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學審問(박학심문)
카테고리
작성일
2017. 5. 13. 00:34
작성자
you. and. me.






*간만에 쓰는 벨져릭이라 한글파일 20p 를 넘어갔어요..


*붉은실 관련 글을 옛날에 썼었는데 그땐 개그물이더라구요. 그래서 이번엔 좀 바꿔 써 보았습니다!



- 중간에 벨져가 다른 여자를 안는 장면이 묘사만 되긴 하지만 불편하신 분은 뒤로..!


- 릭의 짝사랑에서 시작합니다.









()나라 태종(太宗) 때 위고(韋固)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한번은 여행 중에 하남성의 송성(宋城)이란 곳을 지나다가 달빛 아래의 한 노인을 만났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은 모퉁이에 기대앉아 한 손에 두툼한 책을 펴 들고 빨간 노끈을 든 다른 쪽 손으로 책장을 천천히 넘기면서 훑어보고 있었다.

위고는 호기심이 생겨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물어 보았다.

 

어르신께서 지금 읽고 계신 책은 어떤 책입니까?”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다.

 

이 세상 혼사에 관한 책이라네. 여기 적혀 있는 남녀를 이 빨간 노끈으로 한번 매놓기만 하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든 원수지간이든 상관없이 반드시 맺어지게 되어 있지.”

 

 

 

 

[거짓말]

 

Belzer & Rick

 

 

1.

 

내 능력에 대하여서는 아주 극소수의 사람 몇 명만이 그저 공간의 이동 능력자 정도로 생각하며 , 이 사람은 대충 우주 관련된 사람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아주 다행이지만. 한편으론 남들이 모르는 이 불편한 능력이 어찌나 거슬리던지. 가끔은 내 눈이 사라지면 좋다 할 정도로 온 세상이 붉은 빛이다. 정확하게는 붉은 실 천지이다. 그 붉은 실은 때론 손목에 걸려 있기도 하고, 때론 발목에 감겨 있을 때도 있다. 집착이 강한 사람일수록 실은 몸을 크게 감싸며 서로를 에워싼다. 눈을 한번 깜빡여 보자, 저 너머 보이는 연인들의 손가락에 걸린 실이 보인다. 서로 연결되지 않은 그 실. 그러나 서로를 보며 더 없이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연인.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실은 틀린 적이 없다. 반드시 자신의 짝을 찾기 마련이다. 저 두 사람은 정말 행복할까.

 

손님.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테라스 테이블에 엎드려 두 연인을 바라보다가 점원의 말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다정한 여인의 음성이 잡념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해 나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보고 고맙다 말했다. 언 듯 본 그녀의 목에는 붉은 실이 칭칭 감겨 있었다. 좋은 인연이 기다리길. 마음속으로 빌며 커피 잔을 들자, 이번엔 내 새끼손가락에 겨우 걸칠 듯이 나마 느슨하게 묶여있는 실에 시선이 자동으로 가버렸다.

 

징그럽기도 하지.”

 

이쯤 되면 혼자 있는 생활이 더 편한데. 자주 여행을 떠나서 인지, 아니면 애초에 사람을 사귀는 것 자체에 흥미가 없어서 인지. 내 실은 더 없이 느슨하다. 느슨하다 못해 떨어질 것 같은 이 실은, 축 늘어져 저 길 너머 보이지 않는 곳 까지 이어져 있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자 씁쓸한 맛이 입 안을 감돈다. 이제 슬슬 여행이 지루해 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혼자 있는 이 생활이 지겨운 걸지도 모르겠다며.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깔린 남은 커피에 내 얼굴을 비춰 보았다. 너무나도 일상에 지친 남자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남는데.”

 

기분이 별로군. 어차피 오늘부터 한 달간은 휴가를 냈으니. 사람을 만날 일은 거의 없을 터였다. 그래, 이런 날일수록 추억 회상이 답이라며. 나는 그렇게 테이블의 컵 사이에 팁을 껴 두고 사람이 보이지 않을 곳에서 조용히 게이트를 열었다.

 

-처음 시작. 파리의 개선문으로.

 

 

 

2.

 

 

어쩐지 오늘은 기분이 별로라더니. 내 앞에서 마치 여기에 올 것을 기다렸다는 듯 안경을 낀 남자 한명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에 나는 한걸음 물러섰다. 그는 나에게 자신은 연합의 토니 리켓이라며, 자신의 절박한 상황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미안하지만, 거절하겠소. 나는 피와 살이 튀기는 현장보다 팝콘과 도넛이 튀겨지는 현장이 좋아서.”

 

농담조로 말은 했지만, 그를 보며 웃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절박함이 점점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이 능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아무리 클론이 대부분이라지만, 무언가의 생명을 앗는다는 것은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의 한마디가. 나의 발목을 붙잡아 버렸다.

 

내가 당신을 만난 순간, 이미 이곳에서의 여행은 시작되었어.”

 

그래. 그런 거겠지. 며칠 전 빅토르 위고, 그가 나에게 언질을 했다. 새로운 여행지를 추천한다고. 옛날에 한번 다녀왔었던 개선문을 추천한 것이 이런 이유였나. 나는 토니 리켓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마지막 말 뒤로, 토니는 나에게 빅토르에 대한 질문공세 퍼부었지만 나는 덤덤히. 설령 다시 본다 해도 그냥 지나치게 될 것이라며. 마치 그저 무의식 적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과도 같이. 정도의 애매한 대답만을 남겨 둔 체, 그와 만날 장소와 시간을 약속 해 두고 다시 내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이 집안 풍경이. 어쩐지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아서. 나는 집 안을 둘러보며, 때 이른 초여름의 추위가 몰려오는 것 같아 몸을 커다란 담요로 감싸고 커피가 가득 담긴 머그컵을 들고 창가에 걸터앉았다.

