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學審問(박학심문)
작성일
2021. 3. 13. 02:58
작성자
you. and. me.

 

 

* ost는Guild Wars 2 on Harp - "Fear Not This Night" 입니다. 원래는 가사가 있습니다.

 

* 에멧 히카 -3편입니다.

 

*모험가가 7제해를 겪기 전에 있었던 일중 하나라는 느낌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모든 내용은 픽션입니다. 

 

 

 

 

 



 

“이거 봐, 하데스.”

그것은 나무로 만든 격자무늬의 판에 조악하게 깎아두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도 그럴게 우리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인데도 불구하고 직접 깎아 만든 것인지 균형과 조화가 맞지 않았다.- 엄지손가락 길이만 한 무언가들이 각 칸에 즐비하게 늘어선 무언가였다.

“또 어딜 가서 이상한걸 주워온 거야.”

“지난번에 여행 갔던 곳 알지? 거기서는 이것을 ‘왕들의 놀이’라고 말한대.”

이건 ‘폰’ 이고, 이건 ‘비숍’이야. 그렇게 말하며 막대기를 움직여 보이는 네 행동에 코웃음을 쳤다. 

“이름 한번 마음에 드네. 왕들의 ‘놀이’라니 말이야. 그러니까 발전이 없는 걸 모르고 말이지.”

적당히 그중에 가장 화려해 보이는 토막 두 개를 잡아 들어 손에 굴리면서 보다가 이내 작게 웃으며 그 막대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을 들어 보이며 나에게 보여주는 네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왜 이리 작아?”

“제일 약한 ‘말’ 이거든.”

그렇지만 가장 강력한 말이기도 하지. 어쩌면 네가 쥐고 있는 그 왕을 상징하는 것들보다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여왕을 상징하는 말을 빼내어간 네가, 대신 자신이 들고 있던 그 작은 말을 내 손에 들려주었다. 

나란히 있는 왕과, 그 옆을 지키는 가장 작은 말.

어쩌면 그것이, 다른 수많은 방법들이 있지만 ‘왕’ 이란 걸 고수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왕 ‘놀이’라도 하면 네가 언제든 보일까-. 

그렇게 생각했던 잡념들이 오늘도 나를 침식시킨다. 


 



1. 


“안다니까요.”

“아는데 거기에 가? 멍청한 것도 정도껏 하지.”

오늘따라 언사가 영 뒤틀린 에멧의 행동거지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결국 그를 돌아보았다. 내 뒤를 느릿한 걸음걸이로 따라왔던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리던 것을 딱 멈추고 나를 쳐다보고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쯧- 하고 가볍게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를 흘겨보고는 다시금 앞을 향해 걸어가며 옷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여전히 시종의 신분인지라 그렇게 고급스러운 옷은 아니지만 깨끗한 옷을 꺼내 입었고, 혹시 몰라 에멧이 준 총을 등 뒤 벨트에 제대로 꽂아 넣었다. 

“그럼 에멧이 황제한테 말해 주던가요. 풀어달라고.”

“........그건 안돼.”

“그럼 말리지 마요.”

이제는 진짜 어딘가 뜻 모를 욕처럼 들리는 말을 하며 복도에서 씩씩거리는 에멧을 그냥 두고 식사를 할 방문 앞에 섰다. 제국군의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 두 명이 방 문 앞을 지키고 있었으나, 황제의 전용으로 온 군인이 아닌지, 안면이 그리 익지 않았다. 아마도 황제의 손주인 바리스의 전용 군사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성에서 저렇게 철저하게 ‘식사’ 자리를 감시할 이유는 없으니까. 

“잠시 무기 소지 검사를 하겠습니다.”

입구 앞에 멈추어 서자마자 더 무언갈 말할 기회조차 없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서로 엑스자로 교차시켜 막은 경비병은 이내 소지품 검사를 하려 하는 것인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손이 잘리고 싶으시면야. 그렇게 하시던지.”

