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 발언이 있는 베인밀레톨비 현대AU 입니다.
오페라의 유령 AU도 있습니다.
1.
“-해서 될까 하는데.”
“되겠냐고.”
어어, 안될 건 또 뭐야. 근데 말이 좀 짧다?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후원자를 보자니 복장이 터졌다. 여기가 무슨 오페라 가르니에도 아니고. 그 정도 규모가 가능하겠냐고.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대본을 움켜쥐었다. 이 크지 않은 규모의 도시에서 좁아 터진 규모의 오페라 극장에 ‘오페라의 유령’을 *이머시브 시어터 형태로 만들자니. 말이 되겠는가. 움켜쥔 주먹으로 저 녀석 얼굴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그렇지만 연출가로서는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이런 소규모 극장에서 자유롭게 원하는 모든 걸 그려낼 수 있다는 건, 흔한 기회가 아니니까. 천천히 이성이 머릿속을 지배하자 대본을 쥐었던 손에 힘이 풀린다. 그것을 본 후원자인 친구 녀석은 그럴 줄 알았다며 싱글벙글 웃고는 유유히 문손잡이를 잡고 문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다른 후원자도 오기로 했어. 옛날부터 이 극장을 대대로 이어가던 사람인데. 이번 극은 흥미가 있는지 꼭 보고 싶다고 했거든. 아무래도 지난번 일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쪽이 투자 지분도 많아서. 어쨌든 극장 주인이 와보겠다는데, 말릴 명분이 있어야지. 아무튼, 난 간다. 잘 해봐! 유유히 손까지 흔들어 보이며 나선 친구 녀석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소파에 털썩 앉아 앞머리를 후-. 하고 입바람으로 넘겼다. 연출 짜기도 힘든데, 고객 만족까지 시켜줘야 한다는 건 너무한 처사 아닌가. 나는 천천히 감기는 눈을 껌뻑거리며 내일 손님을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할 목록들을 천천히 뇌로 되새김질하였다. 그래도 극장에 대해 잘 알 것 같으니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머시브 시어터 : 관객 몰입형.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없애거나 넘나드는 형태. 창작자가 만들어낸 장면들이 모든 관객에게 제공되는 게 아니라, 특정 장소에서만 진행되고, 관객은 그 장면을 감상할지 아니면 다른 장면을 찾아 이동할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율권을 얻게 된다.)
2.
“안녕하세요.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늘 멀리서 본다고 제대로 인사드리는 걸 잊었네요.”
보통은 그걸 까먹었다 하죠. 보통은. 나는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그가 내민 단단한 손을 붙잡았다. 커다란 몸에 굳은살이 잔뜩 박인 맨손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른 게 아니고, 연세 한 70은 될 노인이 올 줄 알았더니 황금색 컬로 머리를 말아 올린 훤칠한 청년이 올 줄 몰랐으니까. 이내 숙여 보였던 허리를 편 청년은 자신을 ‘톨비쉬’라고 말했다.
“사실, 저는 이 극장에 대해서 그렇게 깊게 알진 못합니다. 이전 사건이 조금 더 신경 쓰여서 와본 게 더 크지요.”
“아, 인부 추락사건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이 극장은 소규모인데, 무대 설치 작업 중 떨어져서 사망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으니까요. 소문이 밖으로 완전히 새나가기 전에 막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 녀석이 손 쓴 거겠죠. 어떤 쪽이든. 나지막하게 톨비쉬가 무어라 말하는 것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상념에 잠긴 듯 일자로 굳게 다문 입매가 좀처럼 펴지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새끼손가락으로 가볍게 후벼 파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무튼, 한 바퀴 둘러보죠. 당신이 다치는 것까지는 원하지 않으니까요.”
자연스럽게 내민 손에 내 손이 저절로 얹어지는 것 같았다. 커다란 식빵 위에 덩그러니 올라간 피클 한 조각 같은 느낌이 드는 손 차이가 낯설다. 낯설고 익숙하다. 어쩐지 그는 양손을 가지런히 배 앞쪽으로 모으고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념은 좀처럼 쉬이 잊히질 않았다. 그를 따라 난생처음 극장 구석구석을 다 확인할 때까지도 말이다.
