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學審問(박학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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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 1. 10. 12:16
작성자
you. and. me.






* 아이 일때의 릭 만큼 순수한것은 없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여기에요.”


릭을 안고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2층짜리에 다락방 하나가 딸려 있는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정원에서는 다른 집이 심어두는 장미보다는 튤립이 좀 더 많이 심어져 있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나무로 만든 하얀 펜스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그다음이었다. 베이지색 톤의 집과, 릭의 갈색 머리카락을 닮은 지붕의 집은. 한눈에 봐도 릭의 집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내려주세요! 아이의 당찬 말에 무릎을 천천히 꿇고 품에 안고 있던 너를 내려 주자마자 아마 옷 속에 감추어져 잘 보지 못한 것인지, 셔츠의 목깃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목에 걸린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뭘 하나 싶어 뒤로 다가가 살펴보니, 아이가 키를 잊어버릴까 염려한 것인지 가죽끈으로 만든 목걸이에 자그마한 시계 모양 펜던트와 함께 키가 달려 있었다. 


“지금은 엄마도, 아빠도 안계세요.”


저녁 늦게 오시니까요. 얼른 들어오세요! 비밀스러운 곳에 들어가는 것처럼 집게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올리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과, 문밖을 둘러보며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 건지 없는 것인지 둘러보는 행동이 우스워서 릭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은 집 안으로 발을 디딜 수밖에 없었다. 


“저희 집은 슬리퍼를 신어야 해요.”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내 구두를 내려다보는 너의 시선에 나도 따라 구두에 시선을 내렸다. 구두가 집 안에 있다면 아무래도 부모가 의심하겠지. 한참을 둘 다 구두를 쳐다보다가 결국은 입을 먼저 여는 수밖에 없었다.


“요정의 신발은 특별해서 들키면 큰일인데. 어른에게 들키면 난 사라질지도 몰라.”


애 한 명 있는 곳에서 어른이 무단 침입 아닌 무단 침입을 했으면. 당연히 사라질지도. 목숨이 말이다.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릭은 동그란 머리통을 끄덕거리며 ‘그럼 제 방에다 숨겨 놔요!’ 라고 말하며 내 손을 이끌고 자신의 방에 올라가려는지 낑낑거리며 신발을 벗는 내내 내 팔을 잡아당겼다.


“신발 좀 벗자.”


얼른 벗어요, 얼른. 제자리에서 동동거리며 발을 굴리는 네 모습에 실소가 나온다. 어디 어디까지 동동거리나 볼 참에 느릿느릿하게 한쪽 신발을 벗자 릭은 답답함에 어디서 배운 거지 가슴을 탁탁 주먹으로 치며 ‘허이고 세월아, 네월아 하겠네.’ 하고 내가 벗은 신발을 빼앗아 얼른 벗으라며 핀잔까지 준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지?”


저희 할머니가요! 이런 것도 알아요. 어휴, 우리 릭 방은. 개판 오 분 전이네. 어때요?! 신발을 한 손에 든 체 자랑스럽게 허리에 손을 올리며 뿌듯한 표정을 짓는 너에게 나는 그거 안 좋은 소리다, 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한숨을 쉬며, 슬리퍼라면 사라진 개수 확인이 손쉽기 때문에 난생처음 집 안에서 양말만 신고 들어가게 되었다. 왜 슬리퍼를 안신냐는 너의 물음에 나는 요정이라 맨발이 낫다. 대....지의 기운을 느끼려고. 란 대답을 해 주었다. 그걸 또 믿는 듯 눈을 반짝이며 그렇구나! 하고 대답하는 너에게 결국은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몇 살이지?”


“열세 살!”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해주는 너는. 몇 살 때 까지 순수했을까. 어쩐지 다시 원래 시간으로 돌아가면 너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생겨 버렸다.


릭은 내 신발을 보물단지를 안듯 옷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 들고는 2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무로 만든 계단은 가끔 이 집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삐걱거리는 소리가 가끔 울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면서 계단 벽면에 붙어있는 릭의 훨씬 더 어릴 적 사진에 시선을 주었다. 생일 파티, 상장을 받은 날. 무릎에서 피가 흘러내리는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웃는 모습을 보니. 