 

초승달이 유난히도 밝게 빛났다.

 

 

 

3.

 

 

 

인형실 작전은 실패했다. 적어도 내 입장에선. 정말로 다시는 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지경이 될 줄은 몰랐다. 허무하게, 나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죽인 것도 모자라 내 계약 조건이었던 액자는 그녀의 손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 그녀를 찾아야 해. 다신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저 삶을 바라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눈앞에서 액자를 놓치고 말았다. 돌아가기엔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트로 폴리스, 그곳으로 향하자 갑자기 느슨했던 실이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기운차게 당겨봤자 내 손가락이 끊어질 리는 만무 하지만. 그저 기분 탓이겠지, 예민해 져서 그런걸 거야 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순간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낯선 남자가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고 나는 몸을 굳혔다.

 

기다리고 있었네.”

 

중간 중간 들리는 철컥 거리는 소리. 그가 한쪽 허리춤에 차마 가리지 못한 두 개의 검집이 보이는 것에 나는 미간을 좁히며 뒤로 한걸음 물러서려 했다. 그 순간 그가 검은 로브를 천천히 거두어 올리는, 그 검은 가죽 장갑 위로 나보다 더 헐겁게 늘어져 보였던 붉은 실이 먼저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드디어 만났다는 듯. 붉은 실이 우리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주먹을 쥐었다.

 

.”

 

당연하다는 듯. 내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실에 집중되어있던 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검은 로브가 사라지자마자 폭포수 흩어지는 모양새 마냥 흐트러지는 그의 머리카락에 시선을 주었고,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파란 파도의 눈이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나를 루사노 수도원으로 데려다줘.”

 

처음 마주하는 순간 나는 느꼈다.

 

이런 재수 없는 녀석이 내 인연이라니. 어디서 보자마자 이래라 저래라 인가.

 

 

 

4.

 

 

루사노 수도원에, 내가 흥미를 느낄 만한 것이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안식의 문. 그 광경은 마치 천국의 문을 보는 것 같았으나,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는 그것을 아주 더러운 것이라도 보는 것 마냥 고개를 돌렸다. 서로 나눠서 근처를 조사하는 와중에 이상한 사내에게 어깨를 관통 당한 고통쯤이야. 테라듀를 자기 몸처럼 사용하는 남자와의 싸움 끝에 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자 검은 어둠이 먼저 나를 삼켰다. 순간적으로 부드러운 향기가 나를 끌어안았지만, 그 속에 스며든 내 피향기가 더 진득하게 나를 자극했기에 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다시금 눈을 떠 보니 하얀 천장이 먼저 나를 반긴 것에 한참을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해 낑낑 거리자 옆에서 낯선 손이 불쑥 튀어 나와 움찔 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실례. 불편해 보여서 말이지.”

 

여긴..?”

 

근처 여관.”

 

 

어쩐지. 낡고 비릿한 향이 나더라니. 분명히 저녁에 처음만난 두 사람이 몸을 섞은 듯 한 향이 침대에서 나는 것만 같아 몸을 일으키려 힘을 쓰자 다시금 그가 부축하는 것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맡겼다. 줄어든 거리만큼 줄어든 빨간 실이 신경 쓰여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하려 하자 갑자기 방문을 벌컥 열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 일어났네. . 아까 말한 약들.”

 

그래. 수고했다.”

 

거 샌님처럼 생긴 형씨가 능력 하나는 끝내주네.”

 

아까 대단했다고. 그 철근 덩어리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키만 한 검을 어깨로 걸치는, 눈 한쪽에 검상이 보이는 남자가 그렇게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것에 그저 같이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말할 힘이 하나도 나지 않지만, 겨우 입을 열어 말하려는데 예의 그 로브를 뒤집어썼던 남자가 검을 어깨로 걸친 남자에게 일 끝났으면 그만 가보라는 잔잔한 핀잔을 주며 내 쪽으로 약이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아까보다 더 바짝 붙어 앉아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벗어.”

 

뭐라고 했소?”

 

잔뜩 쉰 목소리가 튀어 나가는 것에 머쓱해져 흠흠 거리며 목을 겨우 가다듬었지만,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자꾸 그를 그저 로브 뒤집어썼던 남자 정도로 부르는 것이 우스워 옷을 더 추스르며 그에게 아직 통명성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말하자 그는 귀찮다는 듯 레피드. 코드명으로 불러라.’ 하고 대답을 마무리 한 체 턱짓으로 나에게 옷을 벗으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도대체 이 남자 어디가 내 인연이란거지. 내가 생각한건 조금 더 다정하고, 부드러운. 그런 사람이었는데. 한숨을 푹 쉬며 아무래도 갈아입힌 건지 사이즈가 맞지 않은 셔츠를 힘겹게 거두어 내자 잔뜩 피로 물든 천 조각 하나가 어깨와 가슴을 가로질러 동동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깐 그렇게 크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막상 보고 있자니 아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었던 남자는 나가고 없었고, 침대 맡에서 내 상처를 쳐다본 레피드, 그가 약통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소독약을 찾는 것에 나는 기함을 했다.

 

이대로 여기다 소독약을 부어버리면 난 기절할지도 몰라.”

 

이 정도는 참아야 다음 치료를 할 수 있다.”