“흠. 큰 이상은 없네요.”
큰 이상은 없지만, 극장 구석구석에 이상한 장치들을 아무렇지 않게 부수고 다니지 않았나? 이 극장에 지하가 있었던 사실은 처음 알았을뿐더러, 지하 극장 안에 나누어진 방들은 누군가 방금이라도 살았던 것처럼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는데? 거기 무기도 걸려 있었는데? 엄청나게 빨갛고 검은 거 같은 대검 같은 게? 나만 놀란 건가? 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개입한 것도 아니고. 정말 실수였나.”
“……. ‘그’라니요?”
“아. 별거 아닙니다.”
제발 별거니까 말해주세요. 나는 떨리는 입술을 열지도 못하고 덜그럭덜그럭 거렸다. 내 손을 붙잡은 그가 무언가 눈치챘는지, 내 손 위에 다른 손을 포개 올리고는 웃어 보였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나지막하게 말하는 그의 머리 위로 창문에 비친 햇빛이 그대로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제가 함께 할 테니까요.”
“극을 말씀하시는 게 맞죠?”
“아.”
물론, 이 정도의 ‘극’ 또한 마찬가지긴 하죠. 그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혼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혹시 모르니 항상 극장 로열석 한 칸을 비워두라고 콕 짚어 말했다. 거긴 5번 박스석인데. 아까 같이 볼 때도 분명 거기서 누가 와인 한잔 마시고 간 느낌이 들지 않았나. 병이랑 와인이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차 있는 와인잔도 포함해서.
“그 새-.”
아니. 그 녀석은 그래도 저를 불쾌해하지, 당신을 불쾌해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가 지켜보면 별일 없겠죠. 무언가 오히려 안도한 얼굴에 나는 덩달아 안도했다. 어쨌든 그는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았으니까. 분명히 사람이 없을 때 늘 정돈된 오페라 극장을 누가 활보하고 다닌 것 같은 느낌만 빼면 말이다.
“혹시 모르니 검은 짐승을 조심하세요.”
“짐승? 뭐, 고양이나 쥐, 개. 이런 거요?”
“인간도 짐승의 부류 중 하나죠.”
‘그걸’ 인간이라도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나지막이 또 말하는 그의 입술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나는 결론을 내렸다.
친구 녀석이 소개해주는 놈 중 제대로 된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이다.
3.
“어쨌든, 오페라가 주가 되어야 하니 메인 홀이랑 1층은 파티 연회처럼 꾸미고. 2층은 귀빈 접빈실처럼 꾸며서, 자유롭게 작중 인물들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도록-.”
“지하는요? 지난번에 지하도 쓰신다고 하셨죠?”
“……. 거기는 그냥, 쓰지 말죠. 대신 테라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요. 창문의 커튼을 벨벳으로 바꿔서 무겁게 내려앉으면 소리도 같이 들리지 않게.”
“저희야, 물건 옮기기 편하니 상관없습니다만…….”
물론, 나야 지하를 활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모든 지하의 자원이 ‘오페라의 유령’을 위한 장소처럼 안성맞춤으로 이미 누군가 사용하고 있었던 걸 봤으니까.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톨비쉬 그와 함께 내려갔던 곳을 그대로 내려가려 했지만, 갑자기 땅이 꺼져서 다시 1층으로 올라온다든지 하는 알 수 없는 함정들이 곳곳에 튀어나와서 그 방들로 갈 수조차 없었다.
‘진짜 오페라의 유령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하.’
“아무튼, 연극 개봉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 준비해 주세요. 예전에 안 좋았던 일이 있으니 다들 보호장구는 꼭 착용하시고요.”
“옙.”
