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음악의 제목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입니다.
*엘비라 마디간은 영화의 제목입니다.
- 엘비라 마디간]은 1889년 덴마크의 한 숲 속에서 스웨덴 육군 장교 식스틴과 덴마크의 줄 타는 소녀 엘비라 마디간이 동반 자살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네이버 발췌)
-엘비라 마디간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곡이 바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입니다.
-주인공인 엘비라 마디간이 그의 연인인 육군 장교 식스틴의 총에 맞고, 식스틴 자신도 스스로 자살을 택하는 장면에서 아름답게 흘러 나오는 음악으로서,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곡, 혹은 영원한 사랑(죽어서)에 대한 곡이라고도 하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오스트리아인 벨져가 살던 시대상황은 나치와 대립했던 시대 상황과도 얼추 맞아서 이에 대해 글을 써 보았습니다.
*독일인으로 나오는 릭 주의.
*앵스트와 해피앤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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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날도 어김없이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날 나는 한쪽 뺨이 붉게 달아올라 퉁퉁 부어오르는 것을 씻어 내린다는 명목으로 아무렇게나 아버님의 방을 뛰쳐나왔다. 그 흔한 시종들도, 나의 형제들도. 내가 뛰쳐나가는 것을 잡지 못했다. 혼나는 명목은 품위 유지를 하지 못했다는 점. 길가에서 남이 흘리고 간 빵 조각을 주워 먹는 거지 아이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저택까지 데리고 왔다는 것 하나. 당연히 꼬질꼬질한 아이는 진작 저택에서 매를 잔뜩 맞고 쫓겨났으며, 그로 인해 손찌검 받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틀린 것이 없다.
아버지가 두려워 한 것은 그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아이를 돌봐주고, 깨끗하게 치워놓은 저택에 그 아이의 손때가 묻어나는 것을 염려 하여 손찌검 한 것은 결코 아닌 것을 나는 안다.
“헉, 헉.”
있는 힘껏 저택을 벗어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려 나만의 비밀 공간에 도착했다. 커다란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숲 속. 우거진 나무들이 나의 우산이 되어 주는 듯 했으나, 나뭇잎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오히려 방울져 모여 더 큰 물방울을 만들어 내 내 얼굴 위와 온 몸을 적셔 나가기 시작했다. 보기 좋은 가죽 구두와 새하얀 니삭스가 흙탕물로 뒤집혀 져도 상관없었다.
“.......”
나는 안다. 아버지가 정말 두려워 한 것은. 홀든가의 검사로서, 쓸모없는 감정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것이 얼마나 검사에게 있어서 독이 되는지.
나의 형도. 나의 동생도. 어린 나이에서부터 칼을 들고 자란 우리에게, 그런 감정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불필요 한 것인지를 배운다.
나는, 10살의 홀든가의 검사.
벨져 홀든이다.
2.
한창 신문에서는 대문짝만하게 이상한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손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며 꼿꼿하게 서 있는 사진이 실려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기사 내용을 봐도 그 남자를 찬양하는 말 밖에 없다. 조만간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병합한다는 내용과, 그것을 환영하는 기사.
“…….긍지도 없는 것들.”
벽난로 쪽으로 천천히 느릿하게 다가갔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이 부드럽게 구둣발로 짓밟히며, 그 어느 때보다 기분 좋은 느낌을 주는 것에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신문지를 벽난로 불가에 가져다 대었다. 얇은 종이는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며 천천히 타 올라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다.”
합병 따위. 1면에 커다랗게 실린 남자의 얼굴이 완전히 타들어가 마치 목이 잘린 형상을 보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벽난로 속으로 신문지를 던져 넣어버렸다. 벽난로 위쪽에 금으로 장식한 사자 형상이 붉은 눈빛이라도 뿜어내듯 불길이 번쩍이고는 이내 조용히 역사 한 장면을 앗아간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중한 노크 소리가 두 번 들린다.
“실례합니다, 단장님.”
“들어와.”
귓가에 익숙한 전보를 가져다주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 벽난로에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말을 건네자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덕분에 바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도대체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저런 것 하나 신경 쓰지 않고 뭘 하는 거지? 이런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제법 긴장된 느낌으로 내 옆으로 편지 한통을 내미는 손이 보인다. 천천히 편지 앞쪽을 뒤집어 보자, 보낸 사람의 이름이 보이는 것에 한 번 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상부의 지시입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합병을 기원하는 기념인 파티에 꼭 참석하시라는 ‘명’입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다 못해 경애하는 제레온 경의 편지였으니까.
3.
“호호, 이제 독일을 여행하는 것쯤은 눈감고 초콜릿 먹기보다 훨씬 더 쉬워질 것 같군요.”
“암, 그래야지!”
여기든 저기든 한심한 늙은이들의 칭찬이 끊이질 않는다. 어찌나 열변을 토하던지 와인으로도 목이 축여지지 않아 열심히 물을 마셔가며 이야기 하는 모습이 눈꼴시다. 오스트리아 사람보다 독일군의 숫자가 훨씬 많아 보이는 파티장의 구석에서 조용히 와인만 홀짝이니 귀한 집 여식들이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것에 한숨만 짙어져간다.
“저, 실례하지만. 춤 한곡 추시겠어요?”
