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벨져릭 입니다.
* 또 사전에 면전이 없는 설정..(이젠 하도 써서 지겹다 지겨워)
(2015년 11월 26일 12:26분 오타 1차 수정)
첫눈이다. 그러나 감흥은 없었다. 눈이란 것은 그저 물방울이 차갑게 식어 얼음 알갱이가 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첫눈에 신이 난 아이들은 뭣도 모르고 입을 잔뜩 벌리며 첫눈을 먹어보려 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연인들은 들뜬 느낌으로 재잘거리며 이야기하기 바쁘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우두커니 벤치에 앉아서 거리의 풍경을 보니 오늘 있었던 일이 생각나 버렸다. 오늘 임무는 아주 간단했으나, 매우 까다롭고 번거로웠다. 사이퍼와 관련된 조직들은 항상 그런 일에 날 어떻게 아는 것인지 잘도 찾아서 의뢰하곤 한다. 그럼 의례적으로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됐지. 이제 한동안 찾지 마시오.”
늘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아왔고, 이런 말 덕분인지 몰라도 혼자 있는 것이 좋았다. 여행을 혼자 가는 것이 좋았고, 혼자서 식사 하는 것도 이젠 익숙해 졌다. 그래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 한자리가 실려 오는 게 느껴진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저기.”
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렸다. 제법 귀엽게 생긴 아가씨가 성의를 가득 담아 따듯한 커피 한잔을 내밀고 있었다. 제법 오랫동안 서서 부를지 말지 고민했던 건지, 양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까부터 혼자서 계시길래.”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여자를 뒤로 한 체 앞을 보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담스러웠다, 저런 호의는. 발걸음이 멀어질수록 여자의 향수 냄새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귀여운 얼굴과 맞는 복숭아 향기. 한참을 어둑한 골목길을 향해 걸어가며 여자의 향이 완전히 사라질 때 즈음이 되어서야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호감을 가지라면 가질 수 있고, 아까도 기분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감정에 익숙하지 않았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그것이 정말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가질 수 있는 감정일까? 늘 이런 의문점을 가지고 살아왔던 터라 좀처럼 누군가의 호의가 부담스러웠다. 특히 저렇게 대놓고 좋다는 식으로 다가오는 호의는 더 두려울 뿐이었다. 괜히 심심풀이로 건드려 보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만 가득하지 좀처럼 긍정적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는 운명적인 사랑이란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내 기준의 사랑 정도는 있다. 운명은 잘 모르겠지만, 눈만 마주해도 좋고, 얼굴만 보아도 좋은 것. 가끔은 지쳤을 때 조용히 위로 아닌 위로로 날 달래 줄 수 있는 사람. 걷는 것을 좋아하고, 점잖은 사람. 그런 조건을 갖춘 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기준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어디 요리도 아니고 내 입맛에 맞는 사람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을까.
픽하고 웃어버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골목길에서는 발걸음 하나를 옮기면 옮길수록 낡은 가로등이 하나씩 켜져 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을 더디면 왼쪽의 가로등이. 다음 걸음을 더디면 오른쪽의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마치 피아노를 치는 듯한 기분.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둑한 거리는 점점 밝아져 가기 시작한다. 가로등이라. 그러고 보니 한번 사귀어 보았던 여자가 분명 헤어지기 전 가로등 밑에서 나에게 무어라 했던 것 같다. 그 여자도 그렇게 호감이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귀자길래 사귄 것인데. 그때 뭐라 했더라.
“형, 그만 가자니까!”
“넌 가만히 있어라. 내가 왜 가야 하지? 잘못은 저놈이 저질렀는데.”
큰 대로변으로 나오기 전부터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린다. 어디 동내 양아치들이 싸움이라도 붙었나, 역시 이렇게 고민이 많을 때에는 싸움 구경이 제일이다. 고민은 접어두고 큰 소리가 나는 곳으로 서둘러 달려가 보았다. 이미 시끌벅적한 거리 한복판에서는 당사자들을 둘러싼 구경꾼들이 저마다 입을 모아서 사건에 대해 추리를 하고 있었다. ‘ 술 취한 사람이 갑자기 저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었다는데?’에서부터 ‘저 귀족이 술 취한 저 사람을 밀친 거 아닐까.’ 까지. 팽팽한 공방이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 갔지만, 척 봐도. 술 취한 사람이 먼저 부딪힌 것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귀족 나리랑 싸움 붙은 거였군.”
