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學審問(박학심문)
작성일
2021. 5. 8. 23:25
작성자
you. and. me.

* ost는 Final Fantasy14 - Tomorrow and Tomorrow 입니다. 에멧이 바라는것이 아닐까 해서 이번에 넣어봤어요.

 

* 에멧 히카 -4편입니다.

 

*모험가가 7제해를 겪기 전에 있었던 일중 하나라는 느낌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모든 내용은 픽션입니다. 




 

 

 

나는 많은 걸 가졌지만, 너 하나를 가지진 못했고.

너는 너 홀로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가졌다.

우리의 차이는 너무 선명하고 명확해서

낮을 깨우는 태양과, 밤을 재우는 달과도 같았다.

절대, 섞이고 싶어도 섞이지 못하는 그런 것.

그러나 나는 오늘도 감히 태양과 달이 함께하는 꿈을 꾼다.

 




1.

“폐하, 일어나셨으면 세숫물을 먼저 올리겠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에메트셀크, 아니. 솔 조스 갈부스의 표정과 눈빛은 이미 허락하는 상태였다. 노인의 수염에 물기가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수건으로 턱 아래를 받친 시종과, 그 사이에 미온수에 손을 먼저 따듯하게 적셔 조심스럽게 숙인 황제의 얼굴에 물을 묻히는 시종. 얼굴을 닦을 수건을 들고 있는 시종. 세수 후 가벼운 화장을 담당할 시종. 줄줄이 서 있는 시종들의 얼굴에서는 긴장감이 늘 맴돌곤 했다. 특히나 근래, 황제의 옆에 늘 붙어있다시피 했던 시종이 몸져누워버린 이후로 황제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냉랭함이 한층 더 강해진 것은 시녀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으로 주욱 퍼져있던 터라, 다들 조심스럽게 행동 하나하나에 더 신경을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폐하, 다리를.”

침대에 걸터앉은 황제의 발에 시종들이 조심스럽게 신발을 신기고, 옷을 입혔다. 늙은 몸이지만, 괜히 제국을 다스린 게 아니라는 듯 잔 근육이 자잘하게 남아있던 몸이 부드러운 옷들에 감추어지자 겉보기 등급으로는 훌륭한 황제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속은 무엇인지 몰라도. 황제는 당연하다는 듯 옷을 입자마자 시종이 누워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엔 황제의 방에 그를 데려다 놓았으나, 황제가 시종에게 대하는 일거수일투족의 시종들 행동을 모두 감시하는 터라 일정에도 지장이 생길 듯하여, 참모인 남성 한 명이 간곡하게 부탁하는 덕분에 겨우 잠자리를 옮기게 된 터였다. 

“오늘은?”

“오늘도 역시 별 반응은 없으십니다.”

‘혼이 강해지고 있다.’

황제는 말없이 시종의 뺨을 부드럽게 두어 번 쓸어 보일 뿐이었다. 다들 황제의 그와 같은 행동에 조용히 숨만 삼킬 뿐이었다. 고개라도 들었다간 자신들이 본 것들을 믿지 못할까 봐. 스스로 보지 말아야 한다고 되뇌는 시종들은 더 허리를 깊게 조아릴 뿐이었다. 마치 단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조용히 잠들어 있는 자는, 평온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헌데, 머리카락이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 그렇군.”

황제가 부드럽게 손아귀에 머리카락 한 줌을 쥐어 보이자 늘 정돈된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예전보다 한층 길어져 사르륵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손에서 흘러내린다. 이내 머리카락을 잠시 바라보았던 황제가 나가보라는 듯 손짓을 해 보이자 다들 고개를 한 번 더 숙여 보이고는 종종걸음으로 문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시종장의 문을 닫는 탁 소리와 함께, 조용하게 한 박자로 움직이는 구둣발 소리가 저만큼 멀어지는 것을 듣고는 솔 조스 갈부스, 아니. 에메트셀크는 자신의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변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신기해할 법한 사람은 잠이 들어 버렸으니. 다시 한 번 가볍게 손을 튕긴 에메트셀크의 손에는 자신의 것이 아닌, 서랍 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던 ‘그 사람’의 가면이 들려 있었다.