여자가 먼저 춤을 신청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알고 있으나 가볍게 인사하며 모두 돌려보냈다. 보석으로 장식한 드레스가 무겁지도 않은지, 나의 거절에 한번 불편한 듯 입가를 부채로 가리며 쏜살같이 어디론가 가버리는 모습이 마치 저택을 기웃거리던 도둑고양이 같아 미간을 좁히며 웃어버렸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나.”
“조금만 참아. 금방이라고.”
기사단장인 드렉슬러와, 로라스. 그들 또한 자리에 참석하여 한껏 파티 장을 빛내주었으나, 워낙에 뼈 속부터 기사도로 가득 찬 그 사람들의 눈에 여인이 눈에 찰 리가. 당연히 다들 거절하며 스스로 파티장의 구석진 흑기사를 자청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 너머로, 작은 번개 소리가 들리지만. 비는 오고 있지 않았다. 조만간 오려나.
“나갔다 오지.”
“연회장에 있는 편이 좋지 않겠어?”
“여기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야.”
정원이라도 둘러보고 올 테니. 들고 있던 와인 잔을 근처를 맴돌던 웨이터에게 되돌려 주며 나에게 물어보던 드렉슬러 경에게 손짓을 해보이며 따라오지 말라는 신호를 주자 이쪽을 한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꼿꼿한 자세로 식장에 다시 시선을 준다.
“하아…….”
짙은 한숨 너머로 달빛이 어른거린다. 정원에는 초여름의 상징, 오스트리아의 국화인 에델바이스가 가득 피어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달빛을 머금은 꽃잎과도 같아서, 눈부시게 하얀 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식장의 화려한 보석보다 그것이 나았다. 몸에 대각선으로 걸치던 세라핌 새시를 벗고, 품속에 담배를 꺼내 들려 하니 조그맣게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음~음음. 음~.”
묶어두었던 파란 공단 리본에 금실로 자수가 놓인 머리끈을 풀려다가 말고 지금 내가 있는 연회장인 2층의 테라스 밑을 내려다보자, 둥근 머리통수가 보인다.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이 달빛에 비추어 지며, 그 남자는 천천히 에델바이스가 가득한 정원을 향해 마치 무언가와 춤을 추듯 빙글 빙글 돌며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감고 마치 아름다운 여인과 춤을 추기라도 하는 듯 기쁜 표정으로 식장에서 나오는 협주곡을 입으로 연주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덕분에 생명을 머금은 에델바이스가 짓밟혀 버렸지만.
“음음~.”
“이봐.”
철컥.
말 끝나기가 무섭게 은빛의 총구가 나에게 겨누어 진다. 아까와는 달리 매서운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는 것에 눈이 제법 커졌다. 춤만 출 줄 아는 바보인줄 알았는데. 저런 눈동자도 할 줄 아는 건가.
“아. 실례. 적 인줄 알고 말이오.”
“요즘 적은 ‘나 여기 있으니 너를 불러보마.’ 하고 나타나나?”
“그럴 수도 있지.”
사내는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었다. 달빛에 비추어지는 녹색 눈동자에 무언가 빠져들어 가는 느낌이 나 나도 모르게 테라스에 바짝 기대어 보았다.
“왜 연회에 참여하지 않지?”
“사람 많은 것은 질색이오.”
눈동자 색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녹안은 흔하지 않으니까. 나에겐 이 정원이 최고의 연회장인걸.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렇게나 테라스 난간에 걸쳐진 파란 색의 공단, 세라핌 새시를 쳐다보던 그가 나를 다시금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대는 오스트리아 인이로군.”
“그래.”
“오스트리아에서 이렇게 미인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말제주도 제법 좋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말을 걸게 됨으로서 알게 된 사실 하나. 그는 오스트리아인이 아닐 것 이란걸. 나도 모르게 아쉬운 표정을 하고 그에게 다시금 물어보았다. 너는 오스트리아인 인가? 그는 대답했다. 나는 미국에서 태어나 독일로 망명한 그저 작고 조용한 촌구석에서 올라온 남자에 불과해. 그리고 그는 웃어보였다.
“춤 한곡 춰 줄 수 있소?”
“아쉽게도 이쪽은 남자라서. 남자랑 춤추는 취미는 두지 않는다.”
새삼스럽게 그가 손을 내미는 것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양을 하자 그가 도리어 보라는 듯 테라스 밖까지 흘러나오는 조용한 협주곡에서 엇박자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춤추는 것이 마치 ‘나 이렇게 춤추는데 네가 안 고쳐주고 배겨?’ 라는 의미를 가득 품은 것 같아 헛웃음이 나와 버렸다.
“엉망이로군. 독일인은 다들 그렇게 춤을 못 추는 건가.”
“어디 오스트리아인 솜씨 좀 보여주시오.”
과장스럽게 춤을 요청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한쪽 다리를 살짝 뒤로 빼며 허리를 숙여 손바닥을 보이며 나에게 손을 잡으라는 그의 행동에 테라스에 걸쳐두었던 세라핌 세시와 별모양 훈장을 다시 달고선 그대로 뛰어내렸다. 자잘한 훈장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별 흘러가는 소리처럼 들렸지만,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손바닥을 뒤집어 버렸다. 자연스럽게 내 손 위에 얹어진 그의 손에, 그는 제법 놀란 눈을 치켜뜨며 날 바라보고 허리를 다시 펴 버렸다.
“난 여자 쪽은 소실 없으니 네가 맞추는 게 좋겠군.”
“...... 너무하는군. 이쪽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데.”