뒤에서 나지막하게 말한 에멧이 아까의 화난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아무런 감흥 없이 그리 말하자 움찔하며 몸을 더듬어 보려 하던 병사들이 멈추어섰다. 자신들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니 방 문이 열리고 그 안에 들어가 있던 시종장 한 명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비켜서라.”

그 말에 가볍게 흥-. 하고 코웃음을 날린 에멧이 먼저 앞장서서 들어가기 시작했고, 나는 잠자코 등 뒤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총 손잡이를 느끼며 애써 식은땀을 감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육중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 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와도 너무 흡사하게 느껴져 나는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2. 

“손님 한명이 더 온다는 이야기는 없어서 말이지요.”

“하.”

“.......”

능청스럽게 사람 네다섯은 더 앉을 수 있는 직사각형의 테이블 양 끝에만 놓여 있는 의자와,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은 바리스는 입꼬리를 올리고 나에게 앉으라는 듯 손바닥을 펴 자신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시종장이 이내 의자를 빼 주는 행동에 나는 에멧의 손을 당겨 앉히려 하자 에멧이 어이없다는 실소를 하고는 나를 되레 앉히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나와 바리스 사이의 옆면에 의자를 만들곤 그곳에 털썩 앉았다가 이내 또 무언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한참을 날 바라보고는 한숨을 푹 쉬고 이내 바리스를 쳐다보며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괜찮지. 어차피 동행할 것을 알았는데도 준비를 하지 않았다니. 그래서 어쩌면 네가 영원히 이인자 자리에서 올라오지 못하는 것 아니겠나. 네 어리석음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어.”

“눈치껏 꺼지라는 이야기였지만 말입니다. 이젠 눈치도 없는 겁니까? 가엽기도 하지.”

초대받은 건 난데. 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담.

두 사람 사이에서 강렬하게 튀는 스파크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아 마른 입을 물로 축이며 눈치를 보고 있자니, 두 사람 사이에서 튀는 스파크가 잠시 멈추었다. 이내 식사를 준비해라 하는 바리스의 말과 함께 가벼운 수프와 빵이 나오는 것에 수저를 들어 올리려 하니 에멧이 바리스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먹지 마. 식사에 독이라도 넣었으면 어쩌려고. 인간인 네 허약한 몸으론 어지간한 독도 못 버텨.”

“걱정하지 마시죠. 전 적어도 식사 자리에서 시체 치우는 일은 하고 싶어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누구와는 다르게요.”

그렇게 말해도 영 믿음이 가시지 않는 것인지 에멧은 결국 시종을 시켜 은 식기를 가져오게 한 뒤에야 내 식사에 더는 참견하지 않았다. 

“식사에 응할 줄 몰랐다만.”

“어차피 거래란 건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거니까요.”

스프를 몇 번 뜨지도 않은 그가 이내 손짓으로 접시를 내어가라 하고는 포도주잔을 들어 잔 안에 따라지는 포도주를 보다 이내 웃으며 만족스러운 시늉을 했다. 그것마저 마땅치 않은지 에멧은 수프와 빵에는 입도 대지 않고 음식이 더럽게 맛이 없다며 저만치 접시를 밀어버렸다. 

“협상의 조건은 잘 알고 있나 보군. 그래, 우선 서로의 조건을 말해 볼까.”

“좋아요. 먼저 말씀하시죠.”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바리스는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최대한 지어 보이며 양손을 배 위로 깍지를 껴 비스듬하게 앉고는 입을 열었다. 

“내 쪽으로 넘어오길 바라. 물론 신분 보장은 지켜주도록 하지.”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다, 바리스 예 갈부스.”

“3자는 거래에 끼지 않는다는 원칙도 모르십니까?”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바리스의 목을 조르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며 낮게 읊조리는 에멧에게 바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쪽 입꼬리만 삐뚜름하게 올리고 그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래서 너는 무슨 조건이지?’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리스의 거래는 나와 맞지 않는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저는 자유를 원해요.”