“....---.”

마치 누가 보면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들리는 그 행동에도 누운 사람은 절대 눈을 뜨지 않았다. 에메트셀크는 나지막하게 웃고는 이내 가면을 씌워주며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잠자는 이에게 씌워진 가면은 마치 원래부터 그 사람의 것인 듯 자연스럽게 씌워졌고, 에메트셀크는 조용히 가면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쳤다. 

“일어나야지. 그래야-.”

그래야, 뭐든 해줄 게 아니야. 에메트셀크는 입술을 마주 대고 웅얼거리는 투로 느릿하게 말했다. 그리고 입맞춤을 위해 감았던 눈을 천천히 올려 뜨자, 가면의 눈구멍 너머로, 느릿하게 떠올려지는 눈두덩이와, 눈썹의 떨림에 그대로 입술을 조금 때어내고 숨도 쉬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파르르.

기다란 속눈썹이 조금 떨리는가 싶더니, 영혼이 담긴 눈동자가 천천히 빛을 반사하며 가면에 보석이라도 박은 것처럼 생기를 더한다. 온연하게 떠진 양 눈동자가 자신을 온전하게 눈에 담고 있는 것에 에메트셀크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첫 말문이 트이는 그 순간,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기 위해 들이마시는 숨소리에 에메트셀크는 온몸을 굳혔다.

‘그’다.

‘그사람’이다.

본능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에메트셀크는 그 다음 말을, 늘 듣던 말을 기억해 내고는 떨리는 눈빛을 자신의 밑에 깔려 누워있는 자에게 보냈다.

하데스.

하데스라고 불러. 어서.

“..-...”

이내 천천히 입술이 달싹이는 것이 가면 너머로 느껴지는 것이 들리며, 들이마셔진 숨이 내뱉어지는 순간.

“에멧?”

황제는 다시 한 번 홀로 고독함에 앉게 되어버렸다.


2.

황제가 아끼는 시종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온 시종들이 분주해졌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어 빠져 있을 근육을 위해 늘 옆에 사람 한 명을 대동했고, 식사 메뉴는 물론 휴식과 취미활동까지 다 면밀하게 시종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시종은 한사코 이것들을 거절했다. 그럼 식사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고 하니, 그제야 그것만큼은 양보하겠다고 전달되어 황제의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았다는 이야기는 비밀리에 전해졌다. 

“그런데, 예전이랑 조금은 다르시네요.”

“제가요?”

“네-. 예전엔.. 뭐랄까, 금방이라도 나가고 싶어 하시는 분위기였는데.”

이젠 제법 말이 트인 시종과는 말도 섞기 시작했고, 예전과는 다르게 더 차분한 느낌과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려 하는 느낌이 강해진 시종은 그 말에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한없이 길어진 머리카락이 발에 닿기 전에 정리해야겠다며 황제의 허락을 구하려 하는 시종에게, 말없이 고개를 저어 보이며 스스로 가위를 가져다 대고는 대담하게 머리카락을 썩둑- 잘라버려 허리에 닿을법한 길이로 만든 시종은 웃으며 ‘이 정도면 되겠네요. 다듬어 주시겠어요?’라는 말을 내뱉고는 등을 맡겼다. 그 대담함에 시종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당황한 얼굴로 가위를 건네받고는 조용히 머리카락을 다듬어 줄 뿐이었다.

“하데-.. 아, 황제는 언제쯤 오시나요?”

“오늘도 늦게나 오신다고, 먼저 주무시라고 하셨습니다.”

“....... 언제까지 피하려는 건지.”

나지막하게 혼잣말처럼 내뱉어지는 말에, 머리를 정돈하던 시종이 ‘폐하께 가서 뵙고 싶다고 여쭐까요?’ 라고 하자 황제의 시종은 조금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애매한 선상에서 시종들은 자기들끼리 자신이 모실 사람의 기분을 좀처럼 헤아릴 수 없어 눈만 데록데록 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에 튀어나오는 자신들 주인의 말에 시종들은 말없이 웃어버렸다.

