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져릭 육아물
-3편 (상,중,하) 로 나누어 지는 소설.
“역시 알프레도가 훨씬 낫다.”
“낫긴 뭐가 낫소. 오히려 히비가 훨씬 낫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기분 좋게 웃는 아이의 얼굴 덕분에 한참을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도 뜻밖에 조용히 아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멀뚱히 쳐다 보는 것에 그의 볼에 입을 맞춰 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마 아이고 뭐고 간에 당장 집을 나섰을 건데. 한참 그렇게 아이의 보드라운 볼에 입을 맞춰주고, 그이의 따듯한 입술에 입을 맞춰주고. 조금 더 행복한 기분으로 보낸 아침은 이내 하나의 관문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아이를 뭐라 불러줘야 할까.
아이야- 하고 불러 주는 것도 좋겠지만. 그는 아이에게 유독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노트에 이름을 새겨 넣는 것 마냥 정성껏 쓰고 싶어 하는 것 같이. 결국, 침대에서 아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작명 감각을 발휘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어디서 들었는지 너무 고급스러운 이름을 자꾸만 들이민다. 그런 이름을 했다가는 분명 어린이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자꾸만 투닥거리면서 그와 무슨 이름이 더 좋은지에 대해 언쟁을 하다가 결국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서로 침대에 다시 누워버렸다.
“내 머리가 이렇게 나쁜 편인 줄 몰랐소. 애 이름 하나도 못 지어 주는 부모라니.”
“부모?”
“당연하지.”
당신과 나의 아이잖소.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자 그가 상당히 놀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본다. 그가 당황하는 모습에 웃어버리고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여전히 당황스러웠던 건지 아무런 말없이 아이의 이마를 내려다보고는 이따금 손을 움직여 아이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는 손가락을 자꾸만 아이에게 내밀었다. 여전히 곤한 잠을 자는 아이의 손에는 어느새 벨져의 손가락이 쥐어져 있었다.
“...묘한 기분이로군.”
“응?”
“글쎄. 이제 조금은 가정이란 개념이 와 닿는 기분이라서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벨져는 매우 진지해 보였다. 아버지가 되었다, 그런 것을 느끼는 걸까. 자꾸만 머릿속에 벨져의 이름을 되뇌며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가장 좋은 이름이 생각나서 호들갑을 떨며 서랍 속 노트와 펜을 꺼내 아이의 머리맡에서 펜을 끄적거렸다.
“벨져, 이것 봐. 당신 이름을 쓰면...”
천천히 노트에 B.l.z.e.r 라고 쓴 뒤 그 뒤에 바로 내 이름인 I. c를 덧붙여 belzeric 이라 적어버리자 그가 제법 흥미로운 눈으로 단어를 바라보았다.
“이 중에 가운데에 이름을 떼면.”
zeri 란 스펠링에 동그라미를 치자 그가 보기 드물게 감탄사까지 내뱉으며 노트를 집어 들었다.
“보통은 이름을 그런 식으로 쓰진 않으니.. Jerry는 단어가 그렇게 좋은 뜻이 아닌 것이 마음에 걸려서. zerry. 는 어떨까. 같은 제리지만.”
“나쁘진 않군.”
그가 고생했다. 하고 짧은 격려의 말까지 해주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아이의 볼과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 네 이름은 이제부터 제리야, 아가.”
작고 귀여운 아이의 손은 우리의 말을 들었는지, 가만히 잡은 내 새끼손가락을 좀 더 꽉 쥐여주었다. 자는 와중에도 할건 다 하는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우리는 아이와 평화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물론. 아주 잠깐의.
.
.
.
“뚜다다다다!!!!!”
“제리! 뛰어다니면 안 되오!! 맙소사. 제리!”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아이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남자 둘은, 엉망이 되어가는 집안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였고, 결국은 아이에 대해서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나의 외침 아래 그의 유모였던 한나라는 메이드 분께 아이를 맡기고는 책방에 들러 육아에 관한 책들을 수북이 골라 집으로 가져왔다. 이럴 때만큼은 게이트가 편리하다며 후들거리는 양팔 가득 쌓여있는 책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후 좋아. 그럼 아까 유모가 말한 대로 육아 용품을 사러 가야 하는데.”
“그 정도 즘은 같이 가 줄 수 있다.”