술에 만취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표정은 없으나 ‘나 지금 매우 짜증이 난다.’라고 눈에 다 쓰여 있는 한 남자를 그 옆에 말총머리 총각이 뜯어말리고 있었다. 어째 남자치고는 둘 다 머리카락 길이가 엄청나다. 싸움에 흥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저기 서 있는 두 귀족의 모습을 뜯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둘 다 잘 생겼다는 축에 드는데 벽색 눈을 가진 저 청년은 여자 여럿 울리게 생긴 외모였다.
“너어 내과 누구인쥬르 알고 이렇게 대하는 고아!!! 엉?!”
“하. 네놈 주둥이부터 제대로 손봐주는 게 좋겠군. 다행인 줄 알아라. 검이 있었으면 진작에 네 주둥이와 얼굴은 분리되어 떠돌아다니고 있을 테니까.”
“혀엉!”
아, 그만 가자고! 저런 주정뱅이 상대할 필요 없다니깐! 억지로 말총머리 총각이 뜯어말리자 그제야 옷 매무새를 다시 추스른 미인은 지긋이 그 주정꾼을 향해 시선을 준 뒤 이내 발을 돌려 가던 길을 마저 가기 시작했다. 구경꾼들도 별거 아니었다는 듯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하며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뭐야. 벌써 끝난 건가. 귀족이었지만 제법 잘 싸울 것 같이 생겼는데. 혼자 그 구경 판에 남아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그 술 취한 주정뱅이를 쳐다보고 있자니, 주정뱅이도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며 딸꾹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시시하긴.
나도 다시 집에나 가야겠다. 골목길만 돌아가면 우리 집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내 딛으려는 찰라 섬뜩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순수한 살기. 주정뱅이가 뒤뚱거리며 귀족들이 사라진 쪽으로 무언가를 든체 쫓아가는 것이 보였다. 주머니에 숨긴다고 숨긴 거겠지만, 칼이었다. 언 듯 빛나는 그것은 잭 나이프 정도 수준의 단도.
“...... 위험해.”
듣자하니 아까 그 귀족들 검 좀 다룬다 한들 무기도 없는데 그 둘이 이길 수 있을까에 서 부터 제발 집에 들어가 있어라, 온갖 생각들을 하며 서둘러 주정뱅이의 뒤를 쫓자 아니나 다를까, 느릿한 걸음걸이로 서로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는 두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거리에 주정뱅이가 전속력을 다해서 두 사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취한 사람이 저렇게 빨라?”
가뜩이나 체력 부족인데. 헉헉거리면서 쫓아 가 보지만 거리만 더 멀어질 뿐이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둑한 새벽길에는, 특히 이런 골목길에는 사람이 없는 걸 제대로 확인하고 나서 저 멀리 남자가 두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과 남자의 사이에서 남은 거리는 1m. 순간적으로 두 사람을 이동시키면 된다.
조금만. 주정뱅이가 한 걸음을 내딛고,
조금만 더! 주정뱅이가 온전히 체중을 실은 체 더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주정뱅이가 이제는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야 아아- 하고 대놓고 달리는 것을 신호로 게이트를 열었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열린 게이트로 이동해 앞만 보며 걸어가다가 뒤에서 고함이 나고 나서야 뒤를 느긋하게 돌아보는 두 사람 앞으로 게이트를 열고 서둘러 두 사람의 목덜미를 잡은 체 게이트 안으로 던져 넣었다.
“뭐야!”
“이게 무-.”
완전히 앞까지 따라온 주정꾼. 그리고 뒤따라 나도 게이트로 들어가려는 순간, 푹 소리와 함께 서늘한 느낌이 배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어서 몰려오는 엄청나게난 고통. 옆구리를 쳐다보자 활짝 찢어진 코트 사이로 붉은 피가 잔뜩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어.......”
남자도 당황한 것인지 쨍그랑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검을 떨어트리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이내 술이 다 깨어버린 것인지 잔뜩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 피가 조금 스쳐 드문드문 피가 묻은 자기 손을 자꾸 어어 - 하며 쳐다본다.
“나... 난 모르는 일이야!”