가볍게 발을 굴리자 구속구가 흔들리는 소리를 내는 것에 바리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확하게는 나에게 그런 것이 아닌, 에멧에게. 

“아쉽지만, 우리의 거래는 이루어질 수 없겠네요. 저는 제국에서 남아 있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요. 구속구의 권한은 황제에게 있고, 그걸 풀 사람은 여기서 몇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하, 그제야 알겠다는 얼굴을 한 바리스는 질 나쁜 미소를 띠더니 한참을 웃었다. 아까와는 달리 이내 에멧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보는 동요는 제법 낯선 것이어서 나도 따라 덩달아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은, 대본을 다 짜 놓은 오페라의 지휘관과 그 아래에서 지휘에 맞추어 이리저리 정해진 굴레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철장에 갇힌 새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이내 굳어버린 에멧에게 다가가기 위해 일어서려 하자 바리스는 웃던 것을 멈추고 입을 열고는 나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몇 없지만 너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지.”

“....... 이제 좀 입을 다물었으면-.”

“네 옆에 온종일 있으면서도 네 슬픔과 고뇌를 모른척하는 사람이 말이야.”

안 그렇습니까? 에메트셀크. 아, 아니지. 솔 조스 갈부스. 친애하는 황제 폐하. 그렇게 말하며 능청스럽게 에메트셀크에게 허리까지 숙여가며 인사를 해 보이는 바리스의 행동과, 말없이 힘을 주었던 주먹을 늘어트리고 바리스만 쳐다보며 굳은 등을 보여주는 에메트셀크의 행동에 나는 말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식당을 뛰쳐나갔다. 

저 멀리서 다시 한번 바리스의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마치 저주라도 된 것 마냥 그 비웃음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더 멀리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그 소리가 줄어들길 간절히 바라면서.



3. 

“하, 그래. 신이 나셨군. 그래 봤자 장기 말 수준도 안되는 네놈이 무슨 짓거리를 벌이나 했지.”

에메트셀크는 힘을 빼었던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고는 웃었다. 바리스는 그 태연자약한 에메트셀크의 행동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웃었다. 이내 지척으로 다가온 에메트셀크가 분을 삭이는 듯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얼굴을 마주하고 가슴팍에 검지를 올려 쿡쿡 찌르며 밀쳐내는 행동에 바리스는 더더욱 웃고 말았다. 

“저 녀석한테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벌이는 건 용납지 않아. 네까짓 놈이-.”

“‘네 까짓 놈’이 한 짓꺼리 수준에 이렇게 대놓고 분노를 감추지도 못하고... 참, 괴물답지 못하군.”

그 말에 에멧은 가슴을 찔러대던 손을 멈추고는 이내 질렸다는 듯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는 놈이랑 이야길 해야 하는데, 이놈에게 이야기를 시도한 것부터가 잘못된 행동이었다. 걸음을 옮기려는 등 뒤로 바리스의 희미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괴물을 죽이는 건 인간의 몫이야. 명심하도록.”

“........”


헛소리. 그런 괴물한테 휘둘리는 국가가 무엇을 하겠다고. 코웃음을 친 에메트셀크는 대꾸도 하지 않고 괜한 걸 들었다는 듯 소리 없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노을 진 태양이 창문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사람들의 다리 아래로 그림자가 태양을 등지고 서기 시작했다. 

‘괴물.’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며 그림자가 따라간다. 그것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평생을 어둠 속에 살았지만, 그때마다 밝은 빛을 갈구하고 이렇게 깊은 어둠 속에 잠식된 자신의 모습이 때론 지옥과도 같이 느껴졌다. 

에메트셀크가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에 그림자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살아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록 증명할 곳도, 증명할 사람도, 증명할 방법도 없지만. 

족쇄는 그 녀석한테 채웠는데 여간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그 녀석의 흔적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사실 눈을 뜨고 있어도, 그 녀석의 빛은 알아서 길을 인도한다. 저만치서 달리던 녀석이 돌연 멈추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는 녀석의 행동에 에메트셀크는 그 사람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우리는 너무 다르고, 모든 것을 이해시키기엔 우린 너무 멀리까지 온걸 수도 있겠구나. 

