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관이 조금 변경되었습니다.
*벨져와 릭은 바뀐 세계관에서 처음 보는 사이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기존에 장편 소설로 쓰려던 것 중 앞부분이 주제와 겹쳐 공개합니다.
(추후에 이어서 연재 하도록 하겠습니다. 회 수는 정하지 않았습니다.)
[code number, 80. 80. Welcome.]
온 건물마다 울리는 여성의 음성은 너무나 친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였다. 그것은 기계의 음색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그 음성에 익숙한 나머지 그것이 기계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을 뿐.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을 인지할 정도의 여력이 되지 않는 것일 뿐.
삑-.
[code number, 33. Welcome.]
내 이름은 33이다. 그것은 숫자이면서. 내 이름이다. 우리는 과거에 분명 ‘정관사’ 같은 각각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의 세계는 과두화된 산업혁명의 발전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족쇄를 채워버렸다.
이곳은 누구라도 바코드를 달고 있다. 그 위치는 저마다 다르며, 그 모양 또한 가지각색이다. 이러한 모양은 개인의 의사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영속함은 변할 수 없다. 이 나라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 바코드를 관청에서 새겨야 한다. 그래야만 시민권을 얻고, 중요 기관의 게이트를 바코드 인식을 통해 지나칠 수 있게 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예외란 법도 있다. 바코드에 대해 벗어나려는 사람들.
“꺼져! 내 이름은 이런 기계 따위가 부르라고 있는 게 아니라고!”
저잣거리의 깡패 같은 인상을 받은 사람 여럿이 망치나 야구방망이 같은 것을 들고 웬만큼 쳐서는 부서지지 않을 게이트를 고철 덩어리 수준으로 부수고 있다. 당연하듯 깍듯하게 목 뒤를 훤히 들어낸 경찰들이 목에 단 은빛 바코드를 빛내며 그들을 제압하려 달려들자 바코드를 새기지 않은. 혹은 새겼으나 커다랗게 X자 표시로 지워버려 읽히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으며 도망가 버린다.
“요령도 좋군.”
나도 모르게 경찰들을 피하는 그놈들을 보다 피식 웃으며 다시금 서류 가방을 고쳐 쥐고는 커피 한잔을 손에 든 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토니, 그자의 영향력인지 몰라도 사이퍼들은 그 능력을 비밀리에 사용하며 일상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난 언제나 그렇듯, 회사를 출근하며 가끔 도넛을 사 먹는 변함없는 일상에 변함없는. 변화라는 게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오늘은 제법 반 바코드 파라 불리는 그들 덕분에 볼거리 하나는 생겼지만.
툭-.
“아. 실례.”
“...괜찮소.”
부딛힌 어깨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옆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검은 중절모를 눌러쓴 하얀 머리카락의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짙은 연기 향은 담배라도 피는 것인지 몸 구석구석까지 베여있었고, 세미 체스터 코트에서부터 더비 구두 까지, 모든 것이 검은색으로 통일된 색상으로 맞추어져 있었다. 심지어 넥타이까지도. 탭 칼라의 (옷깃) 보기 드문 와이셔츠만 그의 머리카락색만큼 하얗게 보일 뿐이었다.
“.......”
“괜찮은 것 맞나?”
그 앞에. 그의 말에 시선을 따라 내 가슴 쪽을 쳐다보자 흔들린 커피 덕분에 진하게 얼룩이 남은 하얀 와이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옷이 젖는 것도 모르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니.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닦아 보지만, 맑은 물에 검은 잉크 한 방울이 물을 검게 물들이는 것 마냥 이미 물든 셔츠는 닦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그 한번, 셔츠 한번, 그 한번, 셔츠 한번.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시계를 한번 쳐다보았다. 벌써 9시가 넘어가는 시각. 지각이다. 느긋하게 들어가서 어제 부장에게 한창 깨졌던 보고서를 수정하려 했는데.
“괜찮소. 잠시 다시 집에 들러서 바꿔오면 되니까.”
웃으면서 커피를 대충 근처 휴지통에 버리고는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게이트로는 1분. 근처에서 대충 몸을 숨기고 게이트를 열면 되겠지 싶어 고개만 까딱이며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니 가죽 특유의 서늘하고 달라붙는 느낌이 손에서 느껴졌다. 검은색 가죽 장갑이 내 손을 붙들고 앞으로 나가려는 나를 자꾸만 끌어당긴다.
