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뭘쓴걸까요.
- 약한 개그물.
- 제 3의 창작 인물이 등장합니다.
치지.-. 칙.
[아.아. XXXX.년도, 9월. 부부 상담. 음- 릭 톰슨, 벨져 홀든 상담 일지 녹화 본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내 목소리. 항상 사람들이 말하건대, 자신의 목소리는 녹음했을 때 좀 다르게 들린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어째 평소보다 더 긴장하고 낮은 목소리가 영상기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일반적인 부부상담 클리닉에서는 녹음기로 상담 기록을 녹음하지만, 좀 더 부부 상담의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서 상담 내용을 부부의 허가 아래, 영상기로 녹화하고, 소리를 녹음기로 또 녹음하여 영구 소장 하기로 하는 것이 나, 닥터 웨스던의 법칙이다.
녹화를 하게 되면 상담 중 부부의 행동들과, 표정 등에서 좀 더 자세한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있던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는데.. 오랜만에 틀어본 이 영상에서는, 별다른 표정없는 남자 둘이. 부부.. 상담을 하러 왔었다. 작년 이맘때 즈음이었지. 9월이었고, 점점 서늘해지는 계절이었으니까. 오랜만에 영상 기록을 정리하다가 너무나 인상 깊었던 이 부부의 상담 일지를 재생해 보았다. 제법 잘 보관된 필름을 영상기에 넣자, 파라락 거리는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어두운 장막 아래, 흑백의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영상을 보니, 그날의 기억이 다시금 선명하게 물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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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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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권태기 같다 이거죠.”
“그렇소.” “그렇다.”
...남자가 부부라. 그래, 이것은 전례에 없던 상담이긴 하지. 애써 식은땀으로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켜 올렸다. 여자와 남자의 상담은 잘 할 수 있지만, 남자와 남자의 상담은 처음인데. 잘 할 수 있으려는지 장담을 못하겠다. 들리지 않은 한숨을 폭 쉬고는 앞의 두 남자를 쳐다보았다.
“시작하시오.”
둘다 표정이 없지만, 묘하게 서글한 인상이 좋은, 갈색 머리칼의 녹안을 가진 남자는 예의도 좋게 손까지 살짝 몸짓을 취해가며 시작하라는 사인을 보내며 다리를 살짝 꼬았고, 옆에 아주 덤덤히 앉아서 필요 이상의 말은 꺼내지 않고, 다리를 꼬는 것도 모자라 팔짱까지 껴서 ‘어디 한번 이 사람 문제를 말해봐.’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내는, 하얀 머리카락의 푸른 벽 안을 가진 남자. 아무리 봐도 상극의 조합인 것 같은데 말이다. 게다가 이 사람의 문제라니. 어떻게 눈빛으로 그런 게 읽히지. 게다가 묘하게 자신의 잘못은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 무척이나 자존심이 세 보였다.
“... 아무래도, 의사로서 환자에게 솔직하게 대우하는 것이 우선인 것을 알기에. 남남 부부를 상담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저런.” “뭐하러 의사했나?”
무례하오. 그래도 의사인데! 조용히 해라. 결국은 서로 투닥거리며 말싸움을 하려 하는 것에 서둘러 둘 사이를 상담 차트로 막아버렸다. 서로의 눈빛이 마주치지 않게 되자 겨우 말이 멈추었고, 두 사람은 뚫어지라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보통 부부가 아니다. 여차하면 죽게 될지도 몰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간단한 게임 형식을 통해, 두 분의 현 상태를 알아보도록 하죠. 이것은 분명 도움이 되는 치료 과정 중 하나니까요.”
차트에 끄적거리며 ‘게임’이란 단어를 기재하고는 단어 주위로 동그라미를 쳤다. 게임은 간단했다. 하나의 단어에 대하여 말을 지음으로써, 주어진 단어에 최대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이 담길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게임.
“그럼, 끝에 ‘속’자로 끝나는 단어나 문장을, 제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처음 질문. 보통의 식습관은 어떻게 되시죠?”