 

그대는 가능할지 몰라도 나는 이런 상처가 처음이란 말이오.”

 

쫑알쫑알 거리지 말고 팔 벌려라.”

 

최대한. 상처부위는 피하도록 하지. 근처라도 소독해야 피가 멎는다. 테라듀에 찔린 거니 혹시 몸에 이상이 생길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 생긴 거 하나는 정말 잘생겼는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독설과도 같아서. 나는 다짐했다.

 

만나지 않는다면. 이 붉은 실도 어찌 할 수 없으리라.

 

그렇게 고통스러운 소독약을 겨우 버텨내며 나는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나의 다짐을 굳혔다.

 

 

 

5.

 

 

애초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면 내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큰 관건 이였지만, 어깨가 뚫린 상태로 능력을 사용해 그를 지원해 준 것이 도리어 우리의 발목을 잡아버렸다. 어깨의 혈관들이 제대로 터져버렸으니, 팔을 멀쩡하게 움직이기는 만무했다. 근처에서 적절한 이동 수단이라곤 튼튼한 양 다리 밖에 없으니, 레피드는 나를 기어이 여기서 어느 정도 치유하고 게이트를 타고 갈 작정인가보다. 하긴. 걸어가는 것 보다야 백배는 낫지만. 축 늘어진 한쪽 어깨에 힘이 들어갈까 부목까지 해 두고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루사노 수도원 근처에 이렇게 정상적인 마을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여전히 이 좁은 여관 안에 둘이서만 있자니 어색하기 그지없다.

 

저기 말이오.”

 

뭐지.”

 

오늘도 어김없이 내 어깨를 소독한다고 한차례 폭동을 견딘 그의 뺨에 멍 자국이 들어있다. 어깨에 쏟아지는 소독약이 너무 아파, 나도 모르게 버둥거린다는 것이 그의 얼굴에 주먹을 갈긴 꼴이 되어버렸다. 녹색으로 변한 그의 뺨이 어쩐지 나에게 원망하는 것만 같아서 조심스럽게 검을 닦고 있는 그의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아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검 손질하기 바쁜 그는 이쪽에 시선 한번 주지 않는 것이 조금 서운해 입을 다시 열었다.

 

……. 많이 아프오?”

 

전혀.”

 

네 어깨보다야 아프진 않겠지. 무심하게 던지는 그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남과 함께 이렇게 오래 있는 것은 정말 간만이라. 허벅지에 편안하게 놓인 내 새끼손가락에 걸린 붉은 실이 이내 검을 닦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정작 나는 별 생각 없는데 실이 더 아우성인 것 같아서 이놈의 실, 하고 공중에 헛손질을 하는 것 마냥 실을 잘라내는 시늉을 하자 그가 뭘 하는 거냐는 눈으로 이쪽을 쳐다본다. 괜히 그의 시선에 헛기침을 한번 하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잘 생긴 청년이 이런 곳에 와서 이런 일을 하면, 연인이 슬퍼할 거야.”

 

“........그렇겠군.”

 

그의 짧은 침묵과 답에 나는 손으로 침대 모서리를 붙잡았다. 나도 모르게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당연하지. 그럴 수 있다. 지난번에 본 연인도, 서로 인연이 아니지만 서로 연인 이였으니까.

 

이 사람의 첫 사랑이 나라는 것을 바라면 안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 졌다. 어쩌면, 이 인연이 아주 짧아서. 이번 일이 끝나는 데로 우리는 헤어질지언정. 좋은 친구라도 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손을 내밀었다. 검을 잘 닦던 그가 내 손을 보고 검을 허벅지에 내려놓곤 멀뚱히 손을 바라보는 것에 웃으며 내 코드명은 타키온이오. 그대가 어떻게 안 건진 몰라도. 내 이름을 알고 있기에. 이미 이름을 알고 있으니 딱히 별다른 소개는 필요 없겠지만.” 하고 손을 내밀자, 그는 느릿하게 검은 가죽 장갑을 벗곤 그 딱딱하고 굳어버린 손으로 내 손을 아주 약하게 붙잡았다.

 

그래. 토니에게서 얻은 정보지만. 인사는 제대로 해 두는 게 좋겠지. 벨져 홀든이다.”

 

잘 부탁하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낮은 음성과, 마치 건들이면 안 될 것을 건들인 듯. 아주 약하게 잡는 그의 손의 온기에 나는 씩 웃으며 잘 부탁해, 그대. 하고 어색하게 내밀어진 그의 손을 붙잡고 크게 손을 흔들었다.

 

물론 반동 덕분에 상처가 다시 벌어진 건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다.

 

 

 

6.

 

 

 

릭 아저씨!! 여기요! 저희 엄마가 드리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챙겨 주지 않아도 되는데……. 고맙소. 잘 먹겠다고 전해주시오, 우리 예쁜 아가씨.”

 

앞니가 하나 빠진 소녀가 방긋거리며 나에게 손을 흔들곤 알겠다며 곧장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내 뒤에서 삐딱하게 나무 기둥에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보는 그에게 웃으며 와인 한 병과 치즈가 잔뜩 담긴 바구니를 내밀어 보였다. 벌써 이 마을에 잠시 머무른 지도 벌써 2주가 지났고, 생각보다 상처가 꽤 오래 갈 것 같아 이미 그가 지난번 자신의 혈육이라는 그 눈 한쪽에 검상이 있던 사람에게 편지를 보낸 지 꽤 됐지만, 마땅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덕분에 장기간으로 이 마을에 머무르게 되어버린 우리는 최소한의 범위로 여관 주변 정도를 탐색하기로 했고, 그 와중에 길가에 다리를 삐어버려 다친 여인 한명을 도와준 덕에 이런 선물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달갑지 않은 듯, 나에게 핀잔을 주기 시작했다.