간단해. 내 발을 밟고 올라서면 돼. 지금? 그래. 지금. 그는 한참을 나에게 허락을 받기라도 하는 듯 연신 물어보았다. 나 무거워. 도넛이 주식이란 말이오. 그대 발은 강철 발이야? 난 몰라. 발가락에 뼈가 나가도 나는 모르는 일인 것이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조심스럽게 내 광이 나는 가죽 구두 위로 자신의 흙투성이 신발을 올려 두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모차르트 협주곡 21번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그는 웃어버리면서 ‘오, 엘비라 마디간.’ 하고 감탄사를 남겼다.
“영화를 꽤나 좋아하나 보군.”
“정확하게는 극장의 낡은 필름 돌아가는 소리를 혼자 듣는걸 좋아하지.”
내가 영화 상영관 뒷구멍을 좀 잘 알거든. 몰래 들어가서,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조용히 영상기를 트는 것이오. 필름 돌아가는 소리와, 극중의 배우들이 키스하는 장면을 제일 좋아해. 그는 그렇게 말하며 마치 흉내라도 낼 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눈을 내리떴다. 입술과의 거리가 고작 손가락 한마디 쯤 되었을 때 그는 콧바람소리를 내며 웃어버리고는 춤에 집중했다. 그가 무겁다고 말은 했지만, 정말 무거울 줄이야. 그에게 그대로 그 소감을 말해주자 그가 웃어버린다.
“무겁다 했잖소.”
“보기에는 말라보여서.”
골격도. 나도 모르게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아보고 손목을 붙잡아 보았다. 확실하게 뼈대는 가늘다. 딱 맞는 듯 달라붙은 연미복에서 그런 것이 더 확연하게 드러나지만.
“...더듬지 마.”
그는 솔직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자마자 내 눈을 지긋하게 쳐다보고는 ‘남자인 것을 아는데도 입 맞추고 싶어.’ 라고 말했으니까. 난 그것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더 가까이서 그냥 그의 눈동자를 마주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 이 모든 것은 그의 눈동자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춤을 멈추고 천천히 그의 눈동자 속으로 빠져 들었다. 눈과의 거리가 아주 가깝게 느껴질 때. 부드러운 에델바이스 향이 코끝을 스치며 입가에 포근한 느낌이 닿았다. 진저리 칠 만큼 무서운 감각이 온 몸을 내달리는 것에 미간을 좁혀버렸다.
녹색의 정직한 눈동자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렇게 나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있다가 떨어진 나의 입술은 거짓말만 토해내기 바빴다.
“눈이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 그대는 사내가 연인인 게 불편하오?”
아니. 절대로. 연인이라는 것에 성별을 두고 논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이 있을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군인으로서, 언제 강풍에 꺼질지 모르는 촛불이. 사랑을 한들 그것이 과연 현명할까?”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그리고 그는 나의 말에 희미하게 웃어버렸다.
“교향곡과, 지독하게 풍기는 에델바이스의 향과 딱 어울려.”
지금 이 순간이. 그는 그렇게 그 말을 남기고 내가 붙잡았던 손을 조심스럽게 빼듯 놓고는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아주 대단한 타이밍이라도 맞춘 듯. 천천히 비가 내렸다.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더 멀어져 갔고. 곧이어 나를 보던 녹색 눈동자가 고개를 돌리며 앞을 보고, 사라지는 것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4.
오랜만에 낡은 영상기 소리가 저택 안, 나의 방안을 울려 퍼지게 했다. 스피커로 들리는 배우들의 웃음소리. 슬로우 모션으로 천천히 시간이 흘러가듯 아름답게 웃는 소녀. 1889년도 덴마크의 한 숲속에서. 스웨덴의 저명한 육군 장교 ‘식스틴’과 덴마크의 서커스 묘기를 부리는 소녀, ‘엘비라 마디간.’ 두 사람의 지독한 사랑이야기.
너무나 사랑했지만, 장교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 두 사람은 현실로 도피해 보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질 못하여 나무열매를 따먹고, 결국 마지막 최후의 만찬으로 피크닉을 나서는 순간. 남성은 여성의 손에 총을 쥐어준다. 두발의 총알.
[오, 못해요. 못하겠어요.]
[할 수 있어.]
그때 마침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 그리고 들려오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누군가가 표현하길, 그것은 ‘맑음 뒤에 숨겨진 슬픔의 미학.’이라고. 곧이어 나비를 잡는 여인이 두 번의 총소리와 함께 그 장면에서 화면이 멈추어 버린다.
“......”
영원한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없다. 현실에서는. 나는 천천히 그 장면을 다시금 돌려 보았다. 필름 넘겨지는 소리가 내 귓가를 자극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날의 교향곡이 자꾸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려서. 녹색 눈동자로 온 세상이 가득한 것 같아서.
그날 영화 필름은 다음날 아침 다 찢어져 버렸다. 칼로 아무렇게나 베어버린 흔적과 함께.
5.
나의 예상 외로 일주일간 가까이 열리는 연회에 그는 매번 참석했다. 다만 이번엔 정원이 아니라 연회장 안에서 볼 수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꺼리는 그는 매번 무언가를 찾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고, 한쪽 구석에 자리한 나와 눈이 마주치면 예의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와인 잔을 살짝 들어보였다.