“...오늘은 식사를 거를 것 같다고 말씀해 주시죠. 식사는 2인분으로 준비해 주시고요.”



“식사를 걸러?”

“예,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의 기분이 확 나빠진 것이 느껴져 시종은 웃어서 출발했던 얼굴을 급격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팔걸이에서 손가락을 툭, 툭 건드리다 이내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황제의 뒤를 시종은 조용히 웃으며 쫓아갔다. 제국에서 제법 때아닌 봄바람이 부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제법 느린 황제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가자 시종들이 방문 앞에 일렬로 서 나란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갯짓을 한번 해 보이는 황제의 행동에 문 앞에 서 있던 시종들이 문을 열자, 2인분의 식사가 준비된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이 이내 조금 웃어 보이며 왔느냐고 말을 건넸다. 

“....... 식사를 안 하겠다 하지 않았나?”

“황제님을 보니 식사를 하고 싶어져서요. 음식 식은 것은 다시 데워서 놔 주시겠어요?”

자연스럽게 시종에게 부탁하는 자신의 사람이 어이가 없는지 황제가 한숨을 쉬고는 ‘그래, 식사하면 됐다. 그럼 다시 가보지.’ 라고 말하며 돌아 나가려는 것에 황제의 시종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식사는 2인분이고, 저 혼자는 다 못 먹고. 황제 폐하가 가시면 식사는 별로 내키지 않으니 다시 물리겠습니다.”

“....... 지금 내 앞에서 시위라도 하는 건가?”

“그냥, 같이 식사하고 싶어서요. 식사도 안 드시고 일하실 거 아닙니까.”

덤덤히 오가는 이야기에 달콤함은 전혀 없었으나, 황제의 표정이 미묘하게 풀려가는 것에 시종들은 조용히 입에 호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시 식었던 음식이 따듯하게 나오자, 황제의 시종은 먼저 자기가 접시를 건네받더니, 음식에서 다른 빈 접시로 향신료 부분을 덜어내거나, 채소 몇 가지를 골라내고는 황제에게 내밀었다. 

“폐하는, 향이 강한 건 즐기지 않으시니 이건 빼주시는 게 좋겠네요.”

“아, 네. 주방장에게 말해두겠습니다.”

“다 나가.”

“네?”

갑자기 화기애애 좋은 분위기가 형성될 때 황제는 갑자기 아무런 표정 없이 모두에게 나가라며 입을 열었다. 시종들은 오늘따라 영문도 모를 일이 자꾸 겹쳐 생기는 것에 궁금증을 참지 못했지만, 그저 황제의 명에 따라 조용히 음식을 내려놓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황제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정신 차렸나 보지, 아젬?”

“.......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저는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아닌데-.”

“그래?”

황제는 자신에게 내밀어 진 접시를 도로 튕기듯 밀어내 보이며 말했다.

“너에게 식습관 같은 건 한 번도 알려 준 적이 없는데, 그런 주제에 잘도 취향대로 골라냈군.”

“.......”

그 말에 조용히 다물어졌던 입이 열리며 드디어, 황제는.

“하데스,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마.”

“내가 어떤 얼굴인데?”

“....... 고작, 이런 거 하나에. 그렇게 구원받았다는 얼굴. 하지 마.”

거추장스러운 왕관과 황좌를 버리고 자신의 위치로 돌아오는 것을 꿈꾸었다. 그저 허름하고 낡은, 아마포로 짜인 로브를 입고 말이다.


3.

“지금 원형은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러니 빨리 진행 해야 해. 널 다시 되돌려 놓을 거야.”

“무엇을?”

이미 에메트셀크는 그를 자신이 사랑했던 ‘아젬’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얌전히 식사 뒤에 침대에 ‘아젬’을 앉혀 놓고서는 자기가 그 허벅지를 베고 누워 버렸으니까. 마치 늘 하던 것처럼 익숙한 그 풍경들, 조용히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소리가 에메트셀크의 귀를 간지럽혔다. 에멧은 그 부드러운 손길에 몸을 늘어트리고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제국군을 움직여서 거대 달라가브 위성을 통해, 완전히 무(無)로 되돌려 놓을 거야. 그 죽음을 대가로 죽어버렸던 동포들을 살릴 거고.”