덤덤히 그는 게이트를 열라며 의자 위에 지친 육신을 잠시나마 달래려 누워버린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도무지 쉴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그가 더 아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지친 몸을 겨우 일으켜 그와 함께 시장에 들러 아이가 먹을 이유식용 재료 몇가지와, 아이의 식사 때 사용할 조그마한 포크와 숟가락, 접시까지 사고 나니 어느새 해가 어둑하게 지고 있었다.
“... 죽겠소, 벨져.”
“게이트나 열어라. 짐은 내가 정리하지.”
거들어준다는 말에 냉큼 게이트를 열어 유모와 잔뜩 놀고 있던 제리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홀든가를 빠져나왔다. 몇 시간 만에 만난 것이 서러웠던 것인지 아이는 칭얼거리면서 자꾸만 D 발음을 어눌하게 내며 내 갈색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이 정도 고통쯤이야, 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품에 안은 아이가 뽑아낸 머리카락이 한 움큼인걸 보고 나서야 사태가 심각해질 것을 느끼고는 아이를 고쳐 안고 도닥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리, 벨져, 해보시오. 벨져.”
“따아-”
그래. 일단 흉내는 내는 것 같은데 전혀 다른 단어가 나오는 것에 웃음을 꾸역꾸역 참아내었다. 벨져의 곧은 눈썹이 조금 꿈틀거리며 불만을 표출하는 것에 서둘러 아이에게 다시 시선을 주고는 아이를 버둥거리며 말했다.
“자, 그럼 아빠 해보시오. 아-.. 빠.”
아-. 입을 잔뜩 벌리면서 아이가 아- 하는 발음을 해보길 종용하자 벨져가 표정이 웃기라면서 그만 하라며 흥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귀여운 입에서 아빠 소리가 나오면 가장 좋아할 것 같으면서. 벨져의 말을 무시하며 아이를 품에 안고는 아아-. 하고 소리를 내니 아이가 아- 하고 조금씩 입술을 오물거리며 따라 하기 시작했다.
“빠!!!”
빠도 해보시오. 빠는 힘든가? 계속 길을 가면서 아이를 안고 빠빠 거리니 벨져가 시끄럽다면서 이쪽을 어마 무시한 눈길로 쳐다보는 것에 긴장해 버렸다. 괜히 시무룩해져서 아이를 품에 꼭 안고 거리를 걸어가자니 아기는 이내 벨져를 향해 손을 쭉 뻗으며,
“아-- 따!!!”
하고 생글생글 웃어 보이는 게 아닌가. 놀란 눈으로 웃으면서 봤소? 봤고 하며 벨져를 돌아보는 순간, 벨져의 표정이란. 이 사람이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건가.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놀란 푸른 눈이 아이와 마주치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고 있는 것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둘 다 귀여워서 주체를 못할 것 같소. 입 밖으로 그렇게 내뱉으려는 말을 속으로 꼭꼭 숨긴 체. 그렇게 육중한 홀든 가의 철문을 빠져나왔다.
아이가 어색한 발음으로 벨져를 아빠라고 부르려 하고, 나에게도 아빠라 불러 달라며 아이를 보채자 마자 아- 마- 하고 엄마라는 발음을 내는 것에 좌절해 버린 것은 작은 헤프닝. 무거운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기진맥진한 발걸음을 질질 끌며 오는 길에 지친 것인지 꾸벅꾸벅 조는 아이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아이의 옆에 털썩 같이 누워버렸다. 오늘따라 게이트를 자주 연 것도 그렇고, 아침에 아이가 뛰어다니는 걸 쫓아다니느라 분주하게 움직인 것이 화근인지, 몸이 몸살기가 다분하게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정리는 내가 하지. 한숨 자두도록.”
“응... 고맙소, 벨져.”
침대가에 앉아서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벨져의 손길에 웃고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옆에 두고 나른한 수마에 빠졌다. 조금 이른 새벽에 눈을 떴을 때는, 마치 보호라도 하는 것 마냥, 아이와 나를 동시에 끌어안는 듯 팔을 내 허리에 두른 벨져가 보였고, 그는 제법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고른 숨을 내쉬며 자고 있었다.
“.......”
아이가 잘 때 칭얼거린 것도 돌봐 준 것인지, 아이의 주변에는 아기 장난감이 침대 머리맡에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것에 살포시 웃어버리고는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빼내어 침대에서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잠을 자는 두 남자에게, 좋은 꿈을 꾸길 바라며 그렇게 나는 직장에 휴직전화를 걸었다. 기분 좋은 아침이 다시 그들을 비출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직장의 상사를 설득한 나는 그들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는 서재에서 아이와 관련된 서적을 하나 꺼내서 읽어 보기 시작했다.