“도넛 속.” “빈속.”
활짝 웃으며 도넛을 외치는 릭이란 자의 말에 뒤이어 덤덤히 이쪽을 노려볼 듯 쳐다보며 빈속이라 대답하는 벨져라는 사람. 이내 릭이, 벨져의 말에 놀랐는지 ‘당신 설마 아침 식사 차려주는 것 외에는 안 먹는 것이오?’ 라고 조금의 걱정 끼를 담아 그에게 물어보자, 그가 제법 풀린 표정으로 ‘입맛이 너 때문에 변해버린 것을 어떡하나.’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릭은 귀를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주억거리기 시작했다. 귀엽게도 ‘아, 그렇군. 저녁이랑 점심 도시락도 잘 챙겨줘야겠소.’ 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럼. 식생활은 되었으니, 집안에서의 주 활동에 대해서 말해볼까요?”
릭과 벨져의 각각 개별적 상담 차트에 도넛과 빈속을 적어 넣으며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릭은 한참을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벨져가 먼저 가만히 입을 열어 대답하기 시작했다.
“서재 의자 속.”
놀랍게도 그의 말에 뒤이어 릭이 손가락을 튕기며 딱 소리를 내더니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벨져의 품속!”
... 뭐라고? 여기 지금 부부 권태기에 대하여 상담하러 온 것이 아닌가? 당황스러움에 릭을 쳐다보자, 벨져가 잘 말했다는 듯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점점 가면 갈수록 알 수 없는 부부. 한숨을 푹 쉬자 , 벨져가 ‘봐라, 너 때문에 의사가 한숨을 쉬지 않나.’ 하고 운을 띄자마자 릭이 ‘아니, 그것이 또 왜 나 때문이오? 벨져 홀드는 서재 의자 속이 아니라...!’ 하고 끝을 얼버무리는 것에 벨져와 나의 시선이 릭에게 쏟아졌다.
아니라..?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어 버린 릭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소파에 등을 푹 파묻을 정도로 기대고는 아무것도 아니오. 하고 웅얼웅얼 아이가 말을 하듯 말을 끊어버렸다.
“괜찮습니다. 그런 단지 어제의 일과로 조금 피곤해서 한숨이 멋도 모르게 나왔네요.”
여전히 괜찮으냐고 또 물어봐 주는 릭을 무시하고 벨져가 의사가 그래서야 의사겠느냐며 자꾸만 초를 치는 것에 조용히 손에 쥔 펜을 꾹 붙잡았다. 참아야 한다. 이 정도면 그래도 다른 부부들에 비해서 아직은 양호한 편인 것 같은데? ... 차트의 질문 내용 순서를 쭉 살펴보며 심드렁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둘의 사이에 있어서 서로의 관계는 어떤 것이다-. 하고 정의를 할 수 있나요?”
둘이란 단어에 벨져와 릭이 서로 가만히 쳐다보았다. 꽤 긴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약 3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입을 열지 않던 두 부부는 하나의 단어를 동시에 내뱉었다.
“결속.”
아, 결... 결속이라고? 종이에 ‘결’자를 적고 ‘속’을 적으려던 손을 멈추었다. 하나의 단어를 대답한 두 사람은 마치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보통은 구속이라든지.. 예속이란 말을 쓰지 않나? ..결속이라니.
“구속이나... 예속은?”
나도 모르게 필기하던 펜을 내려놓고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릭은 전혀 떠오르는 게 없다는 듯 고개만 갸웃거리고, 벨져는 이내 웃는 목소리로, ‘침대 속.’이라고 말해 버렸다. 릭이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미쳤소, 미쳤소!! 하고 벨져의 손등을 손바닥으로 자꾸 내려 치는 것에 안경을 벗어버렸다. 글을 쓰던 도표도 옆에 마련된 조그만 협탁위에 두고는 제법 흥미로워지는 부부의 속 사정을 들어보기로 했다.