“.... 하. 뭐가 에델바이스고, 뭐가 엘비라 마디간인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저렇게 웃어 보일 거면서. 나는 그에게 손으로 마치 춤추는 것 마냥 내 옆 테이블 위에 검은 가죽 낀 장갑으로 중지와 검지를 번갈아 움직였다. 그러자 그걸 본 그가 와인을 잘못 삼킨 듯 켁켁 거리더니 마치 날 흉내 내듯, 자신의 옆에 놓인 간이테이블 위에서 나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 보인다.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근처를 돌아다니던 로라스경이 본 듯, 나에게 성큼 다가와 소곤거리듯 물어본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흠. 아니.”
그의 물음에 손장난을 치던 손으로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놓여 있던 와인 잔을 집어 들고 여유롭게 한 모금 마셨다. 포도향기가 달콤하기만 하다. 쓴맛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것에 다시 한 번 입 꼬리를 올리며 웃어버리자 로라스, 그도 웃어버리고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주변을 방황한다. 드렉슬러경을 찾는 거겠지. 그가 가는 것을 보고는 아까 보았던 곳을 힐끔거리며 어제 그가 있던 자리를 쳐다보자 그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디 갔지?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시오?”
“누굴 좀 찾.”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와 나에게 바짝 붙어서 개구쟁이처럼 웃어 보이는 그가 보인다.
“안녕, 에델바이스 도련님.”
“왜 내가 에델바이스지?”
“그대 소문을 들었거든. 그대가 오스트리아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국화(國花) 하면 역시 에델바이스지.”
호오.
“또 다른 소문이 있나? 그거론 내 흥미를 끌지 못할 텐데.”
한쪽 다리를 꼬고 벽에 기대어서 그를 쳐다보자 그가 무슨 중요한 비밀이라도 되는 듯 하얀 면장갑을 낀 손을 귀에 대고는 좀 더 잘 들리게 하려는 듯 그의 입과 내 귀를 동굴 만들 듯 오므려 조용히 속삭였다.
“그대가 어제 제법 잘생긴 사내와 춤을 추고 즐거운 하루를 보낸 나머지 그 사내에게 반했다는 소문을 들었소.”
나는 그의 속삭임에 그저 입 꼬리를 올리고는 한쪽 눈썹을 올려보았다. 정말로? 하고 물어보는 눈빛으로. 그는 내 표정에 씩 웃어 보이며 정말로. 하고 다시 속삭여 온다. 오, 그것 참 헛소문이로군. 말과는 다르게 자꾸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스스로도 충분히 알고 있지만 고칠 생각도, 딱히 그럴 이유도 없었다. 내 옆에 아주 조금 거리를 두고 나와 비슷한 자세로 벽에 기댄 그에게서 샤워코롱 향기가 나는 듯 했다.
“내 이름도 알고 있나?”
“오, 빌져 홀든!”
“.......네 이름은?”
그는 자신의 이름을 물어보는 나를 향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러더니 조용히 내 손바닥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R.I.C.K. T.H.O.M.S.O.N.
“렉 톰슨.”
“이보시오. 알파벳을 잘 떠올려봐. 릭이잖소.”
“빌져 홀든? 그건 어디 사는 누구 홀든 인지 모르겠군. 내 이름은 벨져 홀든이다.”
미간을 좁히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당황스러워 한다. 이런 연회에 참석 될 정도면 군인 중에 한 사람일 텐데 이렇게 허술한 사람이 군인이여도 괜찮은 건가. 새삼스럽게 다시금 며칠 전 정원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총구를 겨누는 그의 날카롭고도 고요한 눈. 그런 것을 보면 그도 틀림없는 군인일 텐데.
“계급은?”
“....... 그건 군사 기밀이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처음으로 나와 이야기 하던 도중 비밀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가. 이미 이쪽은 워낙에 오스트리아에서 잘 알고 있을 테니, 내 정보쯤이야 다 알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웬만한 군사기밀정도야, 독일 군에 대한 정보라면 이쪽도 가지고 있지만. 분명 이 남자에 대한 정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정도의 외모라면 기억 못할 리가 없는데. 어딘가 어리바리해 보이지만, 잘 차려입은 모양새. 제법 빠른 몸놀림. 그가 고위 간부 중에 한명일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참을 어색하게 그와 벽에 서 있자니 독일 상위 간부 중 한명이 잔뜩 취해 릭에게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여어! 릭 톰슨!!”
“아.”
중장님. 그는 서둘러 한참을 비척거리는 그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더니 꼿꼿하게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선 대각선으로 하늘을 찌르듯 팔을 뻗었다.
“Heil Hitler!”
그의 인사에 바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독일 군이 확실한 듯한 그의 행동이 어쩐지 화가 난다. 릭의 인사에 중장이란 사내도 술기운인데도 불구하고 꼿꼿하게 서서 릭 톰슨과 같은 자세로 같은 단어를 크게 외친다. 발음은 완전히 다 꼬부라져서 뭐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후후, 이번에 오스트리아 군 병합작전에 자네가 참가하게 되었다지.”
“…….예. 중장님.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자리를 옮겨서.”
“아니! 난 이 화려한 무대가 너무 좋아!”
제 2의 독일이 태어날 이 오스트리아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릭의 몸에 아무렇게나 기대듯 쓰러지려 했다. 나도 모르게 릭을 확 끌어당기자 균형을 잃은 바보 같은 남자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지듯 쓰러졌고, 술기운에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려 애쓰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릭을 끌어당긴 내 손을 보고 그는 가발이 벗겨진 머리로 씩씩거리며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코웃음을 치며 그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다. 병합 같은것에 찬성 할 리가.”