“흐음, 아기의 신경에 대한 반응을 발바닥을 간질거리면 알 수 있다? 이런 것도 있군.”
어머니들은 과연 대단했다. 이런 걸 설마 하나하나 다 해보고 사는 걸까 싶을 정도로. 먹을 것 하나, 입을 것 하나. 기저귀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아기의 피부가 상한다를 시작해서 온갖 육아의 힘든 점이 세세하게 실린 “실전 좋은 엄마 되기 프로젝트!”를 절반도 못 읽었는데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게다가 둘 다 남자니까.”
아이는 조금만 힘을 줘도 이 생명이 바스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작고 연약했으니까. 우리가 잘못 키우지는 않을까. 아이가 다치지는 않을까. 온갖 고민을 하며 한참을 멍하니 책 표지를 매만지며 멍하게 있었다, 그러나 이내 아이가 서글피 우는 소리에 서둘러 침실로 가보니, 난감한 표정으로 면 기저귀를 한 손에 들고 처참한 표정을 짓고 침대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가 보였다. 어떻게 하나 지켜볼 요령으로 보고 있자니 그가 한숨을 푹 쉬며 아이의 그... 기저귀를 조심스럽게 벗겨 내는데 그가 독일어로 뭐라 뭐라 해가며 기저귀를 벗기고 아이를 안아 들고는 욕실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고 조용히 웃어버렸다. 물론 참담한 그.. 아기의 그것을 처리하는 것은 내 몫이었지만.
한참의 실랑이 끝에 아기와의 목욕 사투에서 승리한 벨져는 온몸이 물에 흠뻑 젖어 겉옷뿐만 아니라 속옷까지 다 축축해진 상태로 아이를 품에 안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머리카락을 뚝뚝 타고 흘러내리는 물기가 아기에게 닿을까 그는 좀처럼 잘 묶지 않는 머리카락까지 묶어 아기의 몸에 가득한 물기를 부드럽게 수건으로 토닥거리며 말려주었다. 젤리도 자기 때문에 힘들게 목욕 대장정을 마친 벨져에게 내심 미안했는지 방실방실 잘도 웃어준다.
“목욕까지 시킨 것이오? 대단한데.”
짐짓, 그의 노고를 모르는 척 그의 어깨를 조금 주물러 주고는 아이의 엉덩이에 분을 토닥토닥 발라 주곤 새 면 기저귀를 채웠다. 훨씬 낫네. 아이에게 어울리는 귀여운 곰돌이 옷을 입혀주자 만족스러웠는지 또 통통거리며 뛰어다닌다. 어떻게 저렇게 뛰는 걸 좋아하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라 그런 건가. 아기가 다칠까 어느새 우리 집 모서리마다 온통 푹신한 스펀지가 가구들을 감싸고 있었고, 그가 신경 써 준 덕분인지 푹신한 코르크 재질의 바닥재를 더 깔아 아기가 넘어져도 다치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할 수 있었다.
“빼에에에---”
그래도 넘어지는 건 넘어지는 거지. 곰돌이 한 마리가 얼마나 서러운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엉엉 울고 있다. 그러게 뛰지 말라 했잖소! 하며 서둘러 아이를 안아 들고는 보듬어주며 아이가 울음을 그치길 기다리지만, 좀처럼 울음이 그치질 않는다.
“벨져, 아기 좀 잠시만.”
벨져의 품에 곰돌이 아기님을 조심스럽게 안겨주고는 서둘러 달걀을 사용한 부드러운 이유식을 만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기는 간을 한 음식을 주면 안 되고... 허둥거리며 온도도 맞추고 아기의 영양까지 고려하며 만들려니 아이가 더 보채기 시작한다.
“릭.”
“벨져, 아기 좀 달래 주시오. 응? 손이 그, 불교에 뭐더라. 천수 관세음보살인가 하는 그 사람 만큼 있어도 부족하겠소.”
순간적으로 머리에 인자한 미소를 띤 불상 옆으로 다닥다닥 마네킹 손들이 붙어있는 것처럼 여러 개의 손을 가진 그 인도의 불상이 생각나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때 좀 공간이동 능력 말고 손이 여러 개 생기는 능력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한참을 그렇게 부엌에서 달걀과 우유를 조합해서 이유식을 만들고 있자니 아이가 꺄륵 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오, 벨져 나름 아기랑 잘 놀아 주는-.”
