪽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웃으며 그저 그 둘을 번갈아 가며 봐 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 둘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정이 있어 머무는 사람이라.
바로 나온 따끈한 수프에 수저를 올리지 않고 그저 김이 나는 수프를 바라보았다. 우리의 거리는 우리 사이의 의자 10개가 들어갈 만큼의 멀어짐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10개의 의자에는 내가 앉을 곳은 없었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수프를 떠서 입안으로 넣었다. 삐뚤게 자란 사랑니는 아직 씹지도 않았는데도 시큰거려 오는 것 같았다.
*
그날 새벽, 나는 짐을 챙겼다. 가벼워진 팔. 시간이 날 때 몰래 혼자 게이트를 열어 집에서 가져온 내가 늘 입던 옷들을 입고, 그의 집에서 입었던 옷들을 잘 개어 이불 위에 올려 두었다.
여기에서 내 짐은 하나도 없었다. 이곳은 정말 그저 사정이 있어 머무는 사람의 공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저 문을 열고 그가 들어 올 때. 여기는 내 방이 될 수 있었다.
창문 밖에서는 눈이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어떤 영화에서 여자주인공이 독백으로 한 말은 정말 옳았다.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서 게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난생처음 그렇게 그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을 벗은 체 맨발로 조심스럽게 그의 방을 둘러보았다. 유난히 창문이 많은 방.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방에서 침대 위에 이불이 불룩 튀어나와 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자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그가 보인다.
완전 범죄행위인데 이거.
헛웃음을 조용히 지으며 잠자는 그의 침대 위로 빠져나온 그의 손을 이불 속으로 넣어주었다. 당신 손은 따듯한 게 좋아. 손이 차가우면 마음이 차갑다던데 당신 손은 좀 뜨거워야 맞을 것 같아. 이게 질투라면 질투고, 화가 났다면 화가 난 거고. 미안하다면 미안하다는 표현이겠지만.
가만히 잠든 그의 입술 위로 입을 맞추려다 이내 이마 위로 입술을 살짝 눌렀다.
“안녕.”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그에게 인사를 건내 본다.
편도가 너무 아파졌다. 그에게 입을 맞추는 순간, 인사를 나누는 순간 무언가 목을 꽉 막은 것 마냥 목이 아려왔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자꾸만 나를 달래며.
언제까지나 눈을 감고, 귀를 막고, 한없이 안일한 채로 너와 웃으며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같이 가 없었고, 나 혼자만 있을 것 같아서. 여배우가 말한 것처럼 사랑이 아닌 아픔으로 그 빈자리 채울 것 같아서.
안녕.
헤어짐과 시작을 같이 하는 말.
그래, 안녕. 안녕 벨져 홀든.
그렇게 나는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 뒤 게이트 너머로 다시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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