 

뭐가 들었을지 알고 덥석 덥석, 잘도 받아오는군.”

 

그래도 아이가 준건데, 괜찮지 않을까?”

 

여긴 루사노 수도원 근처의 마을이다. 교도인 이라면 우리에겐 적이야.”

 

 

그에게 차마 저 어린 아이도 적이라면. 벨 것이오?’ 하는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당연히 긍정의 대답이 돌아 올 것을 나는 알기에. 2주간 살펴본 그는 아주 정직하고 거짓을 잘 모르는 사내였다. 그가 내뱉은 말은 거의 대부분이 진실이고, 솔직함이었으니. 어쩐지 마음이 답답해져 조심스럽게 치즈 한 조각을 때어 먹어보았다.

 

타키온. 아까도 말했지만 그-.”

 

맛있소. 독도 안 들었어. 치즈맛 그대로야. 내가 치즈는 좀 알거든.”

 

“....... 어깨 상처나 벌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그래야. 빨리 돌아갈 수 있을 테니.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구니와 와인을 들고 여관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상처는 꽤 아물었고, 아마 조만간이면 게이트 정돈 열 수 있을 거라며. 여차하면 그를 먼저 보내도 상관없었다. 다 나아가는 기념으로 오늘은 와인 한잔 정도 하자며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자 그가 한숨을 푹 쉬며 먼저 앞서 나가 여관주인에게 잔을 빌리려는 듯 말을 거는 것을 보고 웃었다.

 

그는 생각 외로 꽤나 다정한 사내라며.

 

 

7.

 

 

그래서 말이오. 붉은 실이란 건 그런 의미지.”

 

그 말만 지금 4번째다.”

 

어라. 그랬소? 처음 말한 거 같은데.”

 

 

한밤중에 소소하게 마신 것 치곤 취기가 금방 돌아 잠깐 딸꾹거리며 와인 병을 흐린 눈으로 애써 바라보려 했다. 그래봤자 뭔가 알아낼 건 없지만. 취하니까 비밀 같은 것도 술술 나와 버리고. 같은 술을 마셔도 멀쩡한 저 사람과,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할 것 같은 이쪽의 차이가 갑자기 서러움이 되어 밀려온다. 들어 보니 나보다 나이도 적던데. 적어도 이쪽이 와인을 마실 일이 7년은 더 빠르지 않냐며 한탄을 하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천장이 빙글 빙글 도는 것 같아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니 자려는 것인 줄 알고 이불을 끌어 당겨 덮어 주려는 그의 행동에 웃었다. 안전의 문제 때문에 작은 여관방을 빌렸더니, 침대 하나에 남자 둘이 누워 버리는 기묘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이젠 익숙해 졌다.

 

그래서. 지금도 보이나?”

 

으응?”

 

붉은 실 말이다.”

 

그의 말에 그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느슨하게 묶인 그의 붉은 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새끼손가락과 손바닥이 만나는 손마디를 매만져 주었다.

 

여기에. 있어. 아주 느슨하게 말이오.”

 

누구랑 연결 되어 있지?”

 

그건-. 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몰라. 두 사람이 붙어 있어야 알 수 있소. 아니면 내가 볼 수 있는 거리에 두 사람이 같이 있던지.”

 

아주 바보 같은 거짓말을 해 버렸다. 그런가. 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매만지는 그의 행동이 아이 같아 나도 모르게 소리 내 웃어 버리곤 졸린 눈을 감고 옹알이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대 연인이지 않을까.”

 

글쎄. 아까 네 말대로라면 내 연인이 진짜 내 인연일지는 모르는 거겠지.”

 

그래...? 그럼..... 상대방이.... 만약, 그 진짜 인연이 남자라면..... 그대는 괜찮겠소?”

 

 

나른한 기분 좋은 수면에, 내 몸을 덮는 이불의 온기가 더해져 온다. 그리고 귓가에 나지막하게 들리는 사랑에 있어서 그런 것이 중요 한가?’ 라는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답변이 들려와 나는 조금은 웃었던 것 같다.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겁쟁이인 내가 그대의 진짜 인연이라고 말 할 수 있었더라면.

 

 

 

8.

 

 

처음에 그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아름다운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그를 마주하는 것에 심장이 다 덜컹거렸다. 어제만 해도 내 상처를 봐주던 손길이 여인의 뺨의 눈물을 훔쳐 주고 있었고, 나에겐 잘 보여주지 않던 미소가 그녀에게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조금 섭섭해져 안색을 굳히고 있자니, 그제야 뒤에 서 있던 내가 보인건지 아름다운 여인은 나에게 시선을 주며 독일어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독일어 정돈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그가 여행을 같이 하게 된 일행.’ 이라고 소개하는 것에 눈치껏 허릴 숙여 보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그녀가 드레스 자락을 살포시 잡고 무릎을 잠시 굽혔다 피며 인사하는 것에 웃어보였다.

 

들어가지.”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본 그의 말에 나는 사양할 타이밍도 놓쳐 버리고 그렇게 먼저 앞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뒤를 그저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한 달이 뭐라고.

 

그저 치료 해 주고 말 몇 마디 나눈 것이. 그가 잠깐 웃어 보인 것이 뭐라고 나는.

처음 다짐했던 그 약속도 잊어버리고 이렇게 힘들어져 가는가.