그 순간 부드럽게 움직이던 손이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손길을 즐기고 있던 에메트셀크는 그 멈춤에 눈을 느릿하게 떴다. 아니나 다를까, 쳐다본 ‘아젬’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못 듣는 게 낫다는 그 행동에 에멧은 몸을 일으켜 ‘아젬’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눈을 감고 외면하듯 고개를 옆으로 더 돌려버리는 행동에 에멧은 한숨을 쉬고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너-. 설마 이 기어 다니는 것들에게 연민이라도 가지는 건 아니겠지. 희생한 동포들의 수가 헤아려지지 않는데도 말이야.”

“하데스.”

단호하게 부르는 음성에 에멧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쥐었다. 하얀 장갑이 잔뜩 구겨져 우는 소리라도 내는 것 같았지만 에멧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게 주먹을 쥐었던 손을 펴 웃으며 ‘아젬’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한 손으로 붙잡은 ‘아젬’의 어깨 옷자락이 힘을 줄 때마다 구겨졌지만, 그것이 최대한 에멧이 참을 수 있는 한계의 끝이었다. 

“네 입에서 저놈들을 이해라도 하는 말이 한 단어, 아니. 한 글자라도 화가 치밀어 오를 것 같으니까 제발 조용히 있어.”

“정신 차려. 너 완전히-.”

“너야말로!!!”

에멧은 침대 위로 거칠게 ‘아젬’을 밀쳐내었다. 가벼운 신음과 함께 쓰러져 버리는 ‘아젬’의 위로 올라탄 에멧은 분노에 차오른 얼굴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괴로움과 절망을 꾹꾹 눌러 담은, 하나의 울음과도 같아 보였다.

“나라고 저놈들을 이해하지 않으려 했겠어? 내 꼴을 보라지. 한때는 아씨엔으로서 최고의 마법만을 다뤄왔는데, 이젠 마법조차 쓰지 못하는 이런 한심한 ‘인간’이라 불리는 것들 사이에서 군림했지. 그것만 해도 상당한 양보였어.”

분노에 차 오른 얼굴을 ‘모험가’는 쓰다듬었다. 그것은 구태여 자신이 가진 ‘아젬’의 영혼이 아니어도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그래, 괴로움과 절망 사이에서 혼자 남겨진 고독함이 느껴진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화를 내는 것 같아도 우는 것 같이 보이는 그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자 에멧은 말을 멈추고는 다시 입을 천천히 열었다. 아까보다는 더 진정된 어투였다.

“아젬. 인간은 아주 이기적이고, 오만하다. 그들은 자신의 울타리에 친 사람들만 아끼고 존중할 줄 알지. 아니, 혹은 그 모습마저 거짓일 수도 있다. 그들은 영원할 수 없는 물질적인 것에 집착했고, 가장 값진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는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

에멧은 고개를 한번 숙였다가 다시금 고개를 올려 ‘아젬’의 눈을 마주했다.

“그 추악함이 역겨워. 그리고 그 추악함은, 나를 구원해줄 너를 자꾸 떠오르게 해.”

“.........머리 색이 많이 변했네, 하데스.”

‘아젬’은 천천히 에멧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하얗던 머리카락이 갈색으로 물들어져 있었으나, 그 속에 아주 조그마하게 한 줌 정도의 흰 머리카락이 있는 것을 보고는 그 부분을 어루어 만지려다가, 갈색 머리카락을 더 쓰다듬었다. 이것은 그가 가진 ‘인간’적인 부분을 상징해 주니까.

“너의 말엔 약간의 모순이 있어.”

“무슨 모순.”

“오, 하데스. 아니지, 여기서는 솔 황제 폐하지. 결국, 너도. 우리 동포들만을 위해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려 하는 거잖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그래, 너도-.”

제법. ‘인간’다워 졌구나, 하데스. 

그렇게 말하는 아젬의 얼굴을, 하데스, 아니. 인간 솔 황제는 그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4.