“...릭같은 아이가 한 명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이라는 생각이 든다. 계단 벽면을 살펴보며 2층으로 올라가자 2개의 방 중 왼쪽에 있는 방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에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며 손 한 뼘 정도만 열려 있는 방문의 문을 열어 속을 들여다보니 장난감 상자 속으로 신발을 숨기며 그 위로 장난감을 억지로 올려 두는 네 모습이 보인다. 아이의 방치고는 벽에 지도가 많이 붙어 있었다. 천장에는 달 모양과 별모양을 본떠 만든 유리 모빌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이따금 제자리에서 느릿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침대 또한 아이가 눕기에는 어른 한 명이 거뜬하게 누워도 상관없을 만큼 치수가 제법 컸다. 


“네 방이 맞나?”


“네. 원래는 손님용 방이었는데, 제가 크게 되면서 이 방을 주셨어요. 침대 새로 사주신다 했는데 저는 저 침대가 좋아서 그냥 저거 쓰고 있어요.”


여기서 뛰면 엄청나게 높이 뛸 수 있거든요! 배고픔은 벌써 잊어버렸는지 신발을 숨기고 나서 바로 침대 위로 뛰어들어 풀썩거리며 뛰는 것에 미간을 좁혔다.


“품위 없게 굴지 마라.”


“품위가 뭐에요?”


“......”


예의있게 굴라는 거다. 라고 대답해 주니 넌 또 예의가 무엇이냐 물어보았다. 아이에게는 아직 어려운 단어는 무리인가. 내 어릴 적 모습과는 너무 다른 환경과 교육 수준에 혀를 차며 ‘정신없이 뛰어다니지 말라는 거다.’ 라고 풀어서 설명해 주자 그제야 침대에 털썩 앉는다.


좋아. 잘했다. 릭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자 또 기분이 좋은 듯, 볼을 붉히며 웃는 것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나도 나도. 아이는 거울과도 같아서, 내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해 보겠다는 듯 침대 위에 서서 내 얼굴을 붙잡고는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른다. 


“......”


릭과 내 사이에 아기가 생길 수는 없겠지만. 아이가 생긴다면 이런 기분일까. 나보다 시선이 높아진 너를 올려다보자 또 눈을 휘며 웃는다. 어른이 되어버린 너를 보는 것과, 아이 시절의 너를 보는 것은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어딘가 아이의 너는 감싸주고, 아껴주어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으니까. 몸을 일으켜 너를 다시 품에 안고는 벽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세계 지도를 살펴보았다. 어딜 가고 싶은지 고민한 듯, 크레파스로 동그라미를 친 지역이 여러 곳이 보였다.


“다른 나라에 관심이 있나 보군.”


네. 저는 다른 나라에 가서, 이런저런 사람들도 만나보고 싶어요!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여러 나라를 가보고 싶어요. 갈 수 있을까요? 너는 지도에 그려진 크레파스 흔적을 쳐다보며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나는 릭의 볼에 입을 맞추며 이야기해 주었다.


“분명 너는 훨씬 더 훌륭한 여행자가 되겠지.”


“요정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난 요정이니까. 모르는 것이 없어. 그렇게만 대답해 주며 나는 오스트리아에 붉게 동그라미가 칠해진 것을 쳐다보았다. 네가 13살이라면 지금의 나는 고작 해 봐야 이제 막말을 때기 시작하고 뛰어다니는 아기 수준일 테지. 나이 7살 차이가 이렇게 느껴지는 것에 미간을 좁혔다. 지금에 와서야 별로 차이가 느껴지지 않지만, 네가 대학생 정도였을 때 나는 지금의 네 나이 일 테니까. 


“와. 그....럼요....”


어딘가 고민을 하는 듯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꼬며 우물쭈물하는 행동에 시선을 주자 네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정말 엉뚱한 질문이었다.


“미래의 저는요... 혹시 소피아랑! 결혼할까요?”


“아니.”


나는 철저하게 미래를 짓밟아 주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소피아가 도대체 누구인지, 짜증이 밀려 오는 것에 너를 내려 주려 하자 냉큼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 새끼 원숭이 마냥 매달려 다리로 내 허리를 꽉 끌어안고는 내려오지 않는다.


“왜요!?”