 

마치 이미 이곳에 원래 있던 사람인 것 마냥, 자연스럽게 집사와 메이드 들이 여인에게 인사를 하며 존칭어를 붙이고 나에게 시선을 주는 것에 눈을 깜빡였다. 그가 뒤를 돌아서 내 소개를 간단히 하며, 당분간 이쪽 저택에 머물 손님이라며 정중히 대하라는 말로 그들은 나에게도 인사를 해 보였다.

 

우리는 사는 세계 자체가 달랐다.

 

 

9.

 

 

저녁 식사는 아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와 한 테이블에 앉았지만, 그의 바로 옆에 바싹 붙어 앉은 그녀에 비해 멀찍이 마주 앉은 나와의 거리감은 이로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어린 아이도 아니고, 제 것이 저기 있는데 남에게 빼앗긴 아이마냥 안절부절 못하는 내 모습이 한심해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그들보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 버렸다. 메이드의 안내에 따라 내가 머물 방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부탁해 편지지와 깃펜을 하나 빌려 달라 하곤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린 아이같이 나는 조금은 기대하며. 그가 그녀와 이번 대화를 마지막으로 날 한번 돌아봐 주겠지, 아니, 저 와인이 바닥을 보일쯤. 그때면 나에게 말을 건네주겠지. 하고 생각해 버렸다.

 

때 아닌 짝사랑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자, 고작 한 송이 꽃에서 시작한 것이 온 사방으로 만개하기 시작했다.

 

천장의 고풍스러운 무늬가 그가 사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웠을 때 보이는 싸구려의 저렴한 줄무늬 벽지가 아니라 세공이라도 한 듯 반짝거리는 벽지라니. 손님용 방도 지나치게 고급진 것에 나는 내가 도리어 여기 누워서 이곳이 더럽혀 지는 건 아닌가 싶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방 안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9시가 다 되어 가는 것에 메이드가 오면 약을 부탁해야겠다며 코트를 벽장 안에 걸어 두었다. 타이밍 좋게 돌아온 메이드가 내민 편지지와 펜을 받고, 약 몇 개를 부탁하자 알았다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지은 메이드가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방문을 나서는 것을 보곤 문을 닫았다.

 

예의상. 편지는 남기고 가야겠지.”

 

나는 도망자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사랑의 안녕과 무운을 빌었다.

 

그리고 남은 여행을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도 남겨 두었다.

 

어떤 말이 좋을지 몰라 잔뜩 받은 편지지가 결국 한 장이 남을 때 까지 편지를 쓰다, 문득 옆방에서 들리는 미약한 신음 소리가 귀를 파고드는 것에 나는 편지지 위를 춤추듯 움직이던 펜을 멈추었다. 아까 들었던 그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 창문이라도 열어 둔 것인지, 때 아닌 청각이 예민해 진 것인지.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와, 여인의 신음 소리에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 그 두 사람은 연인이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편지지 위로 물 한 방울 없는 방안에서. 잉크자국이 번지도록 물방울이 떨어져 버렸다.

 

멈추었던 펜을 들고 다시금 억지로 힘을 주어 편지를 마무리 했다. 글씨는 엉망이었고, 갑자기 모든 문장들이 횡설수설 해 버렸지만. 나는 마지막 까지 이를 악물고 편지를 쓸 수 있었다.

 

내가 마지막 편지의 점 하나를 찍었을 때. 그녀의 신음이 멈추었으니까.

 

 

 

10.

 

 

아무래도 메이드가 약을 찾지 못한 것인지, 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는 것에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코트를 다시금 꺼내 들었다. 상처만 치료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상처는 내가 살던 곳에서 병원에 들려 치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며, 적당한 사고 경유를 생각하며 코트에 팔을 끼워 넣고 게이트를 열었다.

 

뭐하는 거지?”

 

“.........”

 

쥐도 새도 모르게 문을 열고, 샤워라도 한 듯 물기 묻은 머리카락에서 흐른 물방울들이 셔츠를 조금씩 적신 것도 모르는지. 그가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문틀에 기대 이쪽을 바라보는 것에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몰래 가려 했는데 말이오.”

 

불편한가? 시녀에게 좀 더 좋은 방을 주라 하겠다.”

 

아니야, 레피드. 지금도 충분히 좋은 방이오. 그대가 내가 살던 집을 보면 아마 놀랄지도 몰라.”

 

그럼 왜 가려 하는 거지?”

 

그의 말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머뭇거렸다. 당신 때문에. 라는 대답은 입 안을 맴돌기만 할뿐.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차라리 내 능력이 없었더라면 조금 편했을까. 우리가 이렇게 서로 헛돌기만 하는 그런 사이가 될 수밖에 없는걸,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참 행성과도 같은 우리는. 그저 다른 행성 주위만 맴돌다가, 부딪히면 터져서 별이 되어 버리는 그런 우리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사이인데.

 

집에. 가봐야 하오. 시바 포, 그녀도 찾아야 하고-.”

 

그녀에 대한 정보도 없이?”

 

“...... 토니에게 물어본다면.”

 

그도 모를 거다. 나만 알고 있지.”

 

그의 말에 나는 말 못하는 조개 마냥 입을 다물었다. 빠져 나갈 구멍을 점점 틀어막는 그의 행동과, 나의 침묵에 그가 뒤에 감추었던 약 상자를 들고 천천히 나에게 다가 오는 것에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게이트는 열렸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미안, 레피드.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소. 그러니, 이젠 다른 조수를 데리고-.”

 

그녀와 나는. 붉은 실이 이어져 있나?”