“저기, 이 손 좀...”
“보아하니 출근 중인 것 같은데. 이 근처에 내 집이 있으니. 거기서 셔츠 한 벌을 빌려 가는 게 어떤가.”
“괜찮소. 나도 이 근방인-.”
“성의를 거절할 참인가.”
이보시오. 내 옷을 내가 갈아입겠다는데 성의는 무슨. 결국은 그의 완력에 못 이겨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라니까 금방 가서 셔츠만 빌려서 오면 되겠지 싶어서. 알겠소,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니 그가 무뚝뚝한 표정에서 아주 약간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비추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한걸음, 한걸음이 딱 봐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걸음걸이였다. 잘 펴진 척추 하며. 그런데 좀처럼 바코드가 보이질 않는다.
“.......”
게다가 손도 놓아주질 않는다. 덕분에 사람들의 이목이 잔뜩 이쪽으로 쏠려 민망하기만 할 뿐. 멀리서 봐도 신사인 것을 티 내는 그의 용모와는 달리 아무리 봐도 서류 업무나 할 것 같은 가벼운 셔츠 차림의 나는 너무나 비교되었다. 주눅이 들어 괜스레 그의 손에서 손을 빼내려 하니 그가 더 힘주어 손을 잡아온다.
“저기, 다 괜찮은데 손 좀...”
“아. 마음이 급해서 말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아주 느릿하게 붙잡은 손을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자꾸만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손을 움직이는 것을 쳐다보았다. 불안한 건가. 참으로 특이한 사내인 것 같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앞을 보고 걸어가자니, 딱 봐도 그의 차량처럼 보이는 차가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검은색으로 도배되어 있었으니까.
“타지.”
어느새 기사가 내려 문을 열어주는 것에 난생처음 차를 탈 때 에스코트를 받아 본다 생각하며 차에 몸을 실었다. 속에는 뜻밖에 브라운 계통의 푹신한 시트로 꾸며져 있어 아늑한 기분을 받았다. 밖에서는 차량 안쪽이 안 보였는데, 안에서는 바깥쪽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내 그도 내 옆에 착석하자, 문이 조용히 닫히고는 몇 초 뒤에 기사가 앞좌석에 탑승한다.
“도련님, 어디로 모실까요?”
“저택으로.”
“알겠습니다.”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말을 끝으로 차는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의 바쁜 인파들은 다들 직장인인 듯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그 와중에 가장 여유를 부리는 것 같아 이질감이 느껴진다. 창문 너머로 시선을 한참 주고 있자니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할 말이라도 있소?”
“바코드가 보이지 않는군. 반 바코드 파인가?”
내가 물어볼 말을. 그에게 피식 웃으면서 아니. 보이지 않는 곳에 있소. 내가 아니면 보지 못할 곳. 하고 대답을 해 주니 그가 제법 흥미롭다는 눈으로 시선을 바꾼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바코드가 어디에 있소?”
“내가 아니면 보지 못하는 곳.”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도련님이군. 그게 또 어울려 웃어버리니 그가 갑자기 표정을 확 굳혀 버린다. 기분 상한 건가. 그는 잠시 꼬던 다리를 바꿔 자세만 바꿀 뿐,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미안해져 그에게 미안하다 말하자 그가 아니라며 다시금 시선을 앞으로 준다. 뭔가 고민하는 듯, 아니면 원래 그런 표정인지 앞만 주시하고 있는 그를 보자 내심 안심이 되었다. 이제 좀 신경을 덜 쓰겠지. 기분이 상했으니 더는 귀찮게 시선을 주거나 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말하며 다시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다 차 안에 특이한 보관함 같은 걸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이건 무엇이오?”
“... 와인 캐비닛이다.”
와. 이런 것도 있구나. 신기해서 열어보니 와인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이 보인다. 좋은 와인인지, 나쁜 와인인지 잔뜩 타 국어로 쓰여 있어 알아보기가 힘들다. 주인이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 신기함에 도취해서 와인 한 병을 꺼내 라벨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잔하지.”
“대낮인데?”
“도수는 낮다.”