괴물은 생각했다. 

생각보다 멀리 떨어진 걸음이 아니라 순식간에 좁힐 수 있음에도 괴물은 등을 돌려 다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걸어나갔다. 

괴물은 우는 것을 달래는 법은 잊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4.

“아울루스. 계획은?”

“진척이 있습니다. 육체와 영혼을 일시적으로 분리하는 방법을 말이지요. 심지어 그 영혼을 하나의 물체로 인식해 붙잡는 죽음손아귀 또한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바리스님께서 기대가 상당하시다. 제대로 연구에 성과를 내도록.”


“아무럼요. 전력을 기울이겠습니다.”

허리를 살짝 굽히던 아울루스 반 아시나는 이내 기다란 손톱이 달린 장갑이 안경에 거슬리지 않게 손바닥을 펴 안경을 살짝 받쳐 올리듯 고쳐 썼다. 그의 등 뒤로 제국군으로 추정되는 인물 한 명이 커다란 유리관 안에 가득 채워진 물속에 잠겨 있었고, 그 옆으로 커다란 기계에서는 불길한 붉은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마친 제국군 병사가 곧장 연구실을 빠져나가자마자 느릿한 걸음으로 에메트셀크는 기계를 가볍게 두드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야지. 전력을 기울여야지. 여기에 쏟아 부어버린 연구비가 얼마인데 말이야.”

“그렇지만,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것과는 별개로 다시 합쳐보는 것에 대해선 정확한 성과가 나지 않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에메트셀크는 말없이 잠이라도 든 것 마냥 유리관 안에서 둥실 거리며 부유하는 제국군을 바라보았다. 손주인 바리스가 어쩐일인지 이 몸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아씨엔이란 사실을 안 이후로부터 불로불사의 몸을 유지시키는 방법이 궁금한 것인지, 아니면 이 몸을 가지고 막대한 군대라도 만들 작정인지. 덕분에 클론을 만드는 일 뿐만 아니라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는 '유체이탈' 상태를 만드는 연구 또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울루스에게 더 큰 포상을 대가로 자신에게 먼저 모든 연구의 결과를 보고하도록 했다. 사실 육체와 영혼이 합쳐지는 건 큰 상관은 없었다. 그가 죽을 때를 대비하는 것뿐이니. 육체와 영혼이 합쳐지는 것은 사실 나중의 일이 되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제국이나 하나 만들고 인간을 시켜 방법을 강구하면 된다. 에메트셀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리스보다 먼저 내게 알려라.’ 하는 말과 함께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거추장스러운 노인의 모습에서 자신의 본모습으로 바꾸고 지하 깊은 곳의 복도를 거닐며 앞으로의 행보를 떠올렸다.

거대한 위성 달라가브. 그것이 떨어지면 최소한 그 자리뿐만 아니라 에오르제아 전체가 흔적도 없이 으스러지리라. 그때가 되면 제국을 버리고 그의 영혼만 취해 새로운 육신에 불어넣어 준다면 다시 한번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으리라. 에메트셀크는 한걸음, 한 걸음을 옮기며 다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를 어떻게 해서든 제국에 붙잡아 놓아야 했다. 


5.


“새로운 시종에게 ‘일 (Iyl)’ 계급 중 독재관으로 명한다. 이는 황제의 전권 대리로서-.”

“미쳤군.”

바리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회의에서 문서를 읽던 제국 서기관이 움찔거리며 말을 멈추자 솔 황제는 조용히 입을 열어 ‘마저 읽어라.’ 하고 말했다. 서기관은 이내 더듬거리며 다시 말을 이어 나가려 했으나 바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다시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하시지요, 폐하. 승진도 이런 승진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한낱 야만족에게 일(Iyl) 계급을 주는 것도 모자라 전권을 준다니.”

