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學審問(박학심문)
카테고리
작성일
2015. 8. 24. 22:09
작성자
you. and. me.



-1편의 오타 및 릭의 대사를 일부 수정 하였습니다. (수정 날짜 2015- 08- 24)

-앵스트 물.

- 중, 장편소설 (5편)

-음악과 함께 하는 소설..일지도.





그와의 첫 만남은 상당히 짧다면 짧을 수 있었으나, 인연은 길었다.


그는 나의 예상대로, 정중하고, 다정했다. 그 예외의 상황이 나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에 한없이 감사함을 느꼈다. 그와의 만남 이후, 나는 종종 그의 기사단에 자주 방문해서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비슷한 취미 생활을 나누기도 했다. 생각 외로 그의 취미는 검술훈련보다는 문화생활을 위주로 취미활동을 하는 듯했다.


“한 가닥 머리카락조차도 그 그림자를 던진다. 라...”


“괴테.”


어느새 그가 다가와 보고 있던 책에 시선을 주었다. 괴테? 문득 책 표지를 다시금 들여다보니 휘갈겨진 글씨로 괴테라 적혀있는 것이 보였다. 나도 제법 문학에는 지지 않는다. 하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글쓴이를 말하는 것에 새삼 놀란다.


“그대 서재에 책이 많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하게 채워진 서재는 마치 어느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는 것 같았다. 커다랗게 좌우로 움직일 수 있는 사다리에 그가 가끔 올라가 책을 꺼내는 모습은 창문에서 방금 막 내리쬐는 햇볕처럼, 눈부셨다.


그와 서재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늘어나고, 그와 닮은 정원에서 같이 산책을 하고. 가끔 그가 부탁하는 잔심부름을 도와주는 대가로 기사단 한쪽에는 어느새 내가 지낼 방 하나가 마련 되었을 만큼, 그와 나는 친해졌다. 친해졌다라?


그렇게 말하기에는 그와 나는,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고. 결코, 친구 사이 정도로 형용할 수 없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 만일지 몰라도. 그게 좋았다. 그의 옆에는 내가 자리 잡았다는 그 순간의 기쁨이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게 기다려졌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행복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그와 함께 정원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붉은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붉은 루비를 심어 놓은 것 마냥, 아침 이슬을 담아 가득 빛나고 있었다.


“상사화다.”


“그렇군. 제법 많이 심었는걸.”


“미관상에 좋거든.”


그렇게 말하는 그는 아무 말 없이 꽃잎 하나를 부드럽게 잡아 매만졌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그의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벨!”


멀리서 누군가 그의 이름. 아니, 애칭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그를 향해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헬레나.”


그리고 순간 내 세상은 무너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그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너를 볼 때.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내 손길을 피하듯 유연하게 셔츠 자락이 여운을 남기듯 빠져나가 너를 잡지 못했다.


“잘 있었나요?”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 어느 화원에 있는 꽃들보다도 아름다웠다고 장담할 수 있다. 요즘 아가씨들에게는 좀처럼 보기 힘든 순백의 드레스는 바닥의 흙먼지 한번을 못 본 듯 깨끗하였고, 나긋한 목소리와 찰랑거리는 금발 머리카락은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가장 아름다운 그와 잘 어울려서.


세상이 갑자기 둘로 나뉜 것 같았다.


마치 봄 햇살을 머금은 듯한 당신과 그녀의 세상. 그리고 적막하고 쓸쓸하며. 내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한 상사화를 곁에 둔 나.


그자의 말을 들어야 했다.


난 사랑에 빠지면 안 됐다.


난 어느 순간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것의 아픔은 지금처럼 너무나 깊게 내 마음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검이 심장을 관통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눈앞이 아찔해졌다. 굳은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보자, 헬레나라는 여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아름다운 바이올렛 빛깔의 눈으로 그에게 나에 관해 물어보는 듯했다. 그제야 실례를 범했다는 걸 알아차린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릭 톰슨이다. 잠시 내 일을 도와주며 이 저택에 머물며 기사단 일을 도와주고 있지.”