한동안 제국의 성은 조용하지만 강한 폭풍에 휩싸인 듯했다. 황제의 기분이 안 좋은 것과, 그것이 황제 스스로 데려온 시종 때문인 것. 그리고 시종에게 친히 하사한듯한 ‘아젬’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부르려 했으나, 그 사람이 그저 ‘모험가’ 라고 말해 준 것들이 황제의 기분들을 갈수록 자극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험가라는 사람은 그저 소식들을 듣고 웃고 말았지만. 그날은 유일하게 제국에서 모든 재료가 다 자라나는 궁 구석의 식물원에서 복작복작 사람의 향기가 났다. 

“모험가님은 별걸 다 아시네요!”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거든요.”

기다란 머리카락이 이따금 식물원 안에서 불어오는 인공 바람에 흩날렸고, 깔끔하게 만든 검은 로브의 소매가 팔꿈치까지 내려와 살을 드러냈지만 개의치 않고 모험가는 포도송이를 조심스럽게 가위로 잘라내 때어냈다. 옆에서 바구니를 들고 있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포도송이를 받아 들고는 제법 한 바구니 가득 쌓인 포도를 보고 웃었다.

“와인을 담으면 정말 좋을 거 같아요. 황실에서 만든 거니 더 귀하겠죠. 안 그래도 제국은 음식이 귀하니.”

“제국이 음식이 귀하다니?”

모험가는 의문을 띄웠다. 자신의 식탁 위에는 항상 풍요로운 식사가 차려지지 않았나. 제국 밖의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터라 의문만 띄우며 이야기를 듣자 하니, 시녀들은 그저 당연하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제국은 기후가 척박해서 음식이 많이 부족하거든요. 게다가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순수하게 인간의 힘으로만 개척해 나갔죠. 그 선두 주자가 바로 솔 황제 폐하시고요.”

맞아, 늘 바다가 얼어서 뭘 하고 싶어도 물고기도 못 낚고, 농사도 물이 부족해 짓질 못하지. 시녀들은 서로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며 황제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웃으며 이야기를 했지만, 모험가는 전혀 웃지 못했다. 그것은 그저 군림하는 자와, 지배하는 자들의 편안함이었으니. 덜 익은 포도를 부드럽게 만지며 쳐다보던 모험가는 이내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인간의 영원한 편안함은 결국 누군가의 희생 때문에 나오는 것. 자신이 시종이었던 것처럼, 분명 제국의 아래에서 식민 생활을 하던 어떠한 지역민에 의해 진상된 음식이나 재료들이 이 성과 지역 곳곳에 도달해 사람들의 입을 배불리 했던 것이리라. ‘모험가 아젬’은 생각했다. 소수 민족이며,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천대받던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위해 무언가를 침략하고 다시 얻어가는 행위들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자신조차 내리지 못하는 명확한 답에, 쓰게 웃어버렸다. 자신이 하데스에게 내린 숙제는, 자신도 풀기 어려울 정도로 제법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니. 

“적포도주 창고를 조금 치워놔야겠어요. 그래야-.”

“아니에요. 술은 만들지 않을 거에요.”

넥타르를 만들 거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굽힌 다리를 피고는 모험가는 웃어 보였다. 술을 마셔서 괴로움을 달래기보다, 과일 음료를 마시고 깨끗한 생각으로 미래를 떠올리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나을 것 같았다. 추억을 떠올릴만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선 부지런함이 답이었다. 모험가는 씩씩하게 바구니를 되려 건내 받고 앞장섰다. 머무르지 않고 앞서 나가고,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시도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장기였음을 알기에.


5.


“안됩니다!! 내려오세요!”

“괜찮은데-. 가서 황제 폐하만 모셔와 주세요.”

황성의 가장 높은 지붕의 경사에서 웃으며 다리를 달랑달랑 흔드는 모험가를 보고 시종들이 기함을 토해냈다. 기껏 만든 음료 술동이를 품에 안고 어디까지 가나 했더니 혼자서 지붕을 거침없이 올라가고 있지 않은가! 평소에 성 내부의 일만 한 터라 저 위를 타고난 근력 없이 올라갈 방도를 찾지 못한 시종들은 황급히 이 소식을 황제에게 알리러 뛰어나갔다. 황제의 꾸지람보다, 그 사람의 안전이 소중하게 느껴진 사람들의 한마음 한뜻이었다. 수많은 구둣발 소리가 황제의 집무실 밖에서도 들릴 정도여서 종이를 넘겨 서류에 펜 깃으로 사인을 하던 에멧은 노인의 모습 그대로 문밖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기에 에멧은 조용히 입을 열고 다시금 서류에 시선을 돌리며 ‘들어와.’ 라고 말하고는 펜을 다시 들어 올렸다. 

