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學審問(박학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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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 1. 22. 19:00
작성자
you. and. me.




* 실제 사이퍼즈 세계관에서 벨져가 릭을 너무 아는척 하길래 써봤습니다.

> 연관링크 : http://cyphers.nexon.com/cyphers/pages/story/episode/1


*모든것은 추측입니다!!! 그저 편하게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약간의 앵슷. 어쨌거나 결론은 아마 해피앤딩.

- 릭 서거 주의(흑흑 우리릭 맨날 죽여서 미안)

- 릭 불멸자 주의..


*급하게 집안일 하면서 쓰는거라 문맥이 이상할수도 이씀니다..



릭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어릴 적, 가정교사로 잠시 들어온 일종의 고용인에 불과했다. 그는 당시에 고작 해 봤자, 대학생을 졸업하고 난 지 얼마 안 된 27살의 젊은 어른이었고 나는 이제 막 대학교에 다닐 나이인 20살의 청년이었다. 비록 20살이지만 대학교에서는 월반. 대학교 4학년 과정을 이수하고 저택에서 릭이 오후 늦게까지 기다리다가 이내 대학 수업을 마친 후 우리 가문에서 제공해 주는 방에서 숙식하며 저녁 9시부터 늦은 수업을 진행한 뒤 잠이 드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벨져. 오늘 수업은 조금 일찍 마칠까?”


“왜지?”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빨리 수업을 끝내버린 선생 덕분에 학생이 할 일이 없어졌다. 이 시간이면 검술 연습하기에도 부적절한 시간. 아직 진도가 채 나가지 못한 ‘문학교육’ 책의 페이지를 잡고 펄럭거리니 릭이 어설프게 웃어 보인다. 약속이 있어서. 너는 웅얼거리듯 말끝을 흐리며 책의 책갈피 용으로 쓰이는 붉은 노끈을 만지작거렸다.


“여자?”


“...설마 내가 여자를 만나겠소? 이래 봬도 선생인데.”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직무유기죄로 일을 그만두라고 하려 했거든. 나는 그 상태로 더는 책을 볼 마음도, 그에게 교육이란 것을 받을 마음도 사라져 책을 덮어버렸다. 책의 두꺼운 소리에 릭이 이쪽을 바라본다. 숲과 닮은 눈동자. 그러나 별 감흥 없이 그에게 시선을 돌려 그대로 서재를 벗어나려 하자 그가 서둘러 내 팔목을 붙잡는다.


“내 집에 다녀오겠소.”


“네 집?”


 거긴 미국이잖아. 미간을 좁히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거기까지 갔다 오는 데에만 한 달은 족히 걸릴 것에 혀를 차며 그에게 안된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그가 한 손으로 허공에 손을 뻗는다. 푸른빛과 보랏빛의 향연.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거리는 별들의 향연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 어디로든 갈 수 있소. 그러니 오늘 저녁만 시간을 줘. 집을 비워 놓은지 너무 오래되었거든.”


그해 가을. 밖에서는 낙엽이 춤출 무렵 우리 사이에는 조용하고 별 같은 비밀이 하나 생겨났다. 


*

릭의 능력을 안 것은 꽤 오랫동안 둘만의 비밀로 유지되었다. 21살의 어느 날. 그날 따라 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햇볕이 꽤 강하게 내리쬐며 여름분위기를 내는 것에 온 저택 안이 이른 여름 준비로 분주했다. 이 와중에 릭은 어디로 간 것인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저택을 뒤적거렸다. 


학교의 정규 수업이 끝나면 바로 저택으로 돌아와 릭을 찾고, 간단하게 티타임으로 그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가 보이지도 않는 것에 불안감이 밀려온다.