모르긴 뭘 모른단 건지. 아 이젠 서 있지도 못하겠다. 과다 출혈로 죽기도 한다는데. 그때가 되면 온몸이 서늘해진다고들 소문으로 말해주기도 하던데 이게 그런 느낌인가. 그냥 게이트 쓰지 말고 소리 지를걸. 뒤를 보라고. 점점 비틀거리며 흐려져 가는 시선 너머로 두 사람이 용 캐도 자기들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파악한 것인지 내 쪽으로 뛰어 오는 게 보인다. 게이트는 이미 찔리자마자 사라져 버렸으니까. 분명 몸이 쓰러져 가는데,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인다.
차갑다. 쿵- 하고 머리가 바닥에 조금 거칠게 떨어지고 몸이 주체를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차가운 돌로 만들어진 바닥에서 습한 향기가 나고, 겨울 덕분에 싸늘한 돌의 냉기가 느껴졌다.
아, 그래 기억났다.
내 전 연인은 분명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넌 정말 사랑받을 줄 모르는 외로운 사람이구나.”
*
전 연인은 매우 다정다감했다. 그러나 그만큼 애정을 요구했다. 나는 그렇게 신체접촉을 좋아하지 않았다. 손잡는 것도 그렇고, 입 맞추는 것도 그렇고. 그럴 생각이 안 든 것도 문제지만. 누군가의 살리 내 몸에 닿는 것을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해도 꺼렸다.
‘릭. 날 좋아하긴 하는 거야?’
난 그 대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말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니’라 대답하려 했으니까.
그렇게 되면, 날 사랑해 준 너에게 정말 미안해 져서.
사랑이란 감정을 전혀 모르는 나에게 사랑을 주려 노력한 네 모습이 안쓰러워져서. 그러나 오히려 그 소리 없던 침묵은 그녀에게 더 확실한 답을 주어버렸다. 그녀는 울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를 달래줄 용기도. 그럴 필요도. 이젠 없었다.
그녀의 울음 속에선 무언가 읽혀 버렸으니까.
우리는 이제 끝이라고. 그때 처음으로 그녀가 내 얼굴을 만지는 것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 최고의 사죄였으니까.
.... 그렇지만 너무 만지잖아. 그만 만져. 그녀의 손길을 피해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집요하게 따라붙는 손길은 도저히 이마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만 때.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웅얼거리듯 힘겹게 말해 보았지만, 비웃음만 들려온다.
그녀가 이렇게 웃을 줄 알았던가?
아. 가만히 있으려니 차가운 얼굴에 닿는 그 온기가 제법 따듯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확실히 좋은 것 같다. 너무 부드럽지 않은 손길. 적당히 거칠지만, 단단한 손길. 가끔가다 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 좋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 손에 얼굴을 더 밀착시키려 끙끙거렸다. 그러자 또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살짝 웃던 입을 천천히 열며 말했다.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지.”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서 아주 낮고 더 낮은 남자의 미성이 들리는 장면에서 눈을 번쩍 떠버렸다.
“바로 눈을 뜨는 걸 보면 멀쩡하긴 멀쩡한가 보군.”
여전히 이마에 올린 손을 걷어내지 않은 그의 뒤로 비치는 햇빛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미간을 찌푸리고 힘겹게 입만 우물거리며 햇빛 좀, 이라 말하는 것을 용캐 알아들었는지 그는 선선히 일어나서 커튼을 쳤다. 그제야 확연히 드러나는 얼굴.
“몸은 어떻지?”
몸? 아. 그러고 보니 다쳤구나. 여긴 어디지. 어디 호텔 같은 곳인가. 엄청나게나게 넓다. 일단 일어나서 이야기 하는 게 예의니까. 몸을 서둘러 일으키자마자 뭔가 옆구리에서 툭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다시 밀려오는 고통.
“.......”
“아으-.”
“일부러 그러는 건가. 몸이 어떠냐고 물어보았을 뿐. 다시 상처를 벌어지게 하는 취미가 있을 줄 몰랐는데.”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다시 눕혀 놓고는 이불을 확 걷어 내었다. 당혹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아픈 옆구리를 한쪽 손으로 부여잡자 두툼하게 감싸진 붕대가 느껴진다. 일단 붕대는 붕대고. 이불을 다른 손으로 꼭 쥔 채 요지부동하니 그가 한쪽 눈썹을 올린다. 뭐하는 짓인지 물어보는 눈치.