그리 말을 얹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렇지 않나?’ 하고 운을 띄자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도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다 죽여버릴까. 차라리 다 죽이면 모든 것이 편하지 않을까 하며 솔 황제는 혀를 찼다. 곧이어 ‘야만족에게 그런 계급은 과하다’ 정도의 의견으로 대신들이 결과를 좁히기 시작했고, 바리스는 이내 흡족한 미소를 띠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에게 미쳤다는 발언을 해도 목숨줄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 자리에 앉아있는 대신들도 제법 바리스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지. 이런 것들이 나라의 대신들이라 하는 것에 기가 차는 실정이다. 그래 봤자 자기들도 바리스의 하찮은 장기말 뿐 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조만간 예(Yae) 칭호도 가져가겠군요. 그 사람이 온종일 폐하의 침실에 머물고 있다는 건 여기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바리스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고 이내 황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인간에겐 선이라는 것이 있다. 목숨이 아까운 줄 안다면 그 선은 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황제의 옆자리가 공석이 된 지는 꽤 오래된 이야기이며, 황제가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황후를 맞이하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에 이르렀으니. 게다가 자신의 손주인 바리스마저 지독히도 싫어하는 황제이며 누구 하나에게 온정을 베풀어 본 적이 없는 황제에게 설마? 여기서 입을 잘못 열다간 정말 순식간에 목이 날아가는 것이다. 

“못할 것도 없지.”

“.......”

“잘 말했구나, 손주. 드디어 네가 인간의 지능다운 말을 하고 말이다.”

“정말 미치셨군요.”

차라리 새장의 새가 낫지요. 풀어주면 날아가기라도 하니까 말입니다. 혀를 차며 괜한 말을 했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아버린 바리스는 이내 더 이상 이야기를 하기 싫다는 듯 회의가 진행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이내 자신이 한 방 먹였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황제가 다시 읽으라고 손짓을 해 보이는 순간, 다시한번 서기관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폐하, 새로 오신 시종이...!”

시종인데도 존칭을 붙여 말하는것에 다들 익숙한 터인지 아무 말도 없이 있으려니 황제가 이내 표정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발단으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황제가 일어난 것. 그것은 말로 하는 것보다 더 알아차리기 쉬운, 회의의 종료를 알리는 방법이었다. 


“주치의는?”

“이미 오셨지만, 이유를 모르시겠다고...”

“쓸모없는 것들. 그러라고 네놈들을 붙여 놓은 줄 아는 건가.”

황제가 늙은 외모와는 다르게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고 자신의 방 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문을 열어주는 것조차 기다리기 힘든지 스스로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서니 옆에서 지켜만 볼 수밖에 없던 주치의가 다급하게 일어서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식사 이후에-.”

“식사는 제대로 먹고 있나?”

그렇게 물어보자 시종들이 우물쭈물하며 허리를 더 깊게 숙여 보였다. 어차피 시종들이 매일 보고 하기를 식사를 거의 하지 않고 수프나 간간이 먹을까 말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추운 지역인지라 다른 과일이나 재료가 풍족하지 않지만, 끼니때마다 다른 음식을 올려봐도 입도 대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은 에메트셀크는 미간을 잔뜩 구길 수밖에 없었다. 그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좋았지만,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상처 받은 얼굴을 보는 것도, 그리고 그 얼굴로 뻔하게 나올 말을 듣는 것도 두려운 일이었다. 

“시종을 드는 아이가 말하길 무언가를 보시고 그렇게 쓰러졌다고 하시는데-.”

“독인가?”

“아닙니다, 폐하. 그것이...”

시종이 조심스럽게 황제에게 건넨 그것은, 자신이 서랍 깊숙이 숨겨 두었던.

“이 가면을 보시자마자 바로 현기증을 느끼시는 듯하며 쓰러지셨습니다.”

부서진 검은 가면. 그것이었다. 



하데스. 

검은색과 흰색뿐인 장기판 위로, 킹의 옆으로 폰이 붙어 섰다. 

보고싶었어, 하데스. 

승자도 패자도 알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는 신호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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