미래의 너는 이미 나랑 살게 되어 있어. 정 원한다면 결혼도 해버릴 테니까, 그 소피안지 소파인지 뭔지 하는 애는 포기하지그래. 머릿속의 말을 내뱉지 못하는 것이 어지간히 안타까울 뿐이었다. 적당히 ‘그 정도 미래까지는 몰라.’ 라고 대답을 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너는 어딘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시무룩해져 내 허리에 둘렀던 다리의 힘을 풀어버렸다. 덕분에 순식간에 목으로 체중이 쏠리는 것에 서둘러 네 엉덩이를 다시 팔로 받쳐 주었다. 


"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랑 평생 살고 싶었는데.“


“평생까지는 몰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랑은 살게 되어 있다.”


[벨져.]


틈만 나면, 나에게 그 낯간지러운 말을 서슴없이 하는, 지금쯤 이제 잠에서 일어났을 것 같은 네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어린 릭은 아까보다는 좀 더 기분이 풀어진 표정으로 환하게 웃어 보이며 ‘그럼 아이는 몇 명정도 있을까요?’ 하고 물어보는 것에 나도 같이 따라 올라간 입꼬리를 다시 내려버렸다.


“...몇명이 좋은지는 네 노력에 따라 달렸지.”


아마 평생 없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9명이요!”



어릴 적의 너는 어딘가 나와 잘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왜 하필 9명이지?”


“저는 형제도 없고, 혼자라서 친구들이랑 놀아야 하는데 친구들이랑은 이야기가 안 통해서요. 나랑 좋아하는 게 틀려요.”


달라요겠지.


“그러니까 제 아들이랑 딸은 혼자 놀지 않도록 형이랑, 오빠랑, 동생이랑. 많이 만들어 줄 거에요!”


그래. 노력해보지. 때마침 주말이니까. 질리도록 하면 될지도 몰라. 나의 말에 릭은 웃으면서 아마 마법이라도 부려서 어떻게든 해주겠다는 것으로 안 것인지 크게 입까지 벌리고 웃으며 ‘요정님 최고!’를 외치며 내 입술에 입을 맞춘다.


릭 허리가 오늘 아마 반으로 접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기 새가 쪽쪽 거리며 입을 맞추는 것을 가만히 즐겼다. 이것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마 여기서 조금 더 오래 있다면, 네가 커가는 과정을 지켜 보는 것도 꽤 즐거울 것 같았다.


“요정님. 저 배고파요.”


다시금 아이의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에 한숨을 쉬며 릭을 안고는 아까 1층에서 보았던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냉장고에는 재료는 많았지만, 남은 음식은 눈 씻고 찾아봐도 전혀 없는 것에, 주린 배를 움켜잡고 식탁 위에 엎어져 있는 릭에게 시선을 주었다. 배고파 를 연신 외치는 릭에게 ‘샌드위치 정도면 괜찮나?’ 라고 대답을 하자 화색을 띠며 ‘샌드위치 최고!’라고 말하며 엄지손을 치켜드는 행동에 햄과 양배추를 꺼냈다. 납작한 펜에 찬장을 뒤적거려 찾은 오일을 두르고 달걀을 하나 깨서 풀자, 기름에 바로 탁탁 튀기는 소리와 함께 빠른 속도로 프라이가 익어간다. 


“반숙이 좋은가?”


“반숙은 뭐에요?”


.....그냥 주는 대로 먹는 게 좋겠군. 나의 말에 릭은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 의자에 앉은 체 다리를 흔들거리며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유도 필요할 것 같아, 아이가 먹기 좋게끔 다른 가스레인지 위에 물을 담은 냄비를 올려 불을 켜고는, 냄비보다 높이가 5㎝ 정도 더 긴 그릇 하나에 우유를 따라 중탕을 시켰다. 릭의 집에서 한참 생활한 적이 있다 보니 이제는 샌드위치 정도는 금방 만들 수 있는 것에, 햄까지 완벽하게 굽고 빵 위에 양배추와 반숙 프라이를 같이 얹어 주고는 접시 위에 내 주자 온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손씻고 와서 먹어라.”


반숙이라 노른자가 터질 때 뜨거울지도 몰라, 온도도 식힐 겸 손을 씻고 오라 하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으로 식탁의 모서리를 밀자,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릭이 의자에서 털썩 내려와 나에게 달려온다. 내 허리를 끌어안는 행동에 다 데워진 우유를 중탕하던 냄비의 불을 끄고 릭을 내려다보자 이쪽으로 고개를 숙여 보라는 듯 손짓을 하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손짓을 따라 허리를 숙이니 또 입술 위로 릭이 입을 맞춰 온다.