인부들은 서글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여 보이곤 착실하게 작업을 시작했다.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컨셉 답게 화려한 오페라 하우스를 꾸며야 고객들도 자연스럽게 이입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이번 컨셉은 오페라의 유령 마지막 장면 연출인 가면무도회를 표현할 것이다. 더더욱 공간 활용도가 높아야 한다. 극을 보러 오는 게 아니라, 분위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올 테니.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메인 홀의 임시로 만든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그 순간 갑자기 어지러움이 머릿속을 강타하고 시야가 까맣게 물들어가며 아스러지는 내 몸이 느껴졌다. 너무 무리했나. 여기 높은데 괜찮을까? 느릿한 시야로 뒤늦게 발견한 사람들이 놀라 이쪽으로 달려오려 하는 게 느껴지기도 전에, 꺼져가는 시야에서 낮은 목소리가 먼저 뇌를 지배했다.
“그대는-. 위험한걸 즐기나 봐.”
와인이 부족했던 찰나였는데. 와인 대신 다른 거로 목을 축일 뻔했군. 그리곤 무언가 서늘하고 단단한 것이 내 몸을 받쳐 주는 게 느껴지자, 나는 ‘살았다.’라고 생각하며 눈을 그대로 감아버렸다. 닫히기 직전 시야로 분명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던 것 같지만. 지금 그것을 인식하기엔 무너지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으니까.
기 전에, 빨리 완성을-…….
그게- 아니-.
얼마나 쓰러졌는지, 천천히 정신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머리 뒤로 말랑하면서 딱딱한 베개가 느껴졌는데, 의외로 편안해 눈을 감은 채 숨을 깊게 몰아 내쉬자 또 한 번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리듯 들렸다. 그것도 심지어 극장 안을 꽉 채우게 울리면서.
“시끄럽군. 병자가 있는 건 참고해야지?”
그러자 삽시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을 하다 보니 나는 소음까지는 어찌할 수 없는지 뚝딱거리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다시금 울리기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의 남자는 내 몸을 안아 올렸다. 여기선 쉴 수 없다는 것이 인식된 것인지, 그가 점점 걸음을 옮기자 주변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드르륵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나고, 몸이 위아래로 들썩일수록 습하고 쿰쿰한 곰팡내가 조금 나기 시작했다. 지하구나. 이 사람도 지하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신 정도의 덩치면 제법 무게가 나갈 텐데도. 가볍게 안아 올려 성큼성큼 내려가는 것도 이상했고, 함정이 그렇게 많았던 지하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가는 것 또한 신기할 뿐이었다.
“그놈이 왔다 갔나 보군.”
몇 개가 우그러져 버렸잖아? 무식하게 힘만 좋아선. 낮게 웃는 듯 말하는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울리는 것에 나는 침을 삼켰다. 지하실의 주인이구나. 지난번, 톨비쉬와 와서 지하를 헤집어 놓은 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것일. 까? 흠. 마음에 들었다 하니 좀 이상한데. 고민도 잠시, 어딘가 푹신하고 짙은 향이 가득한 곳에 몸이 눕혀지자 저절로 몸이 노곤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일을 한다고 무리를 했던 게 누적되었는지, 더는 버티지 못한 탓일 거다. 이대로 더 잘까 싶어 여전히 감은 눈을 뜨지 않고 천천히 수면 밑으로 가라앉듯 몸의 힘을 풀려 하니 무언가 제 몸 양옆으로 푹푹, 하고 눌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묘하게 제 뺨 위에 그늘이 드리워지는가 싶더니 차갑게 느껴지는 바람이 제 얼굴에서 간헐적으로 느껴졌다.
“눈 뜨지?”
“.......”
목소리가 너무 가깝지 않아? 눈을 뜨면 다른 의미로 위험할 것 같은데? 나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잠꼬대인 것처럼 내 위의 존재를 팔을 뻗어 밀 듯 몸을 뒤척이려 했다. 그러자 일 순간 얼굴에 느껴지던 바람이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이 사람이 없어졌나?’ 싶을 정도로 인기척이 없어지자, 천천히 감은 눈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가장 처음에 보인 건 검은 셔츠와 몇 개 잠가지지 않은 셔츠 사이로 드러나는 탄탄한 가슴.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올려 보자, 유난히 한쪽 눈을 가려버린 이상한 칠흑빛 머리를 가진 남자가.
“차라리 감는 게 좋았을 수도 있겠군.”
마치 익숙한 만남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 내려다보고 있었다.
