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함께 하는 소설입니다.
“벨져. 이거 보시오. 여기 노트가 떨어져 있어.”
갈색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흩날렸다. 가을과 여름의 중간에 서 있는 두 사람 중 어른 같지만 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아름다운 헤이즐넛 색의 눈동자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온 빛에 반짝였다. 밤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손에는 기억을 남기듯 시계들이 즐비해져 있었고 그 손으로 자신의 옆의 남자를 부드러운 손길로 이끌었다. 반대쪽 손끝이 가리킨 숲속 우거진 거리 사이에 잘려진 나무 둥치는 길가는 나그네가 쉬고 갈 수 있도록 만든 듯,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쉬지 않고, 덩그러니 푸른 밤 은하수를 닮은 노트 하나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함부로 건드리는 것이 아니다. 남의 것은.”
“그래도.. 이런 한적한 곳을 아는 것은 우리뿐인 줄 알았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남자는 이내 아름다운 사내의 손을 소중한 보물을 잡듯, 꼬옥 잡아 주었다. 그가 손을 잡자마자 마치 신화 속, 모이라이 자매가 부드럽게 매만지는 은빛 실타래처럼 가늘고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하늘과 같은 청명한 눈을 부드럽게 휘어보였다. 어색하지만, 그에게만 허용한다는 눈매로, 아름답게.
“주인을 알려면 보는 수밖에 없지 않소.”
“하아.. 뒷감당은 책임지도록.”
잔뜩 웃으며 결국 릭이란 남자는 커다란 나무 둥치의 길 잃은 노트를 집어 들고 앞장부터 차례대로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페이지에는 아름다운 사연이 담긴 글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가슴이 미어지는 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거기에는 간결한 글씨체로 단어 한자 한자가 페이지마다 쓰여 있을 뿐 이었다.
“...... 별거는 없고.. 정말 별게 없소. 단어뿐인걸. 무언가 추리소설의 힌트 정도라도 되는 걸까?”
“이런 곳 까지 와서 추리 소설의 힌트를 두고 갈 리가 없잖나. 무언가 생각하며 적은 단어겠지.”
어느새 벨져라는 남자도 둥치에 나란히 앉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단어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흐음. 이런 것도 있군. <처음>.”
“……. 당신, 설마.”
집개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을 가리며 잔뜩 빨개진 얼굴로 조용히 하라는 듯 쉿 쉿 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아이 같다.
“착각하지 마라.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진 몰라도. 난 우리 둘이 처음 만난 그 때를 말하는 것인데. 무슨 상상을 했기에 얼굴이 그렇게 빨개지나.”
그 말에 릭의 얼굴이 더 화다닥 붉어졌다. 숲속 한 가운데에 단풍이라도 든 것 마냥. 가만히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벨져의 손길에 릭도 조금은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처음’ ? 처음이라..
“처음 그대를 봤을 때는……. 액자를 눈앞에서 놓친 터라 상실감만 가득했지. 그녀가 메트로 폴리스. 그곳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갔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놓쳤었는데. 눈앞에서 당신이 생뚱맞게 루사노 수도원으로 가야 한다기에.......”
가만히 옆에서 턱을 괴고 릭을 바라보던 벨져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일괄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 조금은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당신과의 여행에서 당신에게 조금은 기대하게 되었거든. 아, 당신이라면 내 여행의 끝을 알지 않을까 하고.”
그제야 표정을 풀어낸 벨져는 가만히 웃기만 할 뿐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둘 사이를 지나가는 숲의 향기는, 마치 둘 사이를 질투하는 듯 짙게 퍼져 나갔다. 풀 내음이 났다. 갓 자란 나무 마냥 풋풋하기만 한 사랑내음이 났다.
“그래서. 끝을 안 것 같나?”
“당연하지.”
노트를 한 손에 쥔 릭이 벨져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대었다. 마음을 기대고, 말하지 않아도 닿을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 단어를 자꾸만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내 여행의 끝은 당신 이였소. 그날 만난 순간부터 내 여행은 끝이 난거야. 난 더 이상 여행자가 아니오, 정착자지.”