“금방 씻고 올게요!”


화장실로 가려는 듯 총총거리며 뛰어가는 너를 보고 나는 요즘 들어 릭이 자꾸 부쩍 늘어났다는 웃음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


“허뜨뜨.”


“...식혀줄까.”


“아혀,아혀. 이 거먼 돼 허여.”


아직도 조금 뜨거운 듯 허- 거리면서 샌드위치를 먹는 네 모습에 내가 하는 일은 먼저 다 먹어버린 내 몫의 샌드위치 접시를 치우고 익숙하지 않은 설거지를 한 뒤 내 앞에 앉아서 입가에 묻는 빵 부스러기를 이따금 털어 내는 것 뿐이었다.


“식사는, 대충 친구 집에서 했다고 둘러대도록.”


“네네.”


고개를 끄덕거리며 우유가 든 투명한 유리컵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시자, 눈까지 감으면서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는 것에 헛웃음을 지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호들갑은 심했군. 우유 자국이 입술 근처에 묻은 것을 혀로 핥으며 다시 오물거리며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켜 보고 있자니, 어느새 릭은 식사를 다 마치고 샌드위치 하나로도 충분히 배가 부른지 약간 볼록해진 듯한 배를 통통거렸다.


“맛있다.”


“다 먹었나?”


“네!”


배가 차서 기운이 돌아 온 것인지 씩씩하게 대답하는 릭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먼저 방으로 올라가라며 이야기를 한 뒤 남은 접시까지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야 릭의 방으로 따라 올라갔다. 그 세 졸린 것인지 눈이 감겼다가 떠졌다가 하며 침대 위에 비스듬하게 누워 책을 보는 네 모습에 혀를 찼다.


“졸리면 그냥 자.”


“요정님 갈 거면서.”


나른한 아이의 목소리. 눈까지 비비며 문에 기대 있는 나를 쳐다보는 릭의 모습에 팔짱을 끼고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켜 릭의 침대 옆, 모서리에 걸터앉자, 이쪽을 보고 졸린 얼굴로 하품까지 하지만. 끝끝내 웃어 보인다. 그런 릭의 이마 위로 입을 맞추자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는 졸려 오는 수마에 결국 눈을 뜨지 못한 채 웅얼거리는 목소리로만 겨우 이야기하는 릭. 


“안- 갈, 거지요?”


“...그래.”


다행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주 깊은 잠에 빠진 릭의 머리카락을 몇 번 쓸어 올려 주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가 말하는 부모가 올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슬슬 갈 준비를 해야 하나 하는 찰나에 아이가 이빨 요정 운운하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베개 밑으로 손을 더듬거렸다. 무언가 자그마한 가죽 주머니가 잡히는 것에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내니, 붉은 가죽 주머니에 무언가 자그마한 것이 들어 있는 듯 볼록하게 밑부분이 솟아 있다.


“......”


가죽 주머니를 바지 안에 넣고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지 않은 체 뭔가 두고 갈 만한 것이 없나 찾아보지만. 주머니에 잡히는 거라곤 지폐 몇 장과 동전. 그리고 손수건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손수건 속에 , 지폐의 그림이 바뀌었을 것 같은 생각을 끝으로 동전 몇 개를 싸서 베개 밑에 숨겨 두었다. 그리고 잘 자는 네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이불을 덮어 주는 찰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2층으로 뛰어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신 나는 남자의 콧노래 소리. 릭의 아버지인가.


당장 자리를 피하려 해 보지만, 창문은 성인이 빠져나가기에는 너무 좁았다. 침대 밑은 먼지투성이일 것 같고. 방안에 시선을 두고는 침착하게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는 찰나, 옷장이 눈에 보인다. 서둘러 옷장 안을 확인하니, 옷을 비집고 들어가면 적당히 숨을 수 있을 것 같아 서둘러 옷장 안으로 몸을 숨기고는 문을 닫았다. 옷장 사이로 촘촘히 새겨진 문양 덕분에 숨구멍과 밖을 쳐다볼 수 있는 구조가 되는 것도 안심이고. 몇 초 안가 릭의 방문이 열리고 릭 보다는 어딘가 더 순해 보이는 인상의 안경 쓴 남자가 릭의 상태를 확인한다.