4.
“그래서?”
와작. 커다란 그릇 안에 이름도 모를 달달한 과자를 한 움큼 퍼담아 품에 안고 침대 위에서 게으르게 먹는 건 집에서도 해보지 못한 사치 아닌가. 나는 입안에 쏙쏙 들어오는 과자를 우물거리면서 삼키다가 말을 이어갔다.
“지하를 쓰고 싶었는데, 함정이 너무 많더라고요.”
“아하. 아무래도.”
또 한 번 입안에 쏙쏙 들어오는 과자에 나는 이제 슬슬 부끄러움이 더 앞서 오기 시작했다. 얼굴을 처음 보는 남자가 갑자기 피곤하다면서 덜렁 나를 뒤에서 안아 침대 맡에 기대고는 뭐라도 먹인다는 신념인지, 침대 협탁 위에 있던 커다란 유리그릇을 내 품에 안겨주고 말을 끝낼 때마다 하나씩 입에 넣어주는 게 아닌가. 게다가 너무 편안한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 같아 몸을 뒤척이면 알아서 눕기 좋은 자세로 등받이 쿠션을 자처해준다.
“다른 사람은 여기에 들어올 권한이 없으니까.”
“권한은 어떻게 얻죠? 정말 잘 꾸며져서 꼭 활용하고 싶은데…….”
“그대만 오는 거면 상관없지.”
그대? 누가 보면, 이 사람이 오히려 오페라 배우인 줄 알겠다. 언제 적의 말투를 구사하는 것인지. 그렇지만 ‘너’라고 부르는 것보다 그쪽이 덜 위화감이 있게 느껴지긴 한다. 왠지 저 사람의 입에서 ‘너’라고 불리는 순간 엄청난 각오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해. 어쨌든 지하를 쓰는 건 어렵겠군. 방 하나를 지하실처럼 꾸며야겠어. 지하를 쓰게 해준다 해도 문제인 게, 지난번에 톨비쉬와 여길 왔을 땐 이런 엄청난 침대가 있던 건 보지도 못했다. 여긴 아무래도 지하 더 안쪽인 것 같은데. 어둡다 하기엔 군데군데 21세기와 어울리지 않은 촛불이 가득 켜져 일렁거렸다. 검은 반투명 차양이 침대 주변을 가득 메꾸고 있어서 밖은 흐릿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지하엔 내가 모르는 장치들이 더 많을 거란 뜻이다.
“이제 슬슬 가야겠어요.”
“어딜? 부지런도 하군.”
“일해야죠. 개봉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한두 달쯤, 남았으니까.”
졸린데. 투정이라도 부리는 듯 내 허리를 감았던 팔에 힘을 주는 게 느껴져 숨을 흡-. 하고 들이마셨다. 그러자 낮게 웃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린다. 많이 웃겼는지 등 뒤로 그의 배가 조금 떨리듯 근육이 움직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사람이 진짜. 협탁에 아슬하게 손을 뻗어 유리그릇을 내려두고는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가 팔을 붙잡아 훅 끌어당겼다. 몸을 뒤집으며 일어나려 하던 터라, 그대로 그의 품에 안기듯 다시 누워버린 것에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러다가 여기서 붙잡힌 상태로 죽는 거 아니야.
“더 쉬도록 해. 오늘 하루쯤, 그대가 없다 해도 어디가 멸망하는 곳이 아니잖아. 특권을 누릴 생각은 항상 없군.”
“그래도,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아픈 사람 보고 일하라 하는 가학적인 취향을 가진 놈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대를 찾지 않을걸.”
그런가. 그의 품에서 조금 바르작거리다 이내 몸에 힘을 주고 고쳐 눕기 위해 그의 배 위에 올라탄 제 몸의 허리를 조금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바람에 펄럭거린 탓인지 그의 왼쪽 눈을 덮은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져 그사이의 살이 살짝 드러나 보이는 것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런. 자세히 보면 위험해.”
“다쳤어요?”
“뭐. 비슷해.”