그는 너무나 바람과도 같아서. 그가 어디로든 사라질 수 있다고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부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겨버렸다. 왜 그 바람은 나에게 불어오지 않는 것인지. 잡을 수 없는 것인지. 너무나 손가락 사이로 쉽게 빠져 버리는 네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 복도를 더 빠르게 걸었다. 건물과 옆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를 지나칠 때, 정원의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돔 안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그 길로 바로 1층 높이의 다리에서 뛰어내려 그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잔디를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


갈색의 뒤통수. 나른하게 정원을 빛내는 햇빛이 정원의 푸른 잔디를 비추고, 발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람에 나뭇잎과 잔디가 바스락거리며 비 내리는 소리를 낸다. 그를 닮은 녹색 빛을 밟고 그에게 도달했을 때, 그는 자고 있었다. 갈색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가끔 흩날리기만 할 뿐. 돔에 비치된 벤치에 앉아서 햇빛을 받으며 졸고 있는 모습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허탈함이 몰려온다. 


바람이 불어오며 그의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넘겨주자 그의 이마와 곧은 눈썹이 보인다. 감겨있는 눈. 저 눈 뒤에는 분명 녹색으로 빛날 텐데. 무언가 펄럭거리는 소리에 그의 무릎을 쳐다보자 그제야 그의 무릎 위에 있던 시집이 보인다. 딱히 표지에는 시집이라 적혀 있지 않았지만, 바람에 이따금 넘어가는 종이는 온통 시로 빼곡하게 적혀있었으니까. 


“...시. 라.”


그의 옆에 앉아 무릎 위에 놓인 시집을 빼앗았다. 잠결인지 뭔지. 시집을 붙잡은 손이 떨어지지 않아서 고생은 좀 했지만. 한 장 한 장 넘겨보지만 낡은 환경에 대한 예찬이나, 추억 등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아무런 감흥 없이 그의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으니 릭의 머리통이 흔들거리며 꾸벅거리기 시작한다.


“...릭?”


일어난건가 싶어서 그를 쳐다보지만 대답 없이 고개만 또 꾸벅거리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에 정신이 다 아득해진다. 적당히 두면 알아서 깨겠지 싶어 다리를 꼬고는 다시 시집을 읽어 내리자 어깨 위로 무거운 것에 툭 하고 내려앉았다.


완전히 L자로 기이하게 꺾여버린 목을 쳐다보다가 그가 문득 불편해 하는 것에 자세를 고쳐 보지만. 같은 키라 자세를 어떻게 취해도 불편해진다. 한숨을 쉬며 불편하게 잠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제 조만간 30대가 될 얼굴임에도 얼굴에 청년기에 한 번쯤을 날 법한 여드름 상처 자국도, 주근깨도 없다. 속눈썹은 생각보다 길었고, 콧날도 반듯하게 내려온 것이 시선이 간다. 


“......”


나도 모르게 붉은 입술에 시선을 주었다. 마당에 피어난 때 이른 여름 장미와도 같은 꽃잎 두 장. 가까이 가면 장미 향이 날까.  


여자라고는 저택의 시종 인이 다였지만, 그들을 한 번도 이성의 감정으로 바라본 적은 없었으나. 고작 사내 입술 하나에 시선이 묶여버렸다. 자꾸만 내 이름을 부르는 그 입술에 얼굴을 천천히 내리려는 찰나 그의 눈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다.


“벨져..?”


비몽 사몽한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는 그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이쪽에 무게 중심을 주고 기대 있던 릭이 옆으로 쓰러져 버린다. 둔탁하게 의자에 머리를 부딪치며 고통스럽게 머리를 매만지고 누워버리는 릭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여기서 잠이나 자고 있다니.”


“아니 그렇다고 사람을 막! 던지고!”


“말은 제대로 해라. 네가 기대있던 거다.”


그렇소? ...이상하게 봄만 되면 춘곤증이 심해져서 말이지. 그는 웃으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이 잔디에 짓눌려 녹색 물이 들어버렸지만 너는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나를 다시 부르며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와달라.’ 는 부탁에 한 발짝 떨어져 있던 몸을 움직여 그에게 다가갔다. 단단하지만 목제 특유의 온화한 벤치에 다시 앉으니 그가 녹색 물이 조금씩 스며든 책을 보여주었다. 