 

나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래.’ 하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나의 대답에 나를 응시 한 채 침대에 걸터앉고는 늘 그랬듯 손바닥으로 침대를 두어 번 두드렸다. 이리 오라는 뜻. 그리고 이내 협탁에 올려 둔 내 편지지를 발견하곤 펼쳐 볼 생각도 없이 나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정말인가?”

 

“.........”

 

나는 그녀와 이어져 있나?”

 

그런데 왜 나는. 왜 이렇게 뭔가 부족하지.

 

그의 말에 나는 결국, 점점 사그라지는 게이트 너머로 뛰어들지도 못하고 그렇게 자리에 멍하게 섰다. 그는 은연중에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인연이 아닌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최선을 다 해준다는 것을. 아직 내가 그의 인연인 것을 눈치 채진 못한 것일 테지만. 나의 미동 없는 반응에 결국 그가 직접 일어나 내 손을 이끌고 침대에 나를 앉히는 것에 나는 그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땅만 쳐다보았다. 치료를 할 작정인지, 약이 든 통을 내려 둔 체 천천히 코트를 벗기고, 셔츠를 벗기려 내 셔츠 아래쪽에 손을 대는 순간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할게.”

 

됐다. 무리하게 팔을 움직이면-.”

 

그대 인연이. 누군지 알고 싶소?”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지도 모르는 것을. 푸른 눈동자가 정직하게 나를 바라본다. 나는 떨리는 입을 열려고 애를 썼다. 그 인연이 나야. 그대도 그걸 알아서 나를 붙잡아 두는 것이오? 아니면 그저 다친 사람을 치료해 주기 위해서. 선량한 온정을 베풀려고 나를 잡아 두는 것이오? 물어보고 싶고 대답하고 싶은 것이 머릿속에서 몰아치고, 턱이 점점 떨리는 것을, 그가 내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는 것에, 모든 생각을 멈추었다.

 

아니.”

 

“.........”

 

지금은. 그렇게 궁금하지 않다.”

 

문득, 그의 뺨에 아직도 연하게 남은 그의 멍 자국이 보였다. 내 흔적이 사라지는 그 모습이 지금 나와 같아 보여서. 충동에 이끌리듯, 그의 양 뺨을 양손으로 붙잡곤 천천히 그의 멍 자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나를 밀어내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그냥 눈을 가만히 뜬 채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바라 볼 뿐이었다. 시간이 마치 억겁이라도 지나가는 것 마냥. 느릿하고 또 느릿해서, 그의 뺨을 붙잡은 손을 내려놓을 생각도 못하고 있으려니. 내 손바닥을 붙잡고 그 손바닥에 정중하게 입을 맞추는 행동에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는 알고 있는 것이오?”

 

?”

 

그대 인연이 누군지.”

 

“........ 잘은 몰랐는데.”

 

그가 내 손을 붙잡았던 손을 내렸을 때. 나는 그의 새끼손가락에. 아주 단단하게 매여진, 붉은 실을 바라보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묶여버린 그 붉은 실. 크게 눈을 뜨고 다시 바라보아도. 완벽하게 탄탄히 묶여진 그 붉은 실의 주인이 입을 마저 연 것에 나는 그대로 내 얼굴을 손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알 것 같다.”

 

 

11.

 

 

결국 그는 내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말았다. 상처를 치료해 주고, 방을 나서려는 그의 손을 붙잡은 것도 나였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내 고백에 따라서, 무언가가 바뀔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와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서로의 감정을 제대로 정리 할 시간이. 그는 내가 붙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대로 내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예전엔 그렇게 비좁은 침대가 바짝 붙어 잘 수밖에 없는 공간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큰 침대에서도, 나와 그는 작은 침대에 누워 있던 것 마냥. 여관에서의 밤처럼 나란히 붙어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때 이른 아침. 새벽에 나는 눈을 뜨고 게이트를 열었다. 편지는 다시 내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이제는 이 편지가 필요 없음을 알기에. 가기 전, 그의 뺨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안녕, 벨져.”

 

난생 처음 말해보는 그의 이름이 낯설지만. 그렇게 한참을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떨어졌고, 마지막으로 게이트를 타고 가려는 순간. 눈을 뜬 채 이쪽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게이트가 닫혔다.

 

 

 

 

12.

 

 

술래잡기를 하기엔 조금 늦은 나이가 아닐까 싶었는데. 그를 피해 도망치듯 내 집으로 왔다.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고, 그에겐 아직 우리의 관계가 괜찮을지에 대한 여부에 대해서 질문하지도, 혹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도 전혀 듣지 못한 채 그렇게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그렇지만 우습게도. 날이 가면 갈수록,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날수록. 새끼손가락에 걸린 붉은 실이 점점 팽팽해지는 것을 느끼며 내 심장이 덜컥였다.

 

그가 나를 찾고 있다.

 

일주일간 바닥에 늘어졌던 붉은 실은 어느새 바닥에 조금 떠 있을 정도로 가까워 졌음을 알려주었다. 나는 급하게 배낭을 챙겼다. 벌써부터 코끝에서 그의 향기가 맴도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고 가방에 잡히는 것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아직 시간은 남고, 여유는 있었다. 그가 완전히 이 집 근처에 온 것은 아닐 거라며. 외상으로 사 둔 가게에 제대로 된 값을 지불하는 데로 바로 이곳을 떠나자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일기 예보에서도 없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솔직히. 그가 나를 찾는 다는 느낌은. 꽤나 이 늦은 33살에 너무나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이여서. 그저 지나가는 인연중 하나로 스쳐 지나갔다면. 우리가 다시 만날 일 따윈 정말 없게 할 자신이 있었는데. 그냥 여기서 기다릴까? 자신 없던 내 마음 하나 고백이나 해 보고 도망쳐 버릴까? 그는 왜 나를 찾아 온 거지? 하는 수많은 질문들에 휩싸여 머뭇거리는 순간 갑자기 팽팽하게 당겨지는 손가락의 실에 나는 놀라서 내가 있는 이 건물, 구석진 빌라의 복도를 쳐다보았다.