음료 수준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와인병을 건네받고는 코르크 마개를 능숙하게 뽑아냈다. 뽑자마자 와인 특유의 알코올 향과 포도향이 어울려 차 안을 뒤덮는 것에 기분까지 황홀해 졌다. 와인잔은 또 어디서 났는지, 그가 건네주는 와인잔에 잔뜩 기대하며 잔을 손으로 받치자 그가 배운 티를 내는 것인지 포도주도 능숙하게 따른다. 난 그런 거 모르니까 대충 받으시오, 하고 그에게서 와인병을 건내 그의 흉내를 내며 잔에 와인을 따라주자,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인다.
“와이셔츠를 위하여.”
“미안하군. 고작 그런 건배사를 내뱉게 해서.”
뭐 어떻소. 덕분에 이렇게 좋은 와인도 마셔보는데. 웃으며 그에게 대답하고는 가볍게 잔을 부딪혔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와인잔을 한번 비춰 보고는 냄새도 맡아 보았다. 일반 식당에서는 좀처럼 접할 수 없는 귀한 와인인 건 틀림이 없는 것 같단 생각과 함께 한입 마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나지막이 그를 째려보게 되었다.
“낮다고 했잖-.”
“내 기준에선.”
전혀 독한 향은 나지 않았는데. 도수가 높아서 목을 넘어갈 때 거의 타들어 가는 느낌이 난다. 잔을 그에게 건네려 하자, 머리가 금방 핑한 기분과 함께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도수가 센 술은 정말 최악인데. 결국은 손을 잘못 내밀어 그의 옷과 내 옷 모두 완전히 포도주로 물들기 시작했다.
“.........”
“내 옷을 위해서도 한 번 더 건배 하지 그런가.”
“.......미안하오. 변상하겠,”
“됐다.”
그는 손수건으로 축축하게 젖은 부분을 닦아내고는 내 쪽을 쳐다보았다. 정말 얼룩이란 얼룩은 셔츠에 다 묻어버리는구나. 바지까지 홀딱 포도주로 물들어버렸다. 바지는 검은색이라 다행히 티는 안 났지만, 와인 향이 지독하게 베여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위아래 둘 다 갈아입고 가지.”
“...고맙소.”
여러모로 민폐투성이였던 나는 조용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도착했습니다.”
“내리지.”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가 열어준 문밖으로 몸을 빠져나오자, 청량한 공기가 차 안에 들어온다. 온통 와인 향으로 뒤덮인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겠다며 나도 차에서 나오자마자 메이드들과 집사들이 일제히 늘어서 정확하게 45도 정도의 각도로 몸을 굽혀 인사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제일 앞에 서 있던 노 집사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그의 바로 옆에 비슷한 나이의 메이드와 함께 내게 인사를 건넨다.
“어서 오십시오. 홀든 가에 처음 오시는 분이시로군요.”
노인 치고는 온화하고 건강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잔뜩 더러워진 셔츠를 손으로 가리며 그에게 인사해 보이자 괜찮다며 안내해 주겠다며 먼저 앞장서서 가기 시작한다.
“한나. 이 사람에게 내 옷을 잠시 빌려줘야 할 것 같아. 나도 갈아입어야 할 것 같고.”
이름으로 불렀나 방금? 신기한 기분에 그 한나라는 이름에 반응을 보인 노 메이드에게 시선을 주니 그녀도 부드럽게 미소를 띠며 알겠다며 종종걸음으로 먼저 앞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저택은 정말이지 너무나 컸다. 바깥은 잔뜩 기계화되어 정신이 없는데, 여기만은 중세시대에서 머문 듯 박물관 같은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육중한 문 너머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중앙 홀 위에서 촛불과 함께 빛나는 샹들리에부터, 계단에 정확하게 정 중앙에 깔린 붉은 카펫까지. 어느새 옆에 따라온 젊은 메이드 한 명이 ‘가방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하고 가방을 건네받고는 사라지고, 점점 시중을 받으며 이동할때마다 인간이 산다는 느낌이 나는 이 저택이 제법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좋은 저택이로군.”
“고맙군. 칭찬으로 알겠다.”