“어머. 릭이 자나 봐요?”


문 밖에서 들려 오는 여자의 목소리. 남자는 거기에 ‘응. 릭이 자고 있어.’ 하고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맞춰준다. ‘이왕 애 자는 김에 옷장 속에 빨랫거리 좀 빼 올래요, 여보? 여름이라서 매일 빨아야 하니까. 애 옷도 갈아입혀 주고요.’ 그렇게 말을 마치며 내려가는 여자의 목소리에 남자는 침대 쪽으로 숙였던 허리를 일으켜 ‘응, 알았어.’하고 대답하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


이제는 정말 방법이 없나. 남자가 이쪽을 향해 걸어 오는 것에 서둘러 손에 차고 있던 시계의 바늘을 역으로 회전시켰다. 정확하게 12시를 가리킬 수 있도록. 급한 마음을 아는 것인지, 재빠르게 열리는 그 어두 컴컴한 게이트. 옷장 뒤쪽으로 열리는 그 검은 공간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이동하는 내내, 그 짧은 몇 초 사이에도 나는 사이로 비치는 침대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



응접실에 다시 도착하자마자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11시.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는 무렵. 네가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시간. 응접실을 나오자마자 마주한 하녀가 내 허전한 발을 보고 신발을 가져다주는 것을 신자 마자, 서둘러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늦게 일어난 듯 이제 막 옷을 갈아입고 있었던 건지 셔츠 윗단추에 손을 올리고 있던 너와 눈을 마주했다.


“...벨져? 오늘 어디 갔다 온다더니. 벌써 다녀 온 것이오?”


릭이 가만히 웃으며 이쪽을 향해 걸어 오는 것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어렸을 때의 너와 무언가 겹쳐 보이기 시작하자, 걸어오던 너를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먼저 나서서 릭의 팔목을 붙잡고 침대로 릭을 다시 끌고 갔다. 물론, 이제는 성인이 되어버린 네 완력은 완강히 버티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왜..왜이래! 벨져! 무슨!”


절대 끌려가지 않겠다는 듯 바닥에 이제는 앉아버린 너를 내려 보다가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들어 올리고는 바둥거리는 릭을 침대로 던지듯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타자 잔뜩 빨갛게 익어버린 릭의 얼굴이 보인다. 이쪽을 주시하는 녹색 눈빛은 어릴 적 보다 조금 더 진해 보였다. 어딘가 잘 익은 올리브 열매와도 비슷해 보이는 릭의 눈에 입을 맞추자 릭이 놀라서 눈을 감아버린다.


“벨져, 도대체 왜 이러는지 말 좀-!”


“릭. 몇 살 때 까지 산타니, 요정이니 하는 것을 믿었지?”


미간과 눈을 잔뜩 찌푸린체 가볍게 몸을 떨던 릭은 내 물음에 눈을 희미하게 떴다. 그저 위에서 릭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리도 표정을 천천히 풀고서 나를 주시하는 것에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산타, 요정. 언제까지 믿고 있었나? 


“그런 걸 왜 물어보는지부터 물어보면 안될까, 벨져?”


도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진 모르겠지만. 이왕이면, 침대 말고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편도 좋-. 대답해라. 릭의 말을 잘라 버리고는 완강하게 이쪽을 밀어내려는 릭의 양팔까지 양손으로 잡아 눌러서야 릭은 입을 열었다.


“...듣고 웃지나 마시오. ...산타는 정확하게 15살, 크리스마스 때 조용히 내 머리맡의 큰 양말에 선물을 욱여넣으려던 아버지를 보고 완전히 충격받았고... 이빨 요정은.....”


릭은 말끝을 흐리더니 무언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듯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어딘가 생각을 해 보려는 듯 눈을 굴리며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어렵게 입을 다시 열기 시작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믿었던 것 같은데.”


“...고등학교때까지 그런 걸 믿고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하군.”