 

“.........”

 

“........”

 

찾았다. 그의 눈은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처음 봤던 것과는 달리 완연한 정장 차림의 그 모습에 나는 서둘러 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않고 게이트를 열었다. 그가 내 능력을 보고 순간적으로 도약하는 모습이 보여 나는 기함을 하며 서둘러 이동하기 위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무 좌표를 생각해 냈지만 그 전에 강하게 어깨를 파고드는 그의 손아귀 힘에 순식간에 게이트가 다시금 닫혀 버리고 나는 벽에 밀쳐져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

 

타키온. 그 능력은 참 부러운 능력이야.”

 

아주, 도망치기 좋은 능력이지. 자신만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꽤 화가 나 보였다. 평소보다 조금 찌푸려진 단정한 눈썹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비를 맞고 온 것인지, 머리카락에 물기 몇 방울이 뚝뚝 떨어져 흘러내리는 것을 보곤 그를 외면하고 어깨를 감싼 채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지만 이렇게 무기력하지.”

 

약점을 잡힌다면 말이오. 차마 그것이, 그대가 내 연인인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못했다는. 그런 약점이란 것을 말하지 못하고 그저 어깨가 다쳤다는 핑계를 대듯 어깨를 매만졌다. 순간적으로 밀쳐져 버려 어깨가 다시 삐걱 거리는 느낌이 나 한숨을 푹 쉬고 있자니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내 턱 끝에 올렸다.

 

다시 도망치면. 어깨 상처가 더 벌어지게 해 줄지도 모른다.”

 

내게 그대가 그럴만한. 가치나 있소?”

 

그대는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았소? 그저 가지고 싶던 장난감이 사라져서 그런 거겠지. 나는 그렇게 자조적으로 대답하며 그를 향해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단정한 그의 눈썹 한쪽이 올라가더니 그가 픽 웃으며 검을 치우곤 다짜고짜 문이 열려 있는 내 집 안으로 나를 끌고 들어와 이 방, 저 방, 문을 벌컥거리며 열곤 어지럽게 옷가지가 널어져 있는 침대 위로 나를 던지듯 눕혔다.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이 내 뺨에 닿는 것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봤자 몸 위를 덮치듯 올라온 그와 마주하는 눈빛에 뺨을 타고 빗물이 흐르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체 그렇게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네가 내 인연이겠지.”

 

아니.”

 

나는 바로 답을 해 주었다. 부정했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을 나는 내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내가 더 지위가 낮거나, 신분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그저, 내가 먼저 꺼낸 붉은 실에 대한 말의 호기심으로 그의 감정이, 그 호기심이 사랑이라고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 라고 말하는 순간, 실 때문에 인연이 되는 것만 같아서. 나는 온힘을 다해 그를 밀어 내려 애썼다.

 

그럴 리 없어.”

 

, 무슨-.”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없었을 때 불안해하며 널 미친 사람 마냥 찾아다니진 않았겠지.”

 

그대는 연인이 있잖소.”

 

그대 저택은. 방음 처리에 대해서 잘 고민해야 할 것이오. 특히 손님방은 더더욱. 덕분에 편지를 쓰는 내내 집중도 못했거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를 악물고 그를 밀쳐 냈다. 도리어 침대에 누워버린 그의 위로 올라탄 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곤 그에게 입을 열었다.

 

나는 남자야. 여인처럼 아이를 낳아 줄 수도, 그렇다고 그대에게 지금 그 연인 보다 더 많은 것을 줄 자신도 없소. 난 아주 평범하지. 우리는 안 돼.”

 

내가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대는 몰라. 이건 단순히 그대와 나 사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릭 톰슨.”

 

난생 처음으로 그가 풀 네임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에 몸을 굳혔다. 멱살을 쥔 내 손 위로 그의 가죽장갑을 낀 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내 손을 감싸 왔다. 억지로 자신의 멱살을 잡은 내 손을 풀어내기 위해 주먹을 말아 쥔 내 엄지와 손바닥 사이로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집어넣으며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

 

남의 시선을 신경 쓰기 전에, 나를 보고. 나에게 맞춰야 한다 생각하기 전에. 내가 맞출 수 있다는 생각을 해라.”

 

나는 가정을 만드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냥. 편하게 쉴 수 있는 품이 필요할 뿐이야. 네가 보는 붉은 실 모두가, 이성에게만 한정된 붉은 실은 아니지 않나.

 

공녀는 이미 정리했다.

 

기회를 줘. . 네가 나에게서 도망 칠 기회를 가졌듯. 내가 널 은애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고려해 보면, 안되겠나?

 

조용히 아이를 달래는 말투로 말하는 그의 행동에 내 손바닥 안에 들어 찬 그의 엄지손가락을 끌어안는 것 마냥. 손을 주먹 쥐었다. 그저 도망치기 바쁜 나 보다 그는 훨씬 더 성숙한 어른이었다.

 

 

13.