“말은 잘하는군,”
그렇게 말하는 벨져 또한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으니, 고개를 들은 릭과 벨져의 눈길이 얽히는 순간, 입술과 입술이 마주 닿았다. 노트 한 켠이 웃는 듯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람에 흩날렸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땐 분명 내가 어른이고 당신이 아이 같았는데. 이제는 내가 되려 아이같고 당신이 어른 같소.”
“사랑……. 의 차이겠지.”
서투른 단어를 말하듯 발음도 어눌하게 들리지만, 그 단어에도 가장 행복한 미소를 보여주는 릭은 정말 아이 같았다. 이내 궁금한 듯 그의 말투를 따라 하며 되물어보는 것 까지도.
“사랑……. 의 차이가 무엇이오? 어떤 차이?”
“나는 너를 나이와 구분 없이 사랑했으니까.”
“......”
“네가 나를 어린아이 취급해도. 널 사랑했으니까.”
“맹세컨대 당신을 어린아이 취급한 적은 없소, 그것은 벨져. 당신을 자꾸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어린아이 같아지는 내 마음이 그렇게 비춰진 것이겠지.”
벨져를 끌어안아주는 릭의 손길은 미안함이 가득했다. 그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남겨 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간절해질수록 안아오는 힘이 강해졌다.
“푸흐. 알겠으니 그만해라.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군,”
“사랑의 힘이오, 사랑의 힘.”
도저히 떨어질 생각이 없는 릭을 고쳐 안은 벨져는 한손으로 능숙하게 노트의 페이지를 넘겼다. 마치 처음에 ‘남의 것’ 운운을 하던 것은 어디로 갔는지, 마치 추억 속에 잠기는 것이 좋은 것 마냥 좋은 단어를 찾기 위해서 페이지를 엄지손으로 슥슥 넘겼다.
“어어. 거기. <맹세>.”
고개를 돌려 어느새 벨져의 시선을 따라간 릭은 한 단어에서 그의 손길을 저지했다. 멈칫하며 단어를 바라보던 벨져는 이내 품속에 릭을 한번 쳐다보고는 낮게 웃어버렸다. 보나마나 뻔하지. 반지를 주고받은 그때의 그 맹세를 말하는 것일 거다 분명.
“좀 더 좋은 반지를 줄 걸 그랬소. 당신에게 걸맞은 걸로. 조금 더 화려하고.. ”
“이게 최고다. 번복하지 말도록.”
그래도 말이오. 이왕 당신에게 주는 선물들은 다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이었으면 해. 좀 진귀하고,
들릴 듯 말 듯 고개까지 푹 숙여 가며 이야기 하는 그의 머리를 가만히 다독거리는 벨져는 이내 릭의 귓불을 매만졌다. 차갑고 보드랍다. 그에 비해 벨져, 그의 손은 따듯했으나 거칠어서, 마치 ‘이것 봐, 우리는 어떻게 되든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 줄 수 밖에 없어.’ 그리 말하는 듯 했다.
“하나밖에 없는 것을 벌써 취했잖나. 이 세상에서 도넛을 가장 좋아하고, 퇴근 뒤의 휴식을 즐기고,”
“수식어가 빠졌어, 그대. ‘벨져 홀든과 함께.’ 가 빠졌소.”
“....... 그래. 이 나와 함께.”
마주 보며 자꾸만 웃는 두 사람 사이가 부러웠던 걸까, 시기가 났던 걸까. 어느새 둘만 있던 한적하고 눈부신 숲 위로 노란색 물이 들기 시작했다. 붉디 붉은 노을은 마치 숲 전체를 가을로 바꿔 주는 듯 따사롭기만 했다.
“벌써 시간이.. 집가서 빨래도 걷어야 하고. 식사 준비도 해야 되고.”
“가정주부가 따로 없군. 그대로 홀든 가를 이으면 되겠군.”
웃으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벨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릭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뒤로 비춰지는 노을에 벨져의 머리카락 또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눈부시게 빛났다.
“Willst du mich heiraten?”
“....... 또 시작이오? 그대, 그대보다 나이 많은 어른을 놀리면 못쓰-.”
“Will you marry me?"