“벨져. 오늘 수업은 ‘시’ 야.”


“아까 봤다만.”


“여기까지 벌써 다 봤소?”


그가 내밀고 있는 페이지를 보니, 제일 끝쪽에나 있는 시가 보인다. 거기까진 보지도 않았지만. 시라는 건 단순하게 시험의 목적으로 암기하거나, 훑어보는 용도일 뿐. 전혀 와 닿는 것이 없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기분 좋게 눈까지 휘며 글을 읽는 네 모습에 곁눈질로 시를 따라 보지만. 여전히 네가 느끼는 그런 감정 따위는 올라오지 않는다. 


“시는 소설처럼 흥밋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하고, 지루하다. 게다가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의미를 모르겠는데. 이걸 가르치겠다고?”


그만둬라. 수업시간에 내가 자는 모습까지 보여줘야 그만두겠나? 그에게서 책을 빼앗아 들자 릭이 다급하게 책으로 손을 뻗는다. 아기가 보채는 듯한 움직임에 책을 더 멀리까지 손을 뻗으며 닿지 않게 하자 옆구리에 주먹이 날아온다. 엄청난 완력. 순간적으로 배에 힘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입에서 신음이 세어나갈 정도의 힘이라니. 녹색 눈은 내가 제법 놀랐다는 것을 눈치챈 건지, 그제야 책에서 시선을 돌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왜. 샌님이라 주먹힘은 약할 것 같았소? 아닌 거 알았으면 책을 순순히 주시지그래, 학생.”


“선생이 완전 폭력배가 따로 없군.”


이렇게 잘생긴 폭력배 봤소!? 얼른 책이나 줘! 그가 이쪽을 향해 몸을 더 기울이며 내 배 위로 손을 올리는 덕분에 완전히 벤치 위에 누워 버렸다. 덩달아 이쪽에 기대듯 몸을 움직인 릭이 내 위로 쓰러지고는 둘 다 말없이 씩씩거리며 책 사수 작전에 돌입했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 어쩐지 평소에 바람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려 나를 쫓아오는 것이 썩 기분 좋았다. 결국은 둘 다 벤치 위에서 퍼덕거리는 것을 멈추고 가쁜 숨을 내 쉬자니 선생이 배에 또 주먹을 찌른다.


“윽.”


“내놔.”


“협박 조로군? 평등조약을 맺는 건 어때.”


“조약은 무슨. 책 하나 가지고 그런 걸 맺어야겠소?”


“여기에 있는 시 하나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할 수 있다면. 책을 돌려주지.”


릭은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서는 ‘비겁하군, 그대.’ 하고 내 배 위에 턱을 괴었다. 팔꿈치가 심장 쪽을 직격으로 누르는 것에 그의 팔을 과감하게 치우자마자 턱이 흉부를 강타한다. 신체 강화 능력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고통스러웠겠지만. 일부러 그랬냐는 시선을 보이니 그가 ‘아니, 말을 해주면 치울 것 아니오. 말을 해주면.’ 그대로 웅얼거리듯 양손을 깍지끼고 내 흉부 위에 손을 올리고는, 그 위에 턱을 올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이내 입을 천천히 열었다.


“당신의 조용한 눈 속에 나를 쉬게 해 주세요. 당신의 눈은 이 지상에서 가장 조용한 장소이지요. 당신의 검은 눈동자 속에 살고 싶습니다.”

그가 시를 읽자마자 아까 그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 맨 마지막의 시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느릿하게 그 페이지를 펴서 시를 읽는 그의 말을 따라 책에 보기 좋은 글씨로 쓰인 글자들을 시선으로 따라 읽었다.


[당신의 눈동자는 상냥한 밤처럼 부드럽습니다.]


그가 훔쳐보기라도 할까 봐 그의 머리 위에 책을 올리고 시를 따라 읽으니 그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웃어버린다.



[지상의

검은 지평선을 떠나 단 한 걸음만으로도

하늘을 올라갈 수 있습니다.

당신의 눈 속에서 나의 세계는

끝납니다.]