 

 

내 꿈은 아주 작고 소박했다. 나는 어떤 여인과 혼인을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아주 부드럽고 다정할 것이고. 우리가 사는 곳은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조그만 시골 마을의, 정원이 딸린 주택일 것이다. 그녀는 내가 만든 벚나무 아래의 벤치를 가장 좋아할 것이고, 그런 나는 그녀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얹고 그녀가 읽어주는 책의 내용보다,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눈을 떴을 때 마주하는 그 아름다운 눈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입 맞출 거라 생각했다.

 

사람의 고정된 생각을 바꾸는 것에는 아주 큰 혼란이 오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 외로 고정된 생각은 아주 쉽게 부셔질 수 있다는 사실도.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사랑의 그 많은 가지들 중 하나였다.

 

사랑에는, 누군가 정해 놓은 형태가 없었다.

 

 

그와의 어린 아이 장난 같은 치고 박는 말다툼 끝에 침묵이 맴돌았다. 거의 지치다 시피 그의 옆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누워 버리곤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려버렸다. 내 안의 자아가, 그를 사랑해도 괜찮다와, 그러면 안 된다는 파로 나뉘어 싸우기 시작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였다.

 

타키온.”

 

“.........”

 

나는 붉은 실 따윈 보지 못하지만. 작은 바람이 있다면.”

 

네 입으로 네가 내 인연이라고. 그렇게 말해 줬으면 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이불을 뒤집어 쓴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차마 앞만 가리고 있던 이불은, 몸이 일으켜지기 무섭게 팔과 함께 떨어져 내 다리를 겨우 덮고 있었고, 그에게 등을 보이며 안긴 내 목덜미에 조심스럽게 입술이 떨어져 내렸다. 그 부드러움에 몸을 움츠리고 있자니 그는 정말 피곤했는지, 곤함이 담긴 목소리로, 정말 그래줬으면 한다. 이 감정에 마침표가 필요하거든. 하고 내 목덜미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기대었다.

 

언뜻 본 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손가락에 메여진 붉은 실은, 새끼손가락을 벗어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마냥 칭칭 감겨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내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실마저 그의 편을 들어주듯,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단단히 묶인 붉은 실에 나는 벌써 달이 빛나는 창문가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올리곤 나는 반쯤 털어 놓듯.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벨져.

 

.

 

자고 가겠소?

 

그리고 그는 나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고 목덜미에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이내 귓가에 들려오는 ,

 

.

 

하는 소리에 나는 안도했다. 이제는 내가 용기 낼 차례가 되었다고. 그렇게 나는 그와 침대에서, 제대로 옷도 벗지 못하고 손을 잡은 채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어딘가 초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웃으며, 그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좋은 아침, 사랑하는 벨져.

 

 

 

14.

 

아니라니깐.”

 

맞다니까. 이쪽이오.”

 

지난번에 왔던 길인데 모르겠나? 저쪽이 틀림없다. 이리와.”

 

이런 재수 없는 녀석이 내 인연이라니. 어디서 이래라 저래라 인가. 툴툴 거리며 그의 무릎 뒤로 내 무릎을 굽혀 그의 무릎에 힘을 빼게 하자 그가 휘청 하며 움찔거리는 것을 보고 고소해 했다. 그가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뒤를 돌아보는 것에 생명의 위기를 느꼈지만. 한 겨울에 도넛 가게를 찾지 못하고 지도 하나만 의지 한 체 이 길이 맞다, 저 길이 맞다 논하는 것도 지쳐 그에게 팔을 벌렸다. 그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게 무슨 포즈냐며 물어보는 것 같아 나는 당당히 외쳤다.

 

업고 가시오.”

 

?”

 

그대가 틀리면 내 손해지.”

 

걸어가는 에너지를 줄이겠다, 이 말이오. 그대가 틀렸으면 내가 걸어온 길과 시간이 손해니까. 내가 큰 인심 써서 시간 빼고 길 값만 받아주겠다 이거요. 하고 대답하니 그가 헛웃음을 지어보이며 이내 내 무릎 뒤쪽과 등 쪽으로 손을 넣고는 번쩍하고 나를 들어 올리는 것에 눈을 크게 뜨며 왁왁 거렸다.

 

아니 이거 말고!!! 등에 말이오!!!”

 

널 등에 업으면 내 등골이 휠 건데, 그건 내 손해니 팔에 들겠다. 무슨 문제라도?”

 

“..........참 학습능력도 좋아.”

 

그렇지만 그대, 여기가 시내 한복판이란 사실을 좀 알려줬으면 하는데. 당연하게도 쪽팔림은 나의 몫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그의 배를 팔꿈치로 팍팍 치니 그가 인상을 쓰며 결국은 내려 주는 것에 나는 얼굴을 가린 한쪽 손의 손가락 사이를 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뭐 하냐는 듯 한쪽 눈썹을 보기 좋게 끌어 올리며 손을 까딱였다.

 

이제는 어색했던 그의 손이 무색하리 만큼, 자연스럽게 딱 맞게 깍지가 껴지는 것에 픽 웃었다. 그에게 아직 한번도, 그대가 내 연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그러니까, 그가 우리 집에서 자고 일어난 기점으로 그의 행동은 완전히 달라졌다. 어쩐지 조금은 틱틱 거리던 그 말투도. 자존심 강하고 오만한 도련님의 행동도. 아주 조금쯤은 나에게 더 양보하고, 내 이야기를 더 들어주는. 그런 방식으로 변해 가는 것을 내 두 눈과, 귀로. 손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순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따라 자꾸 부려먹는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인건가.”

 

이게 다, 사랑이지.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깍지 낀 손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 인연이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