“네놈!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네놈은 알기나 하는 건가!”
“오, 네 그 폭주 기관차 같은 엉덩이 보단 낫지.”
덕분에 이쪽은 깔려 죽을 뻔 했다고. 어느새 흥미진진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점점 생겨나기 시작하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중장은 서둘러 비척거리며 시종의 도움을 받아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삿대질을 하는 것을 잊지 않으며 두고 보자는 말을 내뱉으며 씩씩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연회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방금 것은 그대가 경솔했소.”
그는 끝까지 문 밖을 나서는 남자를 쳐다보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내가 정작 궁금한 것은.
“넌 나치당인가?”
“......”
“내가 오스트리아 고위 간부란 것은 알고 있겠지. 너의 접근은 의도적인 것이라 해석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로군.”
“벨져. 내 말을,”
닥쳐. 나는 그의 손을 붙잡던 팔을 던지듯 빼 놓았다. 그가 합병을 주도하는 독일의 군사라는 것에 절로 주먹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완벽한 그물에 걸려 버렸다.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어 숨통을 조여 가는. 가져서는 안 되는 감정이 좁은 틈을 비집고 기어 올라와 온 몸을 차지 한지 벌써 오래다. 답답한 마음에 나 또한 연회장을 빠져 나가기 위해 아무렇게나 장갑을 벗어 버리고는 한쪽 손에 구겨지든 말든 아무렇게나 쥐어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그가 내 옷깃을 붙잡는 것이 느껴진다.
“벨져.”
“......놔라.”
“벨져. 정원에서 기다릴게.”
“.......”
대꾸할 마음도 없어 그의 손을 내쳤다. 에델바이스의 향과 딱 어울려. 그의 마지막 말이 다시 한 번 심장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추억이 되어 바스러져 가기만 할 것 같아서.
“벨져.”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군인의 발걸음으로. 그를 돌아보지 않고.
6.
“.......”
천천히 먹구름이 다시금 몰려오기 시작했다. 폭우가 예상된다며 모든 마차들이 취소가 되어 차마 저택으로 돌아갈 수 없어 연회가 열리는 곳에서 손님들 모두가 잠시 투숙하기로 결정이 나, 이 저택의 시종들만 한층 더 바빠지기 시작했다. 문 밖으로 분주하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는 평소에 저택에서 소리 없이 걸으라는 주인들의 명령을 어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매우 바빠 보였으니,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업무량이 짐작이 간다. 하얀 커튼 너머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정원에서 서성이는 한명의 인영.
“.......”
그는 한곳에 멈추어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돌아가.”
들리지 않을 말을 건네 보지만, 당연하게도 그의 귓가에는 닿지 않았다. 어차피 안 되는 것을. 커튼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에 눈을 감았다.
그는 결국 비가 올 때 까지 그 자리를 지켰고,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마치 내가 비를 맞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 갈 때 까지 그를 창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이별 인사였다.
그 이후로 그를 볼 수 는 없었다.
7.
“도련님, 전보가 왔습니다.”
“아. 그래.”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페이퍼 나이프를 집어 들고는 집사가 은 쟁반위에 올려둔 편지를 집어 들었다. 빳빳하게 다림질이라도 된 듯 한 느낌의 문서에서는 잉크 냄새가 가득했다. 차분한 잉크 냄새와는 달리 그 내용은 지독하기 짝이 없었다. 합병에 불참 할 시 강제로 징역에 처한다는. 국가를 버린 간부의 편지에서는 독사의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말 할 필요도 없이 편지를 아무렇게나 벽난로에 태워버렸고, 편지 내용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집사는 나에게 황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련님.”
“필요 없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이 가망성 없는 나라를 떠나버리자고. 명예 따위가 무엇이고, 자존심 따위가 무엇이냐며 상사에게 말하며 차라리 이 일을 그만둬 버리자는 심정으로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집사가 서둘러 나를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만 개의치 않고 마구간으로 향하기 위해 정문으로 향하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다른 젊은 집사가 친히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거기서 마주한 것은.
“Heil Hitler!”
비열한 웃음을 지어 보인 채 나를 향해 불타는 눈빛을 보내는 예의 그 중장이었다.
8.
“우리 당에 합병하라는 전보는 잘 읽어 보았나?”
“......그래. 잘 읽어 보았지.”
“그럼 그에 대한 답변은?”
당연히 Yes 여야 하겠지. 그렇지 않으면 강제 징병이니 말이야. 그는 마치 그의 원수를 따라 하기라도 하는 듯 어느새 잘라버린 콧수염을 한번 매만지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 줄지어 따라 온 병사들 또한 기세등등하게 나를 쳐다보는 것에 코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여기 있다.”
그 답변. 빠르게 옆구리에 찬 칼로 그의 얼굴을 향해 한 획을 그어 버렸다. 병사들 모두 서둘러 총기를 다급하게 꺼내며 나에게 겨누었고, 그대로 중장은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아 소변을 지려 버렸다. 축축하게 변한 흙바닥에 중장이 눈을 질끈 감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가서 전해라. 벨져 홀든은. 오스트리아 인이라고 말이다.”
네 콧수염도 주워가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섰다. 그러자 바로 뒤에서 엄청난 고함 소리와 함께 ‘잡아!!!’ 하는 음성이 들려, 나는 서둘러 집사를 향해 문을 닫으라고 소리를 쳤다.