됐지? 고개를 기울이며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에 나는 오늘, 지금 내가 있는 곳의 계절이 봄이라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여름이었다면. 얇은 셔츠 위로 평온한 얼굴과는 다르게 곤두박질치는 듯 뛰는 심장 소리가 그대로 릭의 손을 타고 올라갔을 테니까. 


*


내가 23살이 될 무렵. 30살의 릭 톰슨은 얼마 안 가 회사에 취직하게 될 거라며, 더는의 교육은 하지 않겠다는 통보와 함께한달 뒤에 집에서 떠나겠다는 처지를 취했다. 사람 20명은 족히 먹고도 남을 식사자리에서 제일 상석에 앉은 나와, 내 옆쪽에 앉은 릭. 두 사람만이 달칵거리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점심을 먹고 있다.


“.....벨져. 화났소?”


“아니.”


유난히 고향에 대한 집착이 큰 그의 행동과 성격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지역에서는’이라고 시작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자니 입맛이 뚝 떨어진다. 게다가 어딘가 스테이크가 묘하게 미국의 대륙 모양과 닮아 있었다. 칼로 스테이크를 썰었다. 입 안에 넣고 씹어보자 부드러운 육즙이 흘러나온다. 무언가 해치웠다는 느낌과 함께 포만감이 밀려오기 시작하자 기분이 풀어지기 시작한다. 대신 스테이크는 반 토막이 나 사라졌지만.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니까 기분 좋게 마치는 게 좋겠소.”


그러니까 그대도 기분 푸시오. 삐친 거 다 아니까. 




릭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접시 위에 있던 스테이크 한 조각을 내 접시 위로 옮겨 놓았다. 접시 위에 큰 스테이크보다 그 작은 한 조각에 시선이 집중되자, 옆에 있던 집사는 ‘늘 그렇듯’ 남의 음식이 내 접시 위에 올라간 것을 보자마자 치우려 했지만 나는 릭이 건넨 조각을 포크로 찔러 올렸다. 


“벨져 도련님 치-”


“됐다.”


무언가 안절부절못하는 집사의 행동에 릭의 머리에 물음표가 가득 솟아나오는 듯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그 고기조각을 입 안에 넣었다. 어딘가 ‘다른 사람의 맛’이 나는 것 같아 남들과 음식을 공유하는 습성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언제 출발할 거지?”


나는 그가 건네 고기조각을 입안에서 온전히 잘게 부수어 삼켜내었다.


“사실은... 20일 뒤라고 했지만.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고. 내일 미국으로 출발할 거야.”


널 먹지 못하는 게 아쉬운 맹수처럼. 


*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니까. 평소에 궁금했던 점에 대해서 질문을 좀 받아볼까 하는데.”


“미국을 가는 게 진짜 목적인가?”


“.....”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지, 벨져? 릭은 2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에 잘도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에게 품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서 흔들어 보이자 그가 순식간에 게이트로 내 손에 들린 편지를 집어내 가려 하는 것에 손만 삐죽 나온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2m 거리를 사이에 둔 사다리에서 내 품으로 끌려온 그는 당황스러운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벨져. 날 감시한 것이오?”


“감시가 아니야.”


그저 네가 이런 위험한 불장난에 뛰어들 필요는 없어 보이니까. 그냥 이런 걸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버린 네 잘못이지. 편지봉투를 하녀가 버리려다가 그저 눈에 띈 것뿐이야. 그렇게 말을 하고 나니 릭의 오해가 풀린 것인지.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책상 위에 의자 때문에 불편한 자세로 안긴 릭을 책상에 앉혀 주고는 편지 봉투를 다시 내밀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가지 마라.”


“...그대가 내 일에 왈가왈부할 위치는 아니잖소.”


“안타리우스를 모르나? 거기에 엮였다가는 클론이 될지, 강화 인간이 될지. 아무도 몰라.”


“그대가 그걸 어떻게 알아?”


“......”