아기는, 그것도 꿀단지에 꿀을 손으로 퍼서 먹을 것 같이 귀여운 우리 아기는, 벨져의 구령에 맞춰서 조막만 한 막대기를 손에 꼭 쥐고서는 이리저리 흔들흔들하며 잔뜩 신이 나 있었다. 맙소사.
“벨져, 아기한테 검술은...!”
“언어도 독일어로 가르칠 예정이다만.”
“맙소사. 미국어가 제일 평범하오. 우선 미국어를 배운 뒤에 독일어를 배워도 늦지 않소.”
다 만들어진 이유식을 식히기 위해 잠시 식탁 위에 올려두고는 앞치마를 두른 상태 그대로 꾸역꾸역 그가 왜 이러는 거냐, 하는 말을 무시한 채 그의 품에 자리를 잡고 앉자 아기가 막대기까지 휙 던져 버리며 이내 내 품속으로 엉금엉금 기어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제리, 역시 미국어가 좋지?”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미국어를 알려줄 예정이었는데 말이다. 그러자 그가 강하게 아침 인사인 구텐 모르겐을 아이에게 가르치듯 아이 손을 잡고 연신 구텐 모르겐 구텐 모르겐, 하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미국어가 최고라니까. 제리, 굿 모닝!”
굿모닝과 구텐 모르겐의 치열한 다툼이 거실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아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우리의 싸움이 무색하리만큼 명답을 내놓고 말았다.
“꾸때 모니!!!!”
순식간에 아이의 말에 꽃 미소를 띄워버린 나나, 부드러운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벨져나, 틀림없이 아이에게 한순간 마음을 줘버린 게 틀림없다며 결국은 아이가 적응될 때까지는 자연스럽게 벨져가 나에게 맞춰주는 것처럼 미국어를 배우게 하는 합의점을 도출해 버렸다. 그래도 미국어가 익숙해질 때 즈음 독일어도 배우게 시키겠다는 그의 집념에 두 손 머리카락을 다 들어버렸지만.
“아기가 커서도 우리랑 있으려 할까, 벨져?”
“무슨 소린가. 네가 너와 나의 아이라 하지 않았나.”
그럼 당연히 우리 아이니. 우리 옆에 있겠지. 그의 말을 곱씹으며 그의 품에 기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다면 좋을 텐데 말이지. 나른하게 아침부터 너무 일찍 일어난 탓인지 졸려오는 것에 그의 품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다 깨이는지를 반복하니 정수리 위로 그의 부드러운 입술의 온기가 그의 숨결과 함께 닿았다 떨어졌다. 기분 좋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아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벨져의 볼을 양 뺨으로 꼭 쥐고는 정수리에 입 맞춘 것 마냥 벨져의 입술에 입술 박치기를 시도했다.
“!!!!”
“제리!”
맙소사. 아이가 깨어 있을 때엔 무조건 금욕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생긴 하루였다.
.
.
.
“정말 혼자서 아기를 돌볼 수 있겠나?”
“괜찮소. 그대야말로 괜히 아이 때문에 당신 중요한 일을 안 할 수는 없잖소. 거긴 당신 없으면 무질서하게 돌아갈 수 있는 위험성이 크니.”
아이를 품에 안고 웃으며 신발장 앞에서 떠나질 못하는 그에게 연신 괜찮다 괜찮다를 말하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영 불안한지 자꾸만 뒤돌아보는 그에 볼에 입을 맞춰 주려다 순간적으로 아이를 쳐다보니, 또 따라 하려는 듯 입술을 자꾸만 오물오물 거리며 쭉 내미는 곰돌이 아기 덕분에, 결국은 그와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기는 정말 배우는 게 빠르구나.
“그럼. 다녀오지.”
“다녀오시오. 제리, 아빠한테 다녀오세요- 해야지.”
아기는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만 갸웃거리며 곰돌이 옷과 어울리게 꿀단지 모양의 장난감을 입에 문 체 눈만 깜빡거렸다. 포기한 듯, 벨져가 되려 아기의 이마에 입을 맞출 요령인지 가까이 다가오자, 아이는 입에 물던 꿀단지를 빼고는 벨져의 입술에 또 입을 쪽쪽 맞추기 시작했다.