“절대 놓쳐서는 안 돼!!! 저놈을 죽여!!!”
빠르게 닫히는 문에 군사들이 저마다 얼굴을 찧는 소리가 들리는 것에 서둘러 입구 근처에 있던 모형 갑옷이 들고 있는 창으로 문고리를 고정시키듯 막아두었다.
“시종들을 대피시켜. 다들 뒷문으로 빠져 나간다.”
“도련님! 뒷문이 벌써 독일 군에게 둘러싸였습니다!”
“........”
어차피 놈은 알고 있었다. 내 자존심이 독일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 따위 없을 거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벌써 병력이 뒷문에 도착 했을 리가 없지. 한참을 고민하고 있자니 총소리가 문 너머로 들리기 시작한다. 육중한 나무문을 뚫고 총알이 박히려는 소리가 비 쏟아지듯 들리기 시작하자 늙은 노 집사는 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도련님.”
“.......”
“도련님. 저희는 어차피 죽을 목숨입니다.”
그래. 합병에 참여하지 않는 귀족들은 필요 없다. 귀족들에게 종속한 시종들 또한. 집사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버리고 갈 수 없었다. 집사의 손을 붙잡고 다시 한 번 공간을 확보 해 줄 테니 빠져 나가란 말을 해 보았지만 집사는 내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도련님.”
“.......집사. 명령이다.”
“마지막 명령을 어기는 것을 부디 선처해 주십시오.”
그 순간 무언가 문에 엄청난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결국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육중한 무게를 견디지 못한 문이 부셔져 버렸다. 서둘러 겨우 손 한마디의 구멍을 향해 발길질을 하며 입구를 늘리려는 군인들의 모습에 집사는 내 등을 떠밀었다.
“여기는 저희가 막겠으니 얼른 가십시오!”
“그렇지만!”
“홀든가를 생각하십시오.”
별채가 아닌 본가에 있는 홀든가. 그래, 그쪽에서도 벌써 손을 써놨을지도 모른다. 점점 마음이 급해지자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 손잡이에 저절로 손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들을 베어버리고, 그 다음에 가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벨져님.”
“.........”
“벨져님. 총알은 그 어떤 것 보다 빠릅니다.”
벨져님의 검술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요. 그러니 얼른. 부디. 제 부인 안나를 부탁합니다, 도련님. 집사는 그렇게 말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순간 문이 완전히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아무렇게나 총을 무자비 하게 갈기는 독일군의 행동에 집사는 다시금 내 등을 떠밀었다. 안나를 부탁합니다, 작은 주인님. 그는 그렇게 다시금 말하며 나에게 웃어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무기력 하게도, 그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달렸다. 어느새 창문 밖으로는 추적한 비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일단 뒷문으로 가자. 앞쪽보다는 병력이 덜하니까. 뒷문의 바로 위쪽, 2층에 창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 나는 서둘러 2층을 향해 올라갔다. 그 순간 ‘죽여!’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 소리가 빗발치고,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도 뒤를 돌아보지 못한 체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둘러 올라간 곳의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자 고작 해봤자 10명 정도 되는 남자들이 뒷문을 서성거리는 것이 보인다. 저 정도라면. 아직 모두 총기를 꺼내지 않은 상태니까 충분히 가능하다. 조용히 창문을 열고 그대로 뛰어 내렸다. 모래가 발에 밟히는 소리가 나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독일 군들이 소리의 근원지인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바로 그들의 목을 베어내었다. 한 놈은 살려둬야 해.
한 놈, 목을 베어진 남자는 목을 감싸고 고통스럽게 신음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두 놈. 배를 뚫린 남자는 망연자실하게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며 피를 토해내었다. 빠르게. 죽이자. 살해에 있어서 군인에게 머뭇거림이란 없어야 했다. 빠르게 한 놈 한 놈을 해치우니 급하게 총을 장전하려던 마지막 군인이 이쪽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것을 보고 그를 향해 달려 나갔다. 아무렇게나 소리를 지르던 군인은 방아쇠를 당기려 했고, 나는 서둘러 검을 뒤집어 칼등으로 그의 목을 내리쳤다. 격한 흔들림에 눈이 뒤집힌 병사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서둘러 병사의 옷을 벗겨내었다. 일단 위장을 하고 빠져 나가자. 홀든가로 가면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르니. 빠르게 남자의 몸을 더듬어 다른 흉기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 한 뒤 총을 저 멀리 구석에 발로 차 버려버리곤 그대로 저택의 정원으로 달려 나가 남자의 옷을 벗겨내었다.
“남자 옷 벗기는 취미는 없는데.”
그 순간 떠오르는 인물 한명에 헛웃음을 지어내었다. 내 시종들이 다 죽어나가는데도 이 와중에 그가 생각나다니. 정말이지 미쳤다며 스스로에게 칼을 겨누지 않을게 아쉽다는 생각을 감추지 못하고 내 옷을 벗어 내렸다. 나치의 군복이 어색하지만, 다른 방도는 없었다. 검은색의 정갈한 군복. 한쪽 팔에 걸린 붉은 완장의 알 수 없는 문양. 머리를 대충 모자 속으로 집어넣고는 여전히 기절해 있는 군사의 목을 바로 베어내었다. 나치의 검고 긴 장화 위로 남자의 피가 조금 튀었지만. 개의치 않고 검집을 챙겨 바로 숲을 가로 질러 나갔다.
