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라 하고 싶지만, 온 몸이 녹초에 이르다 못해 완전 물처럼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축축 늘어지는 발걸음이 점점 한걸음 한걸음을 옮길수록 무거워 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한발자국도 못 움직일 것 같아 자리에 그대로 쪼그려 앉아 깊은 숨을 내쉬었다.
기다란 코트 자락도 바닥에 끌려 흙 먼지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로등불 덕분에 길게 드리웠던 그림자는 쪼그려 앉은 덕분에 짧아져 버렸고 그 작아진 그림자가 지금 내 체력 상태인 것 같아서 어딘가 울적함까지 밀려오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새벽 3시니까 지금 서둘러서 걸어가야 4시쯤에야 겨우 홀든가에 도착 할 수 있을 테니까.”
“진짜 한발자국도 못 움직이겠소.”
발에 물집은 다 잡혔는지 발바닥이 걸을 때 마다 따끔거리는 것도 아파 죽겠고. 이쪽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는 벨져도 어딘가 얄밉다. 오늘은 그의 ‘그놈의 뭐시기 문’ 때문에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사원이란 사원을 뒤적거리며 안타리우스의 흔적을 찾는 것을 목표로 했다. 결국 하루 종일 일 때문에 능력을 낭비하다 시피 썼다가 마지막,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능력이 비실거리더니 아예 게이트의 게 자도 보지 못할 정도로 기운도 없을뿐더러, 게이트 덕분에 장시간 걸어본 적이 없던 나는 몇 시간 걷지 못해 체력까지 바닥나 버렸다.
“쉬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길바닥에 그렇게 앉아 있을 거라고? 하.”
벨져는 말은 그렇게 하고서는 갑자기 내 앞으로 다가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람. 그를 손바닥으로 밀어버리자 휘청 하던 그가 한쪽 손을 바닥에 짚은 체 이쪽을 짜증스럽게 돌아본다.
“업히라고.”
“뭐?”
“업히라 했다.”
싫으면 질질 끌고 가는 수밖에. 어느새 그의 하얀 머리카락이 사륵거리며 다시 어깨 앞쪽으로 축 늘어진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크고 넓은 등. 매일 보던 등인 것 같은데 살짝 굽어져서 그런가. 더 넓어 보이는 게 괜히 웃음이 난다.
“나 엄청 무거운데. 알잖소, 그대 지난번에 나 안아 들다가 휘청 했잖아.”
고작 해봤자 26살. 나에게는 동생으로 보일 수준의 나이인데.
“끌려가고 싶다고?”
오늘따라 어떤 등보다도 넓어 보이고 포근해 보였다. 냉큼 그에게 ‘아니.’ 하고 대답한 뒤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몸을 기대자 손을 엉덩이로 받치며 천천히 일어서는 그 덕분에 공중에 붕 뜬 기분이 든다.
“오오, 이거 제법 괜찮은데.”
발에 물집 잡힌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한손으로 내 몸을 어떻게 잘 받치면서 구두와 양말을 다 벗겨가 버린다. 덕분에 발바닥 가득 잡힌 물집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는 것에 세삼 고마워 진다. 손 하나에 양말을 구겨 넣은 구두 뒤축을 집개 손가락과 중지로 집어 올린 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하는 그의 머리카락이 코끝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무겁지?”
“업히긴 했나?”
업힌 줄도 몰랐다. 그의 말에 소리 내 웃어버리자 가로등불이 켜진 조용한 거리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도 그것이 나쁘지 않았는지, 분명 기분 안 좋다는 오오라를 풀풀 풍기던 그의 몸에서 기분 좋은 느낌만이 전해진다. 목에 두른 팔을 핑계로 그의 목덜미 깊숙이 숨을 들이켜 본다. 남들이 모르는 그의 모습. 남들이 경험해 보지 못 할 듯한 체온을 고스란히 받으며 둘만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발의 물집도 잊게 만들 정도로 행복하단 느낌이 들었다. 항상 일을 쉴 때 마다 몸을 섞거나, 숨을 나누거나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큰일이네 이거.”
“뭐가.”
그의 등을 타고 목소리의 울림이 전해져 온다. 목울대를 울릴수록 그의 몸에 미약한 진동이 같이 느껴지는 것에 입 꼬리를 올리고 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듯이 ‘이러다가 그대가 너무 괜찮은 남자란 걸 다들 알아버려서 아가씨들이 결혼하자고 난리 칠까봐.’ 그는 나의 말에 ‘너야말로.’ 하고 대답해 준다.
“내가 왜.”
“결혼이고 뭐고, 그럴 생각도 없지만. 너는 언제 어디로 사라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의 말에 어깨 쪽에 고개를 기대었던 무겁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앞을 보고 걸어가는 그는 별다른 미동이 없어보였다. 난생 처음 듣는 그의 솔직한 생각에 당황스러워져 그의 어깨를 붙잡은 손을 꿈지럭 거리며 마땅한 대답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대가 있는데 내가 어디가.”
“그래.”
그러면 됐다. 지금 딱 이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있으면 됐다. 나를 고쳐 업는 그의 손길에 몸이 한번 들썩이며 자세가 아까보다 훨씬 더 편안하게 자리 잡히게 되었다. 그의 등이 아까보다 조금 작아 보이는 것에 목에 다시 팔을 느슨하게 두르고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질리도록 이 무게 업고 다니게 해 줄 테니까, 후회하지나 마시오.”
“그거 고맙군.”