천천히, 그의 몸 위로 더 올라타 팔을 뻗어 그의 눈을 가렸던 앞머리를 쓸어 올리자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한쪽 눈가가 짓물러진 눈이 단단히 눈꺼풀을 덮고 있는 것이 보여 엄지로 그 부분을 쓸어 만져 보았다. 무언가 동물 가죽의 토돌함 같은 거친 느낌이 날 정도로 짓물러 있다. 내가 그의 뺨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생각도 못 할 정도로 그의 한쪽 눈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흉하고, 보기 싫게 뭉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이름이 에릭이라던지.”
“아하. 그대가 이번에 연출하는 그 오페라의 유령? 아쉽게도. 내 이름은 베인인데.”
“그렇지만 눈도 이렇고, 지하도 이렇게-.”
“그대는 21세기를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해.”
여긴 원래부터 내 작업실로 점찍어 두고 물건을 들여다 놓은 거니까. 그대가 여기에 온 진 얼마 되지 않았으니 모를 법하지. 그는 어리광이라도 피우는 듯, 내 손에 제 뺨을 비비적거리며 웃었다. 하긴, 모든 게 너무 판타지적으로 일치하니 오히려 더 수상할 정도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려니 그가 입꼬리만 말아 올려 웃고는 나에게 말했다.
“불쌍해?”
“예?”
“이 왼쪽 눈이. 불쌍하고 안타깝게 느껴지나?”
“그건-…….”
물론, 누군가가 다쳐서 상처를 받았다면 안타깝기야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누군가를 동정하기엔 자기도 대단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묘한 대사를 친 것과는 대조되게 느긋함이 넘쳐나는 그의 얼굴엔 기대감이 감돌았다. 그가 어떤 대답을 원할진 몰라도,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닐 수도 있을 텐데도 말이다.
“안타까운 건 사실이죠. 당신이 양쪽 눈을 다 직시해서 본다면 어떤 느낌일지 잘 모르겠거든요. 하지만, 불쌍하진 않아요.”
“불쌍하지 않아?”
“예. 전혀. 눈 하나가 없다고 당신이 당신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니.”
그대는 역시 너무 물러.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몸을 끌어안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리는 몸이 떨어지기 싫다는 것을 체감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빠져나가려면 할수록 강하게 옥죄는 그의 팔이 생각보다 이젠 익숙하고 안락해지기 시작했다.
“더 자. 아침이 되면 깨워주지. 그때가 되면, 내가 그대를-.”
도와줄게. 얼핏 그렇게 들었던 것도 같다. 그래, 그러라지 뭐. 하루만 나태해지자. 하루만, 무언가 이 슬프고도 차갑고 따듯한 짐승과 깊은 잠에 빠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딱 하루만. 나는 그렇게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더 바짝 붙였다. 어딘가 짙은 숲의 타오르는 장작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5.
“좋아요. 조명은 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쓰지 않고, 샹들리에를 활용하죠. 되도록 초를 쓰고요.”
“화재는 염두에 두는 게 좋을걸.”
“…. 전기로 된 초를 쓰는 게 좋겠네요. 불꽃이 일렁거리듯이 착각할 수 있는 초 있죠? 그걸로 부탁드립니다.”
그래, 돕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이상하게 연출보다 안전에 더 신경 쓰는 느낌이 강했다. 제법 사소한 것도 덕분에 꼼꼼하게 바꿔나가기 시작하자, 적어도 사건은 안 터지겠다 싶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리허설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오페라의 유령인 에릭과 그의 짝사랑 대상이자 디바인 크리스틴 다에.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절친이었던 라울 드 샤니까지. 모든 주연과 조연들이 모여 리허설을 시작하자, 그럴싸한 무대가 완성되었다.
“연출가님, 가면은 일단 공수해 왔습니다만. 고객분들의 얼굴 외형이 어찌 될지 몰라 가능하면 반 가면으로 손잡이를 달아 준비했습니다.”
“아, 좋아요. 훌륭해요. 주인공이 쓸 오페라의 유령 반 가면도 준비됐나요?”
“네네. 얼굴형을 떠서 만들었습니다.”