“제길, 도망갔잖아! 숲을 다 뒤져!!!”
“예!”
어느새 따라 온 것인지, 독일군의 발걸음 소리와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것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차마 내 옷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당장은 피하는 게 우선이니까. 빠르게 숲을 지나치자 익숙하게 복잡한 시내의 거리가 나온다. 최대한 인영이 많은 곳으로. 케른트너의 오페라 하우스를 지나가자. 생각과 발걸음은 동일하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사람들을 비집고 지나가기 시작하자, 나와 어깨를 부딪치는 여인이며, 내 발에 발이 밟힌 남자며 툴툴거리며 이쪽을 향해 한마디씩 하지만 그것들을 들을 여유는 없었다.
지칠 때로 지친 발걸음으로 겨우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하자 익숙한 음악 소리가 들린다.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그리고 그 음악소리에 멈추었던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등 뒤로 무언가 동그랗고 기다란 것이 닿는 감촉이 느껴져 몸을 굳혔다.
“그대로 뒤돌아보지 말고 앞장서시오. 조용한 곳으로 가.”
“.......”
익숙한 샤워코롱의 냄새를 닮은 청량한 향기.
릭 톰슨이었다.
9.
에델바이스가 가득 핀 꽃밭. 어딘지 잘 모르겠지만 한적한 숲속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넓은 공터에는 에델바이스가 가득 피어있었다. 저 멀리서 들리는 오페라 하우스의 교향곡 소리가 충분히 들릴 정도로 적막함이 가득한 이곳. 그제야 그는 내 등에 닿은 총을 거두었다. 그제야 나는 뒤를 돌아 볼 수 있었다.
“벨져 홀든. 그대를, 병합 거부 죄로 체포 하겠소.”
“.......목소리가 나갔군. 감기라도 걸렸나?”
“헛소리 마시오.”
그는 정말 당장이라도 나에게 총을 쏠 듯 방아쇠를 조금 당겼다. 발사되지 않을 정도로 당겨진 방아쇠. 나에게 겨누는 총구와 흔들림 없는 녹빛 눈동자. 달밤 어린 에델바이스의 공터에 퍽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검은 옷으로 가득 감추어진 그의 몸.
“내가 붙잡혀도 살 가능성은?”
“.......”
“아쉽게도 제로에 가깝겠지.”
그는 말없이 총구를 고쳐 겨누었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에게 총구를 다시 겨누었고 움직이면 그대로 사살 하겠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남기며 내 심장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쏴. 릭 톰슨.”
“.......뭐?”
“쏴. 정확하게 내 심장에.”
그의 한순간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바로 지금.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으로 서둘러 그의 손등을 강하게 쳐내자 총이 바닥에 굴러 떨어진다. 다급하게 그가 총을 다시 집으려 하는 순간 그의 멱살을 잡아 꽃밭으로 내동댕이쳤다. 아무렇게나 뒹구는 그의 몸 위로 올라 타 그를 억압하려 하자 복부를 향해 강하게 주먹을 내지르는 그 덕분에 숨을 들이켰다. 자연스럽게 구부러진 몸을 그가 밀쳐내고 내 위에 올라타는 것에 그대로 몸에 힘을 빼자 그가 어느새 집어 든 것인지 총구를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허울만 군인은 아니었군.”
“아쉽게 되었소. 벨져.”
“그래. 그래도 꽤나 괜찮은 결말이로군. 엘비라 마디간처럼. 아. 물론 너는 죽지 않겠지만.”
나는 조소를 지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 행동에 잠깐 움찔한 그가 다시금 총구를 내 심장에 겨누었지만.
“…….하나만 물어보겠소.”
“뭐든.”
“왜 그날 나오지 않은 것이오?”
“릭 톰슨.”
그랬다면 네가 나랑 행복해 질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나?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내가 말 하지 않았나? 사랑이란 검사에게 너무나도 큰 사치야. 불편이고, 악의 요소이지. 지금도 봐. 네가 날 쏘지 못하잖아. 넌 날 쏘지 못해. 너 또한 엘비라 마디간과 다르지 않아. 그는 나의 말에 마치 울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틀렸소. 그날 그대가 나왔으면 나는 그대랑 도망쳤을 거야.”
“......”
“도망치고, 다시 도망쳐서. 현실의 벽에 부딪쳐도 그대를 사랑할 자신이 있었소.”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얼굴 위로 짭조름한 빗방울이 떨어졌다. 녹색 숲에서 내리는 빗방울. 꽉 다문 입술이 그가 지금 감정을 얼마나 참고 있는지가 느껴지는 것만 같아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눈가를 매만져 주었다. 금세 엄지로 스며들 듯 파고드는 그의 눈물이 너무나 더웠다. 그의 심경이라도 대변하는 듯. 천천히 우리의 머리 위로 번개 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버린 에델바이스 위의 나의 머리카락이 금세 젖어들 것만 같이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자 그의 눈물이 감추어졌다.
“난 틀린 것이 없어.”
“아냐, 그대는 틀렸소.”
봐. 벨져. 이 손에 있는 이 손금이 국경이야. 그러나 중요한건 손에 있는 이 보잘 것 없는 경계선이 아니오. 중요한건 손이야. 벨져. 그대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가 아니야. 그저 그대랑 내가 사랑한다는 것 그 하나면 돼. 릭은 그렇게 말하며 내 품으로 허물어졌다.