“폐하, 모험가께서!”

“이번엔 또 무슨-.”

“지금 황성 지붕 위에 앉아계십니다!”

진짜, 사고뭉치다. 어찌 사람이 저리 변함이 없지. 에멧은 혀를 차고는 다시 펜 깃을 들어 올려 서류에마저 사인을 마친 뒤 느릿하게 대답했다. 

“알아서 데리러 갈 테니. 다들 물러가. 그사람 근처에는 갈 생각도 말고.”

“예, 폐하.”

조용히 물러나는 시종들을 보자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저것들을 굴려 삶았는진 몰라도 감히 성에서 저리 요절복통으로 걸음 소리를 내고 뛰어올 정도로 급해 보였으니. 예의랑 예법은 다 어디로 팔아먹었는지, 그저 모험가 하나만을 살려본다고 뛰어온 것들이 가소로워 웃었다. 그는 용암이 들끓는 지역도 혼자 가서 살아남아 오는 자가 아닌가. 에멧은 한숨을 쉬고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지난번의 대화가 끊긴 이후로 얼굴을 마주 보는 걸 피했는데, 늘 그는 그렇듯 먼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내민 손을 잡지 않으면 뒤에 이어질 후폭풍을 알고 있기에, 에멧은 빠르게 모습을 변해 검고 어두운 차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최대한 폭풍은, 작고 느리게 오는 게 좋으니 말이다.

“여어-.”

“여어는 무슨. 술이라도 마셨나?”

잔을 내밀어 보이는 행동에 에멧은 잔을 낚아채 코를 킁킁거렸다. 술향기보다 달콤한, 익숙한 향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살짝 잔 끝에 입술을 대 한 모금 삼켜보자 그리운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넥타르. 필요하지 않으면 술을 마시지 않는 아모로트의 풍습다운 음료였다. 인공적인 단맛이 아닌 산뜻한 과일 향과 맛이 입안에 감도는 것에 간만에 입꼬리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치는 것을 본 모험가는 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이리와, 하데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밀려는 건 아니겠지?”

달과 별이 휘영청 뜬 밤에 무슨 짓인지. 지붕에 아슬하게 걸터앉은 아젬의 옆으로 에멧이 털썩 주저앉고는 넥타르를 들이켰다. 밤바람이 마치, 그 종소리가 들려오던 봄날의 아모로트와도 같아 보여서. 간간히 불이 들어온 건축물들이 형형의 색을 빛내며 밤의 활기를 보여주는 것에 에멧은 그저, 세금을 조금 더 낮춰 볼까 하는 생각만 떠올렸을 뿐이었다. 

“네가 만든 도시는 아름답네.”

“하지만 아모로트에 비할 바가 못되지.”

“그렇지 않아.”

자연스럽게 에멧의 옆에 기대며 찬란하게 빛나는 땅을 보다가 아젬은 웃으며 고개를 주억 주억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않아. 오래간만에 닿아오는 온기에 에멧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동그란 정수리가 자신의 시야에 닿아왔고, 이내 들어 올린 고개를 통해 부드러운 눈동자가 휘어지는 것을 바라보고는 에멧은 쓰게 웃었다.

“저렇게 해 둬 봤자, 어차피 없어질 것들이지.”

“시종들에게 들었어. 원래 제국은 소수민족에 마법도 못 쓰고, 척박한 땅에서 시작했는데 에멧이 다 살려뒀다며. 우리에게는 찰나의 것이겠지만 그들에게는 영원의 것이겠지.”