드물게 늘어난 그의 말수에 더욱더 굳어져 가는 얼굴을 애써 풀며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그가 내민 손을 쥔 체,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릭 톰슨이라 합니다, 아가씨. 그의 말대로 잠시 그의 일을 도와주게 되어 저택에 신세를 지고 있소.”


존칭과 본래의 말투가 부자연스럽게 섞였으나, 그것을 판가름할 여유는 없었다. 지독하게 마음이 아파져 와, 그녀에게 인사를 겨우 할 수 있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이니 그녀가 말간 눈으로 어린아이처럼 웃어 보이는 것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을 눈치챈 그가 가볍게 손을 힘주어 잡아오자, 상념에 깨어 겨우 숙녀에게 실례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반가워요, 톰슨. 헬레나라고 합니다. 본 이름은 기니, 가볍게 헬레나라고만 불러주세요.”


치맛자락을 잡으며 우아하게 인사하는 그녀는 이내, 그럼 밀린 산책을 하고 오세요. 잠시 메이드들과 짐을 옮기고 올게요. 하는 말과 함께 그녀와 어울리는 하얀 레이스의 양산을 펼쳐 다시금 길을 걸었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당신을, 내가 뒤에서 바라보는 것.


알고 있소, 당신?


내가 뒤에서 당신을 보고 있어.


이렇게나, 가슴 아프게 보고 있어.


우리 사이는 어떻게 이 꽃과 닮았을까. 잎과 꽃잎이 번갈아 가며 피고 지지만, 한 번도 만날 수 없는. 우리는 상사화와 너무나 닮았소.


“릭, 그녀가 왔다.”


“... 그래. 아름답더군.”


그녀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듯,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네 손을 타고 네 심장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벨져는 덤덤한 척하려 노력했으나, 상기된 얼굴을 다 숨기지는 못했다. 그는 나에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지도 않았으나 조금씩 사물 하나하나를 그녀와 연관 지어가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라 생각했던 그 공간들은, 그와 그녀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나와 앉았던 의자가 아닌 그녀와 앉았던 의자. 나와 나눈 이야기는 그녀와 나눈 이야기.


그래, 그는 결국. 나와 했던 그 모든 것이, 그녀와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그 정도의 역할이 된 것일 뿐이었다. 이것이 과장된 표현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확실한 것은, 지금 내 마음은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이었고, 그가 하는 말 앞에 자꾸만 붙어오는 수식어인 ‘그녀’가 조금은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내가 그녀였으면.



순간적으로 머리를 지배한 생각에 이마를 감쌌다. 생각보다 최저로구나. 가장 사랑하는 연인인데, 그가 좋아하는 그녀가 왔고, 둘이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야 하는 것 아닌가.


난 어른이야.


난 어른이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자꾸만 심장 언저리를 매만졌다. 손에 잔뜩 달린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네가 나를 쳐다보자 난 순간적으로 사람 좋은 가면을 쓰고 말았다.


“갈까. 아니면 좀 더 걷겠나?”


“당신 먼저 들어가겠소? 그녀도 왔으니 좀 더 그녀에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좋겠지. 난 더 정원을 둘러보다 가겠소.”


웃으며 그와 맞잡은 손을 놓아주자 그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를 밀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인 지라, 그도 제법 당황스러웠는지.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는 그저 알았다는 말과 함께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가 동요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도 조금은 눈치 챘으리라. 내가 그녀를 불편해 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리고 네 뒷모습을 보며. 자꾸만 속마음을 되새겼다.


우린 정말 안 되는 건가 봐. 당신을 사랑하지 말 것을 그랬소. 그럼 조금은 덜 아팠을 거야.


나를 따라, 상사화에 맺힌 이슬이, 꽃잎을 따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나와 같이 울어 주는 듯.

자꾸만 따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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