“몸이...”
“당신 치료는 내가 했다. 그 새벽이 다 되어가는 거리에 어느 의사가 안 자고 버티겠느냐 만은. 주치의도 마침 출장 중이라 내가 치료했다만. 이미 볼 건 다 봤는데.”
나쁜놈아. 그걸 이제 말해주면 어떡하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할 뻔했다. 뭔가 재수가 없다. 잘생겼지만 재수 없다. 그냥 좀 부드럽게 이야기해 주면 덧나나. 조심하지, 괜찮으냐, 잠시 상처를 다시 봐주겠다가 정도면 될 텐데.
“당신, 그 성격에 연인은 한 번도 못 사귀어 봤겠지. 좀 다정하게 말할 수는 없소?”
그리고 이놈의 입은 결국 일을 벌렸다. 잔뜩 쉰 목소린데도 유난히 방금 말한 대사는 아주 또랑또랑하게 방안을 울려 퍼지게 했다. 메아리도 들리는 것 같다.
“.......”
“.......”
“그냥 죽게 둘 걸 그랬나.”
진지하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 이불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그에게 조용히 이불을 쥐여주었다. 그의 눈썹이 또 꿈틀거리는 것에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왜 거기서 이놈의 입은 주책이 없어서. 이불이 결국은 한참 있다 걷어지고 맨몸 위로 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천천히 목에서부터 허리로 내려오는 시선이 그대로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실눈을 떴다. 뭘 보는 거야 도대체.
“실눈 뜰 거면 그냥 보는 편이 낫지 않나? 어차피 남자 끼리 인데.”
그말에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하여간 감은 좋아서. 결국은 허리 옆으로 축축하게 피로 물든 붕대를 다시금 풀어내기 시작한 그의 손길에 움찔거렸다. 남 손이 닿는 것은 정말 익숙하지 않은데. 게다가 눈을 감으니 더 생경하게 손이 몸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자꾸만 움찔거리자니 다리 위에 올라탄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연인은 한 번도 못 사귀어 본 몸인 것 같은데.”
비웃는 투로 말하는 그의 언성에 눈을 부릅떴다. 정말 맘 같아서는 한 대 때려주고 싶다.
“너 하는데, 도대체 몇 살이길래 말을 그렇게 편하게 놓으시는 것인지. 오?”
“나이? 생명의 은인에게 나이를 물어보다니.”
이젠 완전히 가지고 노는 수준이다. 순간적으로 반말까지 튀어나올 뻔 했다. 그는 붕대를 풀어주며 짧게 26. 하고 대답하였다. 나보다 7살이나 어리네. 그렇게 말하니 그가 정말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본다. 생각보다 동안이라 놀란 거겠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20대 중반 정도인 줄 아니까.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그는 다시 붕대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한겹한겹 풀릴수록 복부를 압박하는 느낌이 사라지며 온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살짝 부르르 떨자 그가 붕대를 푸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가 이내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붕대를 풀어내 버렸다. 완전히 붉게 옆구리가 피 얼룩이 되어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니 더 아파지기 시작한다.
“아파. 그리고 여긴 도대체 어디오?”
“내 자택이다. 가만히 있어라. 움직이면 붕대가 엉성하게 감겨.”
그는 능숙하게 붕대를 걸기 시작했다. 배 위로 선뜻선뜻 스치는 손가락에 몸이 더 움찔거린다. 별것도 아닌데 새삼 얼굴에 열이 오른다.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내 몸으로도 느껴지는데. 그가 붕대를 감아 주고 나서 날 한번 쳐다보다가 심각한 얼굴로 이마를 짚어준다.
“아픈가? 기껏 열을 내려놨는데 다시금 이 지경이 되었다니.”
“아니, 별것 아니오.”
그렇게 말은 하지만, 뜻밖에 그의 손길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남자끼리라서 그런가? 아니면 남자치고는 잘생겨서 그런가? 혹시 나는 원래부터 타고난 게이였기 때문에 여자에 대해서 흥미가 없던 걸까?
“그런 것치곤 얼굴이...”
붉은데 말이야. 그는 옆에 있던 얼음물이 담긴 투명하고 큰 유리그릇에서 수건을 짜내곤 내 이마 위에 올리려 했다. 그러나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 손길을 피했다.