“........”
“....아이가, 누굴 닮았는지.. 모..모르겠소. 하하.”
벨져의 따가운 시선이 나에게 꽂히는 듯했으나 애써 무시했다. 물론 나도 벨져가 좋지만... 늘 입 맞추고 싶지만 겨우겨우 참아내고 있는 내 본심이 아이로 하여금 조금 들켜버린 것 같아서 도저히 그와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벨져도 이내 가볍게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는 이어서 아이의 눈을 가리고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척 봐도 기분 좋은 느낌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것이 귀엽다. 그는 내심 표현하지 않지만, 분명 좋은 것이리라.
“그럼 다녀오지.”
“응. 올 때 동화책 종류도 조금 사서 와주겠소? 아기에게 슬슬 제대로 된 말을 가르쳐 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이내 집 문을 나섰다. 아기는 나보다 벨져가 더 좋았는지 벨져가 가자마자 서럽게 엉엉 울기 시작한다. 울지 마시오, 울지마. 아기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거리며 결국은 부드러운 잔디가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부터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에, 아기가 추울까 좀 더 도톰한 판다 옷으로 갈아 입혀 주고 나서야 맨발로 잔디를 조금씩 밟아 보기 시작했다.
“제리. 그건 나비.”
어느새 엉엉 울던 아기는 잔디가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가 좋았는지 울음을 그쳤다. 통통하고 뽀얀 볼살과, 나와 똑 닮은 녹 안은 정말 귀여웠다. 울어서 그런지 딸기코가 되어버린 작고 조막만 한 코와, 무언가 자꾸 말하려 하는 듯 오물오물 움직이는 입술. 아이의 입술에 입을 맞추자 우유 향이 나는 듯했다. 아기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 주자 판다 한 마리가 뒤뚱거리며 팔랑거리는 노란 나비를 쫓아간다. 귀여워라.
“제리. 이리 오시오.”
손바닥을 짝짝 마주치며 아기의 이목을 끌자 아기가 뒤뚱 뒤뚱거리며 어색한 발놀림으로 뛰어온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옳지 옳지 하는 목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에 놀랐다. 내가 이렇게 아기를 좋아했나? ...애초에 정말 사람들과 필요 이상으로 깊게 인연을 나누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내가 돌아갈 곳은 내 집 뿐이었다 생각했는데, 그와 살게 된 이후로 나는 항상 우선순위로 그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와의 인연은 인연 그 글자를 뒤집어 말하는 게 더 좋은 비유라 할 정도로 깊은 인연이 되었다. 게다가 이젠 지켜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고, 집에 오는 것이 더욱 즐거워지겠지.
“제리. 제리가 구태여 날 닮지 않았어도, 분명 벨져는 제리를 여전히 사랑해 주었을 것이오.”
분명 그럴 것이오. 달려온 아기를 품 안에 포근히 안아주고는 테라스의 의자에 앉았다. 아침부터 새 지저귀는 소리가 귓가에 기분 좋게 파고든다. 가을의 낙엽이 슬슬 파도를 타려는지 멀리 보이는 나무들의 색깔이 점점 녹색빛 향연에서 붉은빛과 노란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세월이 정말 빠르구나. 그와 이렇게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구나. 괜히 더 기분이 좋아져 아기를 품에 안고는 도리도리 잼잼 하며 아기와 손을 움찔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자니, 저 멀리서 우체부가 편지 한 통을 우체통에 넣어 주려는 것이 보여 아기를 서둘러 품에 안고 우체부에게 다가갔다.
“직접 주겠소?”
“아, 그러죠! 벨져 홀든 씨 집 맞나요?”
맞소. 다른 사람에게 듣는 그의 이름은 항상 낯설지만. 어색하게 웃고는 편지 봉투를 받았다. 그래, 그가 나와 함께 살고 이제는 가족이 한 명 늘었지. 이 행복이 영원했으면 좋을 텐데. 편지 봉투를 자꾸 낚아채려는 아기를 다독거리며 우체부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집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따듯한 집안의 공기가 잠깐이나마 바깥에서 쐬었던 차가운 몸을 덥혀주는 것을 느끼며 아기를 거실의 장난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바닥에 조심스럽게 앉혀 주고는 편지 봉투를 뜯기 위해 뒤를 돌리는 순간 조금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붉은색 실링 왁스와, 자주 보던 문양인 T.
“.......”
토니. 그자의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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