나도 그쪽을 조사하고 있으니까. 내 말에 릭은 제법 놀란 눈치였다. 둘 빼고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저택에서 그와 나의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내 말에도 그는 전혀 고개 숙일 기색이 없어 보였다. 릭은 고작 해봐야, 나보다 7살 연상일 뿐이다. 릭을 올려다보자 릭은 말없이 표정을 또 풀어버리며 웃어 보인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처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시계가 아닌, 단출하게 언젠가 내가 선물해 주었던 시계 하나만이 그의 팔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팔이 내 머리 쪽으로 뻗어 오는 것에 시선을 주자 이내 팔의 끝자락에 있는 그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벨져. 내가 그대 옆에 괜히 온 건 아닌지 생각할 때가 있소. 그대가 어리광 피우는 것 같아.”


“하?”


“어리광. 유독 나한테 집착하고, 시선이 따라붙고. 그대도 알고 있소?”


“어리광 따위가 아니다.”


“그럼?”


그대가 하는 행동들은 어리광 이상으로 안 보이는걸. 그대는 그저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잖아. 릭의 마지막 한마디가 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대로 의자에서 일어나 릭을 책상 뒤로 밀쳐 버렸다. 릭의 등이 둔탁하게 책상에 부딪히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이 달칵거리며 차를 바닥으로 쏟아버렸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리는 차 따위가 내 신경에 들어올 리가. 그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며 릭의 양팔을 책상에 누르듯 고정했다.


“어리광 따위가 아니야. 선생.”


그대로 천천히 마주한 눈동자를 쳐다보고 고개를 숙였다. 내 그림자에 가려지는 그의 눈은 깜빡이지도 않고 그대로 나를 쳐다보았다. 릭의 눈 속에 내가 비추어진다.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사내의 모습이. 그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고 입을 맞추려는 순간 입술처럼 따듯하지만, 비누 향이 나는 무언가가 진입을 막았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아침에 먹었던 토마토 파스타처럼 얼굴이 붉어진 릭 톰슨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 마, 벨져.”


“.......”


“차라리 일이 끝나는 대로 돌아오겠소. 그러면 그대도 만족하지? 나에게 시간을 좀 줘.”


그대가 지금 하려는 행동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을만한 시간을 나에게 줘. 그의 말에 나는 속였던 몸을 들어 올렸다. 릭의 양팔을 붙잡았던 손도 놓아주었다. 그대로 나는 서재를 빠져나왔다. 


릭 너는 여전히 바람이구나.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릭에게는 ‘타키온’ 이라는 두 번째 이름이 배달됐고,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쓰여 있는 그 프로필 파일은 주인에게 가지도 못한 채 내 손에 배달 됐다. 그의 방문을 열었을 때에는 탁자에.


벨져. 금방 돌아올게. 


라고 쓰인 쪽지만 남긴 체 너는 여기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흔적 하나 없이 사라진 뒤였으니까.


*


대공황 무렵, 너를 기다린 지는 벌써 꽤 많은 해가 지났다. 이제는 내 나이가 25살이 다되어서. 약속이라는 말 하나만 믿고 아무 생각 없이. 혹시나 너를 만나지 않을까, 안타리우스 근처를 맴돌다 나는 실험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빼곡하게 늘어선 거품이 올라오는 사람 한 명이 너끈히 들어갈 수 있는 시험관. 사람이 없는 틈을 타, 그쪽의 자료와 무엇을 연구하는지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던 와중. 안타리우스 쪽에서 의식이 있는 클론을 만드는 시도를 하는 것을 알아냈다.


“미쳤군.”


샘플용으로 나중에는 기계까지 한 대 가져왔지만. 덕분에 안타리우스 쪽에서는 난리가 난 듯, 한동안 사이퍼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자자하게 났다. 홀든 가의 지하실에 숨겨져 있는 이쪽 기계에 대한 행방에 대한 소문들이. 그러나 떠돌아다니는 소문에서는 ‘홀든가’의 홀 자도 나오지 않았다. 