이내 소품 담당자가 하얀 반 가면을 내밀어 보였다. 주인공 얼굴을 본떠서 만든 건진 몰라도 광대나 콧잔등이 잘 표현된 것을 앞뒤로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가면이 벗기는 장면에서도 얼굴에 흠집이 나진 않을 것이다. 만족스럽게 보고 있자니, 이내 소품 담당자가 비슷하게 생긴 검은 가면을 나에게 내밀어 보였다.
“이건, 지난번에 부탁하신 다른 가면입니다. 여분인가요?”
“아뇨, 따로 선물할 사람이 있어서요. 감사합니다. 관객들이 쓸 가면은 입구 근처에 상자째로 내려놔 주세요. 다른 가면은 제가 검수하고 배우들 대기실에 두겠습니다.”
“예, 예.”
바지런히 소품 담당자가 상자를 챙기는 것에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검은 가면으로 눈을 굴렸다. 원래 오페라의 유령 원작에서는 하얀 가면이 아니라 검은 가면을 쓴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유명한 건 오히려 하얀 가면이니. 구태여 원작을 꼭 지키는 방식으로 갈 필욘 없었다. 나는 한쪽에서 느긋하게 소품 중 하나인 원숭이 모양의 심벌즈를 치는 자동인형을 만지고 있는 베인에게 다가갔다.
“흐음. 신기해. 마법도 아니고 이렇게 자동으로 움직인단 말이지.”
“당신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지 그래요. 자요.”
“가면이군. 어쩐지, 내 왼쪽 눈에 팩 이란걸 해준다고 하고선 잔인하게도 뜯어버렸지.”
덕분에 없던 살가죽도 벗겨지는 줄 알았어. 그는 너스레를 떨며 어깨를 으쓱여 보이곤 허벅지에 올려두었던 원숭이 인형을 내려두고 가면을 받았다. 처음 써보는 것인지 어색하게 왼쪽 눈에 끼워 맞춰 써보려는 듯 가면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제법 귀여워 보이긴 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연출용 대본 쪼가리를 둘둘 말아 바지 주머니에 끼워 넣고는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가면 줘봐요. 그렇게 쓰다간 왼쪽 눈이 두 번 다칠 거에요.”
“차라리 그편이 모두에게 좋을 텐데.”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조금 아쉽단 말이죠. 양쪽 눈이 다 떠 있는 당신을 보고 싶다고요.”
주인공보다 더 주인공 같은 사람. 나는 픽 웃으며 그의 얼굴에 부드럽게 가면을 안착시켰다. 그리고 그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고는 자신을 쳐다보라 하자, 그가 고개를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잿빛의 회색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오페라, 얼마 안 남았어요. 이번엔 당신이 2층 5번 박스에만 있지 않아도 되니까.”
“관객한테 가면을 주는 이유가 따로 있었군.”
“네, 이번에는 관객이 의자에서 앉아서 관람하는 게 아니라 마치 조연들처럼 근처에서 가면을 쓰고 쳐다보는 극을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당신도 이거 쓰고 와요.”
“그대는?”
아. 내 것. 어차피 나는 연출이라 연극을 봐주느라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나는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에서 아차 싶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그가 품에서 검은 레이스가 달린 실크 천을 꺼내주었다. 얇고 기다란 게, 머리끈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그가 내 손에 있던 끈을 낚아채 내 눈가를 가려 뒤로 묶어 주기 시작했다.
“항상 그대는 본인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어차피 그날은 일을 해야 해서.”
“어차피 관객 참여형이면 그대가 생각하지도 못하는 일이 벌어질 거야. 그 모든 수를 다 읽어서 사전에 준비할 수는 없지. 그대는 기계가 아니니까.”
사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도 잠시. 머리 뒤쪽에서 매듭이 묶이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검은색 암시야가 얼핏 덮인 것처럼 세상이 어두워 보였다. 그래도 밖은 다 보이는군. 나쁘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매듭을 묶고 남은 끈 자락을 천천히 그가 당기자 고개가 저절로 뒤로 젖혀지기 시작했다. 어어, 너무 숙이면. 내 허리가 나갈지도. 주춤거리며 고개를 뒤로 젖히려니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가면은 잘 받지. 하지만…. 날 더 만족시킬 수 있는 게 무엇일지, 좀 더 고민해 보는 건 어때.”