그렇지만 요정은 분명히 있을지도 몰라, 벨져. 우리도 존재하잖아? 요정 같은 재주를 부리는 당신과 내가 있는데. 요정이 없을 이유도 없지. 릭이 웃으며 이야기하는것에 그의 입술로 입을 맞추었다. 어릴 때의 릴과는 다른 체향. 다른 피부의 촉감과 입술의 느낌이 와 닿는다.


“...벨져, 밖에서 무슨 일 있었지?”


“아니, 별일 없었다. 그냥 물어본 것뿐이야.”


그래도 역시 요정을 믿는 것은 조금 한심한데. 릭에게 약간은 비웃음이 담긴 표정으로 말을 건네니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이쪽을 보며 입술을 삐죽거리며 ‘증거가 있으니까 그렇지.’하고 대답을 한다.


“증거?”


그래, 증거. 릭이 팔을 쓰려는 듯, 나에게 붙잡힌 손을 꿈지럭 꺼리는 것에 릭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풀어주자, 릭이 허공에 게이트를 열어 무언가를 찾는 듯 뒤적거린다. 이내 찾던 것이 잡힌 것인지 화색을 하며 꺼낸 것은 조금 커다란 낡은 종이 상자.


“...이게 뭔데?”


“요정의 신발.”


릭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에 불현듯, 무언가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자세를 고쳐 침대에 앉아 상자를 열어보는 릭의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것은, 어릴 적 네가 내 신발을 품에 안고 2층으로 올라가려던 그 모습과 닮아 있었다.


“엄청나게 낡았지? 20년이나 지났으니까.”


내가 신고 놀아보기도 했고. 일종의 내 부적이오.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신발은 정말 낡아 있었다. 신고 갔을 때만 해도 새로 맞춘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신발은 아주 허름하게 변해 있었고, 색도 어딘가 조금 바래져 있었다.


“.......”


상자 속에서 신발을 꺼낸 릭은 자기가 한번 신어보려는 건지 슬리퍼를 벗고, 낡은 구두 속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어딘가 헐렁한 것이 릭에게는 아무래도 조금 큰 것 같았다. 당연하지. 그건...


“그게 요정의 신발이라고?”


그렇소. 조금 큰데. 요정이니까 아무래도 발이 컸나 봐. 일반인이랑 다른 거겠지? 요정은 보통 여자인데, 그 요정은 머리도 하얗게 반짝거렸고. 키도 엄청나게 컸고, 예뻤거든. 릭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왜 그것을 요정이라 단정 짓는 것인지 궁금해 져 버렸다.


“왜 그게 요정이라 생각했지?”


“응? 그거야 당연히 머리가 하얀색이니까. 이는 하얗잖소. 그러니까 이빨요정.”


너의 대답은 내가 생각한 답보다 훨씬 더 멍청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


한참 추억 팔 이를 하던 릭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다시 신발을 벗고 무언가 떠오른 듯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왜 그런 것을 물어 본 것이오?”


“......”


자리에서 일어나 신고 있던 구두를 벗고, 릭이 벗어놓은 신발에 하나하나 발을 끼워가며 말을 했다.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구두. 맞춤이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도 맞지 않을 구두 한쪽이 정확하게 내 발에 맞게 들어가자 릭의 눈이 커지며 구두를 신은 내 발을 뚫어지라 쳐다본다. 


“갑자기.”


다른쪽 발에도 마저 발을 끼워 넣었다. 낡은 구두라 그런지 어딘가 허술한 느낌이 드는 구두의 앞 축을 바닥에 두어 번 두드리며 발을 끼워 넣자 릭이 입을 다물지를 못하고 이쪽을 천천히 올려다본다.


“너랑 똑 닮은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말이다. 아이일 때 너는 어땠을까.”


“...아니, 이게 어떻게...”


“릭. 9명이 좋겠지?”


내 말에 릭은 못들을 것이라도 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벨져. 당신 혹시...’ 이쪽을 쳐다보고 말을 잇지도 못하고 복잡해 보이는 시선에, 기회는 지금밖에 없을 것 같아 릭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쳤다. 침대 위에 누워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시선은 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아기는 혼자서는 외롭잖아.”


“...정말 당신은.”


종잡을수 없는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우연이겠지 벨져? 릭의 물음에 나는 침대 옆에 달려 있던 끈을 잡아당겼다. 당기자마자 천 흘러내리는 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휘장이 내려 오는 것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인생은 우연이 모여서 만드는 거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