“.......”
“... 미안. 차가운 것까진 괜찮은데 축축한 건 별로...”
그런가. 그는 뜻밖에 수건을 다시 그릇에 담고는 자기의 손을 얼음물에 푹 담그곤 한동안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이내 손을 꺼내 옆에 갖춰져 있던 마른 수건으로 손을 닦아내곤 내 이마 위로 그 손을 얹었다.
“이거면 됐겠지.”
시원해. 부끄러운 것도 그렇고 상처 때문에 그런 것인지 열이 나기는 났나 보다. 기분 좋다. 온기는 아니지만 시원한 냉기가 이마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것에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몸이 안정되는 기분을 받자마자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의식 너머로 그가 내 이름을 물어보는 것 같아서 조용히 ‘릭 톰슨.’ 하고 대답해 주고는 수마에 몸을 맡겨 버렸다.
*
그리고 그런 포근함에 다시 눈을 뜬 것은 새벽이 되어서였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니 다시금 열려 있는 커튼 너머로 달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커다란 방에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달빛에 빛나는 것 또한 장관이었다. 그는 어디 갔지? 이름도 모르는 그를 찾아보았다. 찾는 것에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불편할 텐데도 묵묵히 눈을 감고 자는 것처럼 보이는 그가 있었으니까.
“.......”
조용히 이불을 걷어내었다. 아까처럼 상처가 다시 벌어지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를 안고 다시 침대에 눕혀 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정말 다시는 허리를 쓰지 못할 것 같아 결국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정말 잘생겼는데, 어떻게 나오는 말은 다 독설이지.”
살짝 숙인 고개 덕분에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와 있다. 그의 은발 머리카락을 천천히 손으로 쓸어 올려 주자마자,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느라 눈을 가렸던 내 손이 머리카락을 치움과 동시에 멈추고 말았다. 내 손으로 가려져 안 보였던 그의 눈부분이 손을 치움으로써 어느새 눈을 뜬 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 버린 것.
“.......”
“안 자나.”
방금 막 일어난 거 아닌가? 목소리가 이렇게 멀쩡한 거 보니까 자는 척 했던 거 아니야?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손을 어정쩡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멈춰 있자니 그가 몸을 일으킨다. 덕분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손에 한번 걸리지도 않고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서운함을 느꼈다. 왜일까. 자꾸만 그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 사이를 매만지고 있자니 그가 잠에 잠긴 것인지 더 낮은 음색으로 말을 한다.
“자라.”
“그렇지만, 나 때문에 당신이 불편하게 잘 필요는 없지 않소.”
“어찌 되었든 생명의 은인에게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사실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어서 그 주정뱅이가 달려오는 것을 피하지 않은 건데 말이지. 그렇지만 뭐, 일단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 하단 성의니까. 하고 덧붙여 말하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아무래도 그의 입에서는 좀처럼 칭찬이나 감사의 말은 듣기 어려울 것 같다.
“침대는 넓은데.”
“?”
“침대는 넓다 했소. 아무리 봐도 이건 둘 이상은 자고도 남을 크기잖소.”
“그래서?”
그는 다음 말이 상당히 궁금한 눈치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니 거의 눈높이가 비슷해 그와 눈이 직면하는 위치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 눈은 동공이 좀 더 진한 푸른색이구나. 달빛 때문에 잔잔한 바다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눈꼬리는 좀 올라가서 사나운 인상이긴 하지만, 얼굴 어디에도 사춘기의 여드름 흔적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약간은 도톰하지만 날렵한 입술, 잘 뻗은 콧대. 조각이구나, 완전.
“같이 자도 괜찮다 이거지.”
겨우 입을 열고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런가. 하고 짧게 대답해 주며 침대를 쳐다보았다. 같이 잔다는 게 어색한 것인지 딱히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어색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든 상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본능에 따라 입이 어떻게 해서든 그와 최대한 접촉이 있을법한 방향으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하는 내내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거절하지마.
거절하지 말아 주시오.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보자마자 반하는 사랑이 없다 했나. 분명 내가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릭 톰슨이라 했지.”
아, 내 이름이구나. 그가 이름을 불러 주자마자 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릭 톰슨. 내 이름의 어감이 저렇게 좋았나? 남들이 불러주는 내 이름은 저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아까 소개를 미처 못해서. 벨져 홀든 이다.”