웃음기가 섞인 그의 목소리가 공기를 파고들어 울려 퍼진다. 나도 모르게 자기 혼자 늘 저런 고민을 했던 건가. 어딘가 혼자서 앓게 했다는 미안함과 서운함이 몰려와 그의 목덜미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치워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자근자근 깨물자 그가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한번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린다.
“자꾸 그렇게 나오면 놔버리는 수가 있다.”
엉덩방아 한번 찧어봐야 정신 차리고 가만히 있겠군. 그의 말에 나는 괜한 오기가 들어 목덜미에 팔을 둘러 팔 근육에 힘을 주며 그의 목을 살짝 살짝 조르기 시작했다. 그가 짜증내는 듯 한 신음소리를 내는 것에 이제는 신이 나서 옆구리를 발뒤꿈치로 콕콕 찌르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땋아 하나로 내려 보기도 하는 것에 아까 손을 놓는다는 그는 어디 갔는지. 여전히 내 허벅지와 엉덩이를 단단히 받친 체 앞을 보고 걸어가는 남자만 보인다.
“벨져. 나 가볍지?”
“그래.”
“........”
벨져. 나 잘생겼지? 그래. 나 완전 몸매 끝내주지 않소? 그래. 나의 장난에 모든걸 포기한 듯 대충 대답하는 그의 행동에 그의 등에 업힌 체 그의 볼을 콕콕 손가락으로 찌르며 불만을 표시했다.
“대답 좀 제대로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세 애정이 식었네, 벨져 홀든. 혀를 가볍게 차는 시늉을 하며 웃어보이자 그가 한숨을 푹 쉬며 잠이나 자라며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인다. 처음에는 전혀 졸리지 않아서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반복적으로 심장박동처럼 툭, 툭 토닥거리는 소리와 감각에 나른하게 졸음이 쏟아져 온다. 결국은 그의 잠을 재촉하는 손길에 그의 목덜미에 팔을감고 얼굴을 목덜미쪽에 기대었다. 두드려 오는 손길과, 오르락 내리락하는 시야에 점점 눈이 자연스럽게 감긴다.
릭?
“응...?”
자나?
“아니......”
그 말을 끝으로 눈앞에서 보였던 가로등이 점점 꺼지는 듯,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
꿈에서 나는 도넛 왕국의 도넛왕자였다. 도넛모양 옷을 입고, 도넛 시종들을 한명씩 뜯어먹는. 이 도넛은 피넛 도넛이라며 열심히 시종의 머리를 자근거리고 물어뜯자 남자 시종인데도 불구하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성?
이내 울먹거리며 나에게 머리를 뜯기고 있던 도넛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나를 바라본다. 울먹거리며 도넛 속 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꿈 깨라 이놈아.’
*
어휴, 도련님. 시종보고 릭 도련님을-.
됐다. 안 깨울 거니까. 장시간 걸어서 둘 다 피곤하니까 바로 방으로 가도록 하지. 내일 아침에 욕조 물만 좀 부탁해, 한나 유모.
드문드문 들려오는 대화를 끝으로 계단을 오르는 듯, 아까보다 조금 더 요동이 심해진 몸과, 바깥의 한기를 잊게 만드는 온기가 순식간에 피부에 느껴진다. 2층 계단에 올라서, 총 16걸음. 그가 한걸음 한걸음을 내 딛을 때 마다 숫자를 새 보며 입 꼬리를 올려 웃어보았다. 정확하게 눈을 감고 걸어도 딱 16걸음이면 도착하는 그의 방문이 열리며 익숙한 그의 체향이 퍼져있는 방 안에 들어서는 소리에 눈을 떴다.
“......”
“깼나?”
응. 깼소. 대답을 대충하고는 내려와야 하는 것을 알지만, 침대보다 더 포근한 듯 한 그의 등에서 좀처럼 내려오기가 싫어 그의 목덜미를 좀 더 껴안고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눈을 감았다. 다시금 나른한 느낌이 드는 것에 숨을 푹 내쉬며 점점 잠에 빠져 들자, 그가 내 이름을 자꾸 부르는 것이 이성 너머로 들려온다.
“도넛.... 도넛 먹고 싶다...”
꿈의 달콤함에 헤어 나오지 못한 내가 중얼거리는 말에 그가 ‘30분 전에 미리 사두었던 도넛 한 박스 먹었잖아.’ 하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선 잠이 확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건 식후 도넛이잖소. 야식 도넛이 부족하오.’ 나의 말에 그는 혀를 차며 웃어버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잦아드는 것에 다시금 그의 등에서 잠을 자려 하자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
“릭.”
“...왜.”
“팔에 감각이 없다.”
나는 그 말에 감았던 눈을 뜨며 웃어버렸다. 낄낄 거리며 그의 등을 두어 번 툭툭 치며 내려 오자 그가 곱아졌던 손을 피고, 무거웠던 팔을 주물거리며 미간을 찌푸리는 것에 서둘러 그를 침대에 눕히고 나도 그 옆에 앉아 그의 팔을 주물렀다.
“아니, 진작 말을 하지 그랬소. 신체 강화 뭐라고 하지 않았소?”
“네가 허용 범위를 넘어서게 무거운 거겠지.”
내일 왕진 예약을 해둬야겠는데. 정말 저린 듯 그가 눈을 감고 말하는 것에 할 말을 잃었다. 하긴 70kg이 넘는 거구를 들고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업어왔는데. 지칠 만도 하지. 어느새 팔을 주물 거려 주자 조용히 잠이 든 그의 모습을 보고 가만히 몰래 입을 맞추었다.
“고생했소. 오늘.”
좋은 꿈 꿔,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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