“의식이 있는 클론이라. 아무래도 의식이 있다면 교육과 사상을 집어넣으려면 꽤 애를 먹을 텐데. 왜 이런 것을 만들려 하는 거지.”


의문투성이의 자료들을 훑어 보다가 집무실 의자에 몸을 푹 기대앉았다. 안타리우스의 실험을 알아낸 것은 좋았으나. 은연중에 찾던 릭은 보이지 않았다. 안타리우스 쪽과 관련하여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싶었던 순간, 책상에 올려놓은 자료 중 유난히 색이 진한 종이가 자료들 사이에서 튀어나와 있는 것에 시선을 주었다.


[Rick Thomson. M. 12. 13]


그의 이름이다. 


천천히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11. 23 /....... 위험인물 판정도. Joker등급. 공간이동 능력자. 보조 역할이었으나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 활용될지 잘 아는 인물.]


[?11. 24/ 해당 인물 아군 본진 잠입 시도. 생포 완료. 실험 시작.  Test code name: Black hole.]


[?12. 12/ Test fail. * 실패 사유: 약물에 대한 저항력 약화. 사망. 폐기처분.]


[?12. 13/ 실험에의 능력 확보 성공. 테라듀를 활용한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할 만한 클론 필요. * 능력에 대한 조절의 필요성을 위해 ‘의식’이 있는 클론의 필요성 대두.]



천천히 날짜의 연도를 확인했다. 올해는 1932년. 12월 30일. 그의 사망 일자로 확실하게 보이는 날짜의 연도를 확인했다.


1932년. 



나는 그날부터 너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돌아온다는 쪽지와 네 실험일지를 벽난로에 던져 버렸다. 


네가 돌아온다면. 해주고 싶던 말이 있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어졌다. 


*


“또 왔어? 이미 그는 거의 90% 완성되어 가니까.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텐데.”


안경을 추켜 올리며 말하는 박사의 말을 자르고는 벽면을 보았다. 


나의 욕심은 점점 다른 길로 세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결국 우리 가문의 비밀과 릭 톰슨의 능력을 회수하기 위해 제레온 경의 휘하 직속 부대인 검의 형제 기사단에 들어갔다. 제레온경과의 이야기를 통해 그쪽 가문에도 무언가 안타리우스와 관련된 연관성 있는 일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덕분에 릭 톰슨의 공간 능력 본보기와 일부 신체 조직을 회수하는 것에 성공했다. 의학적으로는 아는 것이 크게 없는 터라 수소문 끝에 찾은 자가, 닥터 까미유. 그에게 본보기와 안타리우스에서 가져온 자료들을 보여주자 상당히 흥미로워하며 ‘리키에게도 제법 활용도가 높은 실험이 되겠군.’이란 말을 남긴 체 간단하게 내 부탁을 수락했다. 


릭을. 다시 만든다.


처음에는 그것이 미친 짓이라고 했었으나, 그에 대한 집착이 바닷물처럼 겉잡을 수 없을 만큼 몰아치고, 침식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막을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생각외로 모든 실험이 순조롭게 끝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박사의 말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


“기억을. 지워줄까?”


“......”


“당신 말고. 이 자의 기억 말이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꽤 충격받을 텐데. 죽었다 살아나는 것. 클론이잖아. 자기가 클론이란 걸 인지하고서도 멀쩡한 사람이 있을까?”


유리관 안에서 기계들과, 호스 몇 가지에 의존한 체 눈을 감고 약품이 가득 섞인 물속을 부유하는 네 모습을 쳐다보았다. 잠자는 것처럼 조용하지만. 눈을 뜨고 나를 보았을 때 어떤 말을 먼저 할까.


날 왜 이렇게 끔찍한 괴물로 살려 놨느냐고 할까? 


“...부탁하지. 이왕이면 그의 기억은. 33살. 회사에 다니는 아주 평범한.”


그의 얼굴 쪽의 유리벽으로 손을 올려보았다. 차가운 물 덕분에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일반 회사원. 여행 목적으로 게이트를 열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아주 평범한 회사원.”