나는 그저 그런 그를 껴안았다. 감기 기운이 제대로 가지 않은 그가 비에 젖어 몸이 뜨거워 시작하자 일단 그와 이곳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껴안고 일어서려 하자 어느새 여기 있는 것을 안 건지 왁자지껄한 군인들의 소리와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벨져!”
“안다.”
“도망가. 도망가, 벨져. 난 그대를 죽일 수 없소.”
차라리 도망가. 어차피 그대가 나랑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멀리 도망가서 다신 보이지 마시오. 그는 마치 집사처럼 내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빨리!”
그는 바닥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한발의 총성이 커다랗게 숲 속을 울리자 군사들의 ‘저기다!’ 하는 목소리와 함께 땅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달렸다.
그의 손을 붙잡고. 당황한 그가 미끄러져 넘어지려는 것을 부축하며 다시금 달렸다. 그는 말없이 내 손을 붙잡고 같이 달렸다. 비가 내리는 숲속은 너무나도 미끄러웠지만, 개의치 않고 우리는 달렸다. 그리고 내가 릭을 향해 돌아보았을 때, 우리 쪽을 향해 겨누어진 독일군의 조총과, 두발의 총소리. 그리고 허물어져 가는 릭 톰슨의 모습이. 아주 천천히 슬로우 모션처럼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지난번에 자꾸만 반복해서 본. 엘비라 마디간처럼.
10.
…….
나는 말없이 내 품을 파고 들 듯 자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협탁 위에 올려두었는지 모를 편지지와 함께.
“…….릭.”
“으응, 벨져 5분만 더.”
“도넛 한 박스를 사 뒀는데. 식으면 맛이 없으니 버려야겠군, 그럼.”
“도넛!”
커피는!? 그는 완전히 부스스한 까치집으로 벌떡 일어났다. 간밤에 힘들었는지, 갑자기 펴진 허리에 오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면서. 가련하기도 하지.
“허리가 아프니 도넛은 포기해야지.”
“아니오! 먹을 수 있소!”
도넛 주시오, 도넛. 안 그래도 스트레스 받아 죽겠는데. 나는 그의 말에 도넛을 주겠다며 잠시 침대 밑을 내려다보는 척 하다가 손가락으로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원 모양을 해 보였다. 그러자 그가 완전 어이없다는 표정을 해 보이고는 내 손을 와작 하고 물어버리기 시작했다.
“아.”
“아으오 마힛네!”
뭐? 나는 웃으면서 내 손을 연신 깨물고 있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뭐라고, 릭 톰슨? 다시 한 번 말해봐라. 그는 내 말에 잔뜩 깨물고 있던 손을 놓아주고는 날 한번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쉬며 웃어버렸다.
“그대가 제일 좋다고.”
“…….말은 번지르르 해선. 다리는 괜찮나?”
“언제 적 이야길 하는지 모르겠소.”
그는 침대 시트를 무릎까지 끌어 올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 몸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다리위에 무언가 파인 듯한 곳이 겨우 메꿔진 상처 자국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상처 자국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보자 그가 움찔 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때의 공포가 절로 다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것에 신경이 쓰여 그의 상처자국 위로 입을 맞추었다.
“두 발 중 한발은 오발이여서 다행이었지. 다리 하나에 그대를 얻은 거라면 꽤나 많은 이득 아니겠소?”
“그런 말 하지 마라.”
차라리 내가 다쳤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오, 이제 그대는 군인이라고 하면 안 돼. 너무 물러졌소. 릭은 해맑게 웃으며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두발의 총성. 하나는 우리를 향해 날아오지 못하고 나무에 박혀 버렸고, 아주 슬프게도 다른 한발은 릭의 다리를 관통했다. 허물어져가는 릭 톰슨을 겨우 붙잡고 홀든가로 미친 듯이 도망쳐 겨우 릭을 살렸고, 다행히 아직 피해가 없던 홀든가는 형의 덕분에 독일 군을 쉽게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것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는 여전히 미지수 이지만.
릭의 상태가 괜찮아 지고, 나는 한나 유모에게 비보를 전했다. 한나 유모는 나의 말에 그 자리에서 눈물 머금은 눈으로 웃어 보이며 ‘괜찮아요, 도련님. 괜찮습니다.’ 하고 말했으나,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 한 자락이 턱 끝에 고여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껴안고 한참을 그렇게 그녀에게 사죄했다.
결국 나중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독립된 국가로 구분되고 나서야, 나와 릭은 미국으로 겨우 이동 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나를 감시하는 인원이 끊이지 않고 저택을 침입하려 했으니까.
“벨져. 그 음악이 듣고 싶소.”
“또?”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노래잖아. 좀 틀어주시오.”
나는 한숨을 쉬며 맨 몸으로 방구석에 자리 잡은 전축에 다가갔다. 레코드판이 돌아가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전축 핀을 그 위로 올리자, 지직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며 조용한 피아노곡이 들리기 시작한다. 방안 가득 메워지는 그 음악소리.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나는 그에게 다가가 조용히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틀렸다.
릭 톰슨을 당해 낼 수 없어, 나는 항복해 버렸다. 검사로서의 긍지도 버리고 나는 그렇게 선택해 버렸다.
사랑해 달라는 릭 톰슨을.
나는 틀렸다.
사랑이란 감정이 쓸모없다는 것에 대하여. 어느새 그와 한 침대를 쓰고 아침을 기다리는 나는, 어느새 내 옆에 그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게 되어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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