저렇게 많이 빛나는 불들을 봐. 별 같지 않아?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아젬의 머리 위에 에멧은 한참을 자신이 이루어 왔던 업적들을 보고 머리를 기대었다. 부드럽게 닿아온 머리와 머리가 바람에 따라 얽히는 것 같았다. 

“생각엔 변함이 없어?”

“응. 나는 무조건, 일족을 살릴 거야. 그리고 너도.”

“우리는 지금 이 상태로도 살아갈 수 있어.”

이 상태라. 지금의 평온함이 영원을 달릴 수 있을까. 에멧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미 자신의 혈육이라 하는 것들은 황자 자리를 가지고 싸워 서로에게 칼을 들이밀었고, 자신들이 가진 것 이상의 욕심을 내는데. 자신이 이 모든 것을 그만둔다고 역사 또한 멈추게 될까. 에멧은 확신했다. 아니. 인간의 욕심은 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악랄했다. 

“그렇지 않아. 나는 영생을 살지만, 너는 한시적으로 이 몸에 정착하게 되겠지.”

에멧은 조용히 입을 열고 흐려지는 앞을 애써 참아보며 이야기했다.

“나는, 네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너에게도 죽음이 처음이겠지만. 나는?”

게다가 그 연약한 인간의 몸이 늙고 지쳐 없어지면, 다신 만나지 못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에멧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물방울 한줄기가 아젬의 머리 위로 적셔들 듯 떨어졌고, 그 느낌에 아젬은 머리를 들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린 에멧은 떨어진 물방울을 수습할 생각도 안 하고 입을 열었다. 

“힘들어.”

“........”

“하루가 다르게 동포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 나를 바라보고, 나만을 의지하던 그 동포들이. 나와 위원회의 결정에 그저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를 희생했던 동포들이.”

“하데스.”

“그중에 제일 슬펐던 것이 뭔지 알아?”

“.........”

“적어도 그들은 얼굴이라도 마주했지만, 난 너의 마지막을 보지도 못했어. 그것이 제일 슬펐지. 그래서 너에게 더 집착하는걸 지도 몰라.”

에멧은 이내 웃으며 아젬의 뺨을 쓰다듬었다. 

“지금도 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데.”

너 하나 만큼은 예전이고 지금이고. 변함없이 가지질 못하는구나. 에멧은 그렇게 말하며 웃고는 가볍게 아젬의 턱을 검지를 굽혀 받쳐 들고는 입술을 마주 대었다. 알코올 기가 없는, 달콤한 숨이 건네지는 것 같아 아젬은 눈을 감고 조용히 입맞춤에 수긍했다. 누가 들으면 비웃지 않겠는가.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일컬어진 그가 누구보다 겨우 한 사람의 죽음을 두려워했다는 것이. 

“그러니 네가 반대해도 나는 이 일을 마칠 거다. 태양이 있어야 별이 태양을 따라 도는 법이니까.”

떨어진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생각보다 많이 썼다. 아젬은 눈을 찡그리고 웃어버렸다. 태양이 있어야 한다니. 

“하데스, 난 죽어도 널 떠나지 않아. 넌 에테르를 볼 수 있잖아. 너의 근처에서 항상 맴돌고 있어.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난 그런 희미한 형태만 보고 살아가는 건 질렸어. 네 원래 얼굴이 아닌 이 얼굴에도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나는 온전한 너를 원해. 제국의 기술은 제법 훌륭하지. 인간들이라고 머리가 다 나쁜 건 아니니까.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 우선은 내 몸에 네 영혼을 넣는 실험을 할 거야. 클론으로 내 손주가 나를 마음껏 복제시켜준 덕분이지.”

“실패하면?”

“실패할 리 없어. 당연히 성공할 거니까.”

미쳤구나, 하데스. 완전히 자신을 소유물로 정착시킨 듯 생각하기 시작하는 에멧을 향해 아젬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멧은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런 아젬을 내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미쳤지.”

너라면, 미치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에멧은 아젬의 손을 이끌고 목 뒤를 강하게 내리쳤다. 순식간에 기절하는 아젬의 몸을 받아 들고 에멧은 소중한 것을 껴안듯, 품에 아젬을 끌어안고는 이마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넌 죽지 않아.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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