어쩐지 무척이나 흥미로운 상담이 될 것 같다 기대하며.
“반지를 끼고 있군요.”
“그렇소.” “그렇다.”
“결혼반지입니까?”
그러자 또 둘이 시선을 마주치며 아무런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연인으로 발전한 지는 꽤 된 것 같은 시선. 게다가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쳐다보고 있는 광경은, 무척이나 신비로웠다. 아닌 게 아니라, 미남자 두 명이어서 서로 마주하고 있으면, 서로의 외모, 그리고 서로의 눈동자에 바로 취할 것 같은데. 용 캐도 서로 마주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불현듯 입꼬리를 올리고 웃어버렸다.
“아니오.” “아니다.”
그럼?
갸웃거리며 반지의 의미를 다시금 물어보자, 벨져가 옆자리의 릭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곤 이쪽을 정확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했지.
“약속.”
그리고 벨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릭이 그의 손을 고쳐 잡고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영속.”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안경을 다시 집어 들었다. 차트에는 상담 결과란에 ‘환자 판단 착오. 정상’으로 적어 놓고는 도표를 덮어버렸다. 코끝에 걸친 안경을 다시 추켜 올리며 그들에게 허탈한 모습으로 ‘왜 온 겁니까, 도대체.’ 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자꾸만 까칠한 태도를 보인 벨져 홀든 이 자세를 고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제법 괜찮은 의사다.”
“그렇소. 좋은 상담이었소.”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저 한 부부의 애정 수치를 판가름해달라 온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권태라는 것은, 늘 보고, 자주 마주치는 바람에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각자의 편안함을 과도하게 추구하여 서로 정이 식은 것을 권태라 할 수 있지.”
“적어도, 방금의 상담 덕분에 잊었던 것을 다시 기억할 수 있었다는 것 정도로 말해주면 될 것 같소. 좋은 상담이었소, 닥터.”
그래서. 상담 결과는?
궁금한 듯 물어보는 벨져의 물음에 나는 웃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사랑 하십시오.’
하고.
.
.
.
[틱,틱,틱,틱....]
아, 잠깐 졸았던 것일까. 피곤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창문 가는 어느새 해가 뉘엇 저물어 가고 있었고, 필름이 없어서 영상기가 헛돌아 가는 소리가... 응? 필름이 없어져?
“이게 무슨.”
당황스러움에 서둘러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한번 사라진 필름은 돌아오지 않았다. 맙소사. 제일 중요한 자료인데. 그런 식의 상담은 다시는 경함 할 수 없을 것인데. 황망함에 책상을 두리번거리다가, 벽을 비추는 영사기의 렌즈에 뭔가 붙어 있는 것이 보여 조심스럽게 종이를 뗐다.
[이건, 가져가겠소.- Rick Thomson.]
...어떻게 들어 온 건지부터를 설명해 주면 참 좋으련만. 서둘러 밖에 나가 주위를 둘러보아도 텅 빈 거리에 낯선 사람들만이 왔다 갔다 거리는 흔하디흔한 길만 보일 뿐이었다. ... 본인이 가지고 갔으니. 다행인 걸까. 아쉬운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상담실의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거봐. 여기 있잖소. 이거는 잘 보관해 두었다가, 당신이 못된 말 할 때마다 틀어줘야지.”
“내가? 릭 톰슨. 생각보다 바보로군. 이런 영상 하나에 내가-.”
오호, 그래? 웃으며 벨져의 손을 꼭 잡은 릭이 짐짓, 표정을 상당히 날카롭게 변화시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약속,”
순간적으로 꿈틀하며 벨져의 눈썹이 움직였지만, 이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앞을 보며 다시 걸어가는 벨져의 손을 여전히 꾹 붙잡은 릭이 이리저리 그를 놀리며 ‘이래도 내가 바보요? 응? 벨져, 말 좀 해보시오.’ 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며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기분 좋은 가을바람을 따라 두 사람은 점점 거리의 끝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상담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늘 있던 곳.
자신들이 함께했던 그 공간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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