그도 나쁘지 않은 듯, 앞서 가는 집사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며 웃어 보였다. 잘생겼긴 정말 잘생겼구나. 그도 메이드 한 명에게 잔뜩 젖은 코트와 탑 햇 (Top hat)을 건내 주곤 셔츠 한 장 차림으로 같이 2층을 올라가고 있었다. 덕분에 몸의 실루엣이 거의 드러나 한걸음 뒤에서 그의 등을 보며 감탄을 했다. 얼굴도 잘생겼는데, 몸도 좋아. 정말 인생 억울하구나. 한참을 그런 잡다한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라 복도를 지나치니 집사가 한 방의 문을 열어준다.
“원하시는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옆에 도련님께서 입으실 옷이 치수가 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치수가 맞지 않다면 밖의 메이드에게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집사는 그 한마디만 남긴 체 거의 방 전체가 옷으로 둘러싸인 드레스 룸에 그와 나만을 남겨두고 문을 닫았다. 메이드에게 몇 가지 지시를 하는 목소리가 문밖으로 들렸지만, 그 이후에는 발걸음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조용해 졌다.
“그럼 벗지.”
“응?”
“벗어라. 그래야 입을 것 아닌가.”
“아니 왜 나만 벗소. 당신도 벗어야지.”
남들이 들으면 충분히 오해할 말이 오가자 그와 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는 눈썹 한쪽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먼저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장갑은 그대로 낀 체. 뭔가 그... 좀 야살스럽다 해야 하나. 장갑 하나 안 벗었을 뿐인데. 그가 셔츠 벗는 장면을 그대로 보고 있자니 맨몸을 그대로 들어낸 그가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본다.
“?”
“벗어라.”
정말 끈질긴 도련님이구나. 그나저나 상의를 탈이 한 그의 몸 어디에도 바코드는 보이지 않는데. 의문을 숨기며 셔츠를 차분히 벗자, 그가 또 특유의 무표정으로 내 몸을 훑어본다.
“........”
“됐지? 이제 만족하시오?”
장난 스럽게 웃으며 그에게 웃어 보인 뒤 아무래도 서둘러 셔츠를 갈아입어야겠다며 드레스 룸을 쭉 둘러보았다.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는 그 종류도 수천 가지라 뭘 입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에게 대충 아무거나 하나 집어서 갈아 입는 것에 대한 허락을 맡으려 하자 등 뒤로 섬뜩하게 차가운 가죽의 느낌이 닿았다.
“날개 뼈에 바코드가 있었군.”
모양은 평범하지만. 그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내 등 뒤의 바코드를 한번 손으로 훑어 내렸다. 맨몸에 서늘하게 닿는 가죽의 느낌이 날개 뼈를 지나쳐 허리 척추를 따라 내려오는 느낌에 몸을 경직시키자 그가 낮게 웃는 목소리가 들린다.
“도대체 당신은.”
“벨져다.”
“응?”
“난, 너희가 아는 그런 코드명으로 불리지 않아. 내 이름은 벨져다.”
그는 덤덤히 자신의 ‘이름’이란걸 말하며 자기에 대해 소개를 했다. 난 뭐라 해야 할까. 좀처럼 말하지 않아서 잊어버렸던 내 진짜 이름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덕분에 그가 등 뒤에서 이상한 짓을 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체.
“...릭 톰슨. 이오.”
그런가. 그는 이름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듯 몸을 돌리고는 자신도 셔츠를 찾으려 이리저리 드레스룸을 둘러본다. 진짜 이 사람한테는 바코드가 .... 엉덩이나 뭐 그런 곳에 있는 건가. 그의 몸을 뚫어져라 살펴보니, 그가 이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뒤를 돌아본다.
“정말 미안한데, 그대야말로 바코드가...”
“아.”
그는 피식 웃으며 내 쪽으로 바싹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어, 하고 주춤주춤 뒤로 몸을 물리자 몇 걸음 못 가 등 뒤로 차가운 유리 느낌이 난다. 벽 한쪽 면을 가득 채운 전신 거울에 등이 닿아버리고 도망칠 곳이 없어지자 그가 가만히 눈을 마주쳐 온다.
“말했잖나.”
그의 푸른 벽안 너머로, 내가 보였다. 그러나 온전한 내 모습이 보이지 않고, 무언가 하얀색으로 얼룩지듯 보이는 내 모습. 뭐지, 하고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점점 하얀색의 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곳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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