얼굴을 더듬어 내려가듯 그의 콧날을 따라 유리벽을 훑어 내렸다. 입술에서 멈춘 손은 거두고 싶어지지 않을 정도로. 


“홀든가 도 모르고. 벨져 홀든도 모르는. 오후에 느긋하게 커피 한잔과 도넛을 먹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그리고 이왕이면. 그를 미국에 그가 살던 집까지 보내줬으면 하는데. 수송편은 이쪽에서 마련해 두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을 돌렸다. ‘... 뭐. 당사자가 그렇게 부탁한다면야.’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는 말없이 입꼬리를 올리며 릭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뒤로 한 체 지하실을 벗어나 관계도 없어 보이는 ‘약국’의 입구로 빠져나왔다. 


거리의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하게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고, 다칠 일도. 사망할 일도 우리 같은 사이퍼들 보다 훨씬 적었다. 네 능력을 지워버리고 아예 정말 평범한 사람으로 살게 하고 싶었으나, 너를 사이퍼 명단에서 빼기 위해선, ‘죽은 사람’이 아닌 이상 뺄 수 없었으니까. 후천적으로 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나는 너를 숨 쉬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단지 그런 욕심이었다.


내 욕심을 다 이루었으니 놓아주는 것이 맞겠지. 그래서 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차라리 손에 닿지 않을 곳으로 도망쳐라, 릭. 이런 일들과 다시 엮일 필요 없이. 그렇지만.


다음에 아주 우연한 기회로 널 붙잡으면 그땐.


*


 다신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저 삶을 바라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눈앞에서 액자를 놓치고 말았다. 돌아가기엔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주먹으로 바닥에서 흩날리는 모래를 한 줌 움켜잡았다. 그러나 너무나 쉽게, 손을 빠져나가는 모래는 마치 허망한 내 자유처럼 보였다. 잡고 싶어도 , 잡을 수 없는. 올해 33살의 나는. 평범하게 회사에서 출퇴근하고, 아주 잠깐이지만 능력으로나마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회사원에 불과했다.


‘노인은 죽었어. 그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이 꽃피우자마자 꺾인 것이지만, 안타까워할 사람은 없어. 그는 운 좋게 얻어걸렸고, 재수 없게 죽었을 뿐이야. 그리고 이제 액자는 내 손에 있어.’


날카로운 입매.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 시바 포는. 그 말을 남긴 체 액자를 들고 사라졌다. 인형실 끊기 작전에서도 이따금 어딘가 돌발 행동을 보였으나, 그런 그녀가 액자를 들고 사라질 줄이야. 그녀를 찾아야 모든 것이 끝나게 될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말을 단서로 시바 포를 찾아 메트로폴리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그는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이곳으로 오는지 기다리고 있었다. 나, 시바 포, 그리고 네가 세 번째. 나와 동행할 자격이 있군.”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 그것은 내 입도 저절로 열리게 했다. 어딘가 안타깝고, 그리운 느낌. 그의 로브로 가려진 얼굴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로브로 차마 가려지지 않은 하얀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코끝이 당겨왔다.


“그녀를 찾아야 해. 그녀가 노인의 액자를 가지고 사라졌어.”


“그녀는 이미 이곳을 떠났다. 액자는 그녀가 며칠 더 갖고 있기로 했어. 원한다면 정보를 줄 수도 있지. 하지만 먼저 날 루사로 수도원으로 데려다 줘.”


그는 벽에 기댔던 몸을 때어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한쪽 허리에 찬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그의 모습은. 어딘가 자주 보았던 것 같았다. 익숙한 음성. 그리고 분명하게, 저 로브 뒤에 숨어 있을 것 같은 푸른 눈.


“그곳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그리고 그는. 나의 이름을 불렀다.


“릭.”


이쪽을 바라보며 어딘가 웃어 보이는 듯한 그의 음성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루사로는 당신에게도 꽤 흥미로운 장소일 거야.”



벨져 홀든. 그자와의 짧은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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