그리고 내밀어 진 그의 투박한 손. 언 듯 보면 가늘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굳은살투성이고 상처투성이인 그의 손. 이 손을 잡으면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 날 것만 같았다. 참 소녀 같은 감성이다 말하고 나 자신을 내가 비웃고 싶었지만,
“아. 그래. 나도 제대로 소개를 못 해서. 릭 톰슨이오.”
맞 닿은 손에서 난 생각했다.
다시는 이 손, 놓고 싶지 않다고.
*
“내가 그렇게 재수 없는 놈으로 찍혔을 줄이야.”
“당신 처음 이미지는 정말 꽝이었지.”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그의 등에 대롱대롱 매달려 그의 어깨 위에 턱을 올리고 웃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신문에 시선을 둔 체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마시고 이따금 내가 하는 말에 웃어 주거나 대꾸해 주는 것이 다였다.
“괜찮지 않소?”
“뭐가 말인가.”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때다 싶어 가볍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마주쳤다. 서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싶더니 맞닿은 입술은 도저히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만. 내가 그를 밀어내도 그가 어느새 완력으로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 버렸다. 그리고는 쉴 새 없이 자꾸만 입술을 맞닿으려 한다.
“진짜 그만.”
신문을 그와 내 입 사이에 끼워 넣자 그가 습관처럼 한쪽 눈썹을 꿈틀거린다. 아, 삐쳤다 삐쳤어.
“사랑할 줄 몰랐던 당신이랑. 사랑받을 줄 몰랐던 나랑.”
입술 사이를 막았던 신문지를 때고 그와 이마를 마주 닿았다.
“괜찮은 조합이잖소.”
“괜찮은 것 맞나?”
그렇게 말하면서 웃지 마시오, 전혀 말이랑 맞지 않는 얼굴이잖소. 그의 콧잔등에 입을 맞춰주자 당연하다는 듯 눈이 감긴다.
“괜찮아.”
지금으로도 아주 행복하니까. 더없이 행복하니까.
“그래서 그 뒤로 어떻게 되었더라. 기억이 잘 안 나는군.”
그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서 신문은 저 멀리 둔치 대화를 나누었다. 조용한 주말 오후에 그와 나누는 대화는 정말 좋았다.
“아픈 척을 했지.”
“저런.”
환하게 웃으면서 그의 비워진 커피잔 위로 커피를 다시 포트에서 따라 주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쳐다보며 당신에게 자꾸만 이마 짚어달라, 머리 쓰다듬어 달라 어리광은 다 피웠던 것 같은데. 하고 말해주자 그는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때 정말,”
“정말?”
“무슨 남자가 이렇게 신체접촉을 좋아하나 생각했는데. 사실 네가 처음 왔을 때 쓰러져서 자는 틈을 타서 자꾸만 이곳저곳 얼굴을 만져 봤거든.”
“당신 정말이지 위험한 사람이었군.”
과장된 행동을 하며 몸을 감싼 체 멀찍이 그에게서 떨어지자 그가 웃으면서 네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시 보고 싶었거든. 그리고 눈이 궁금하니 머리카락도 만져보고 싶고, 얼굴도 만져보고 싶었고. 하고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신다.
“......그거 정말 위험한 거 아닌가.”
“그래도 어찌 되었든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지 않았나.”
더 쓰다듬어 줄까? 그가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에 컵을 손에 쥔 체 웃어버렸다. 그래, 어찌 되었든 지금 여기까지 왔으니까. 딱히 나 혼자만 그때 좋아했던 것이 아니었구나. 그땐 짝사랑인 줄 알았는데. 커피잔에 비치는 얼굴을 쳐다보자 예전과 달리 무뚝뚝하기만 했던 얼굴은 어디 가고 전반적으로 온화해 보이는 얼굴이 자리 잡고 있다. 많이 달라졌구나, 나도. 그도.
“벨져.”
“음?”
“말로 전하면 퇴색될까 두려워 잘 말하진 않지만, 정말로 사랑하고 있소.”
“엄청나게 뜬금없군.”
그는 대답할 필요도 없는 것처럼 신문을 다시 펼쳐 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 알고 있다. 그의 귀 끝이 조금은 붉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내 온기가, 그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자꾸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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