헤이즐넛 눈이 놀란 듯 크기를 키워간다. 이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어린아이마냥 울먹거리는 것에 머뭇거리며 공중에 멈춘 릭의 손을 벨져가 잡아왔다.
“I.. I will marry you."
더듬더듬 울상으로 말하는 릭에게 손수건을 내민 벨져는 이내 기쁜 표정을 숨기며 덤덤히 입 꼬리 한쪽만을 올린 체 릭을 안아 올렸다. 무겁지도 않은지 잘만 안아 올리는 것에 릭이 놀란 눈을 지으니, 이내 짓궂게 ‘거짓말 이다. 네가 홀든을 이을 수 있을 리가.’ 하며 웃어버리는 그. 덕분에 릭은 잔뜩 씩씩 거리며 손수건으로 벨져의 눈을 가려 버렸다.
“평생 쫓아다닐 것이오, 벨져 홀든. 어른을 놀린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해주지!”
“……. 앞부터 보이게 해줄 수는 없는건가.”
“없소! 평소에는 그렇게 내 모습이 보이는가를 외치더니!”
놀리지 마라- 라는 말은 이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그의 눈이 하얀 손수건으로 가려져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있지만, 입술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온기와 숨결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보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기분. 남자 입술 치고는 제법 가늘고 붉은 입술이 닿아오는 느낌은 어딘가 간지러운 것 마냥 기분 좋아서. 마주 입을 대며 숨을 나누었다. 어느새 눈앞의 손수건이 부드럽게 눈 위를 훑고 지나가니 녹안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깃털이 가라앉듯 검은 속눈썹이 이내 녹안을 감추고, 그렇게 숲 속에서 긴 입맞춤이 끝날 무렵에 겨우 튼 한마디.
“벨져. 집 가면 늘 마시던 차나 마시며 별이나 볼까?”
“......그러지. 무슨 차가 좋은가.”
“당신이 타 주는 거라면 어떤 것이든.”
벨져는 가만히 웃으며 릭을 품에서 내려주었다. 나무 둥치를 턱으로 가리키며 노트를 두고 집에 가자는 제스처에 릭이 가만히 노트 표지에 입을 맞추고는 조심스럽게 둥치 위에 꽃 한 송이와 함께 노트를 올려 두었다.
“가자. 벌써 달이 떴다. 늦장 부리면 티타임도, 별도 못보고 그냥 자야 할 수가 있어.”
“응. 가자, 벨져.”
서둘러 그의 손을 잡은 릭은 가만히 뒤를 돌아보며 노트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 내 사랑의 추억. 고마워.
.
.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 너머로 나는 드디어 몸을 움직였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기척을 숨기느라 꽤나 애썼다며, 나무 둥치에 올려 진 노트와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노트에서는 온기가 맴돌았다. 그 둘의 향이 밴 것 마냥 달짝지근한 복숭아 향이 나는 것 같았다.
가만히 웃으며 페이지 몇 장을 넘겨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아픈 추억이 될 것 같은 단어도 많았다. 마치 동화나 명작 속의 주인공처럼, 그들에게도 분명 지금과 같은 아름다운 사랑만이 존재 하진 않겠지.
때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죄 아닌 죄가 그들의 구속이 될 수도 있고, 사랑이 짙은 어둠에 물들어 타락할 수도 있으며, 마치 선과 악, 흑과 백처럼 잠시 갈라서서 서로를 증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가슴 아픈 통증 뒤에는 봄 햇살 머금은 비가 묵은 감정들을 씻겨 내려주며, 험난했던 사랑의 통증을 분명 씻겨 주리라.
그때가 되면 마치 둘만의 바다 속에서.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그들만의 서러웠던 마지막 계절을 보내고 다시 행복 해 질 수 있겠지.
가만히 노트를 넘겨보았다. 어느새 달이 나를 비춰 주었다. 달빛을 벗 삼아 페이지를 넘겨 다시금 단어를 써 내려갔다.
아직도 이야기의 결말은 끝나지 않았다는 듯.
* 벨져 릭 전력에 들어간 단어를 다 짜집기 해서 만든 소설입니다.
항상 달보드레한 단어로 수요일을 기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Thanks to [벨져릭 전력 6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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