그리고 그는 가볍게 웃으며 내 허리 뒤로 손을 받쳐 올려 주었다. 가봐야겠군. 담백하게 말하는 그는 어딘가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신나 보였다. 이내 성큼성큼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느릿하게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대본을 손에 쥐고 천천히 리허설을 하는 공간으로 걸어 나갔다. 어쩐지 얼굴이 좀. 많이 뜨거운 것 같았다.
6.
오페라는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칼롯타가 기어이 여주인공인 다에를 밀어내고 오페라 무대에 서고 오페라의 유령 덕분에 두꺼비 같은 목소리를 내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마치 작중의 오페라 관람객이라도 된 것처럼 깔깔거리며 웃기 바빴다. 이내 칼롯타가 급하게 퇴장하며 발레를 표현하는 장면에서야 숨 좀 돌릴 수 있게 된 나는 검은 실크 안대를 쓰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베인은 어디 있지.
그 순간, 갑자기 내 손을 잡아 오는 손길에 나는 놀라서 조금 몸을 움찔거리며 손을 잡은 손길을 따라 올라가 얼굴을 쳐다보았다.
“톨비쉬.”
“또 뵙네요.”
많이 놀라셨습니까? 누군가 찾고 계시는 것 같길래. 그의 물음에 나는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아닌 게 아니라, ‘검은 머리의 짐승’을 만나서 상당히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던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알면 어쩐지 그가 화를 낼 것 같았다. 나는 어물쩍거리면서 ‘그냥 지인을 좀.’이라 대답했다. 톨비쉬는 무언가 차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 이내 웃으며 ‘그렇군요.’라고 대답하며 조금 더 자세를 단정히 할 뿐이었다. 나는 급하게 안대를 조금 내려 목에 걸치고는 그에게 말을 건냈다.
“입구로 들어오실 때 가면은 못 받으셨나요?”
“아. 그런 게 있었군요.”
급하게 오느라.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공손하게 사과하며 웃어 보였다. 나는 괜찮다며 서둘러 틈을 내 가면을 하나 가져오려 걸음을 옮겼다.
“여기 계시면 제가 가지고 올-.”
꺄악!! 그 순간 갑자기 관객들 사이에서 울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장면은 무대 연출 담당을 연극 하는 배우가 목을 매달고 공중에 매달리는 장면이었으니까. 나는 놀랄 만도 하다며 납득하곤 다시 톨비쉬에게 고개를 돌리려 했다. 사람들도 이내 그런 장면에 대한 안내를 받아서 웅성거림이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 찰나의 순간. 배우를 쳐다보았다. 눈을 감기로 한 배우는 눈을 치켜 올려 뜨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이건-.
“안됩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달려가려던 것을 감지한 톨비쉬가 내 몸을 단단히 안아 자신의 품에 붙들었다. 지금 구하지 않으면 저 사람은! 나는 크게 확장된 동공을 어찌할 바 모르며 발버둥을 치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단단한 팔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어디선가 쉭- 하고 이상한 소리와 함께 끈이 끊어지며 배우가 그대로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다행히 배우가 매달린 높이와 바닥은 큰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야 그 또한 연출이라 생각하며 저마다 수군거리며 다음 장면을 기대했으나, 배우들은 떨떠름할 뿐이었다. 왜냐면 리허설과는 장면이 달라졌으니. 배우가 목을 매달았던 끈이 끊어지는 건 리허설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원래의 대본대로 쓰러진 배우를 둘러업고 사라지는 사람들을 본 배우들은 곧 다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아직 오페라의 막은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에.
“허억, 허억.”
“진정해요. 천천히 숨 쉬십시오.”
“당신, 지금 무슨 정신으로!”
하마터면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나는 베인이 주었던 검은 안대를 풀기 위해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그 순간 커다란 손이 나타나 내 눈을 바로 가리는 것에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향기다. 숲과, 나무 장작이 타는 듯한 향기.
“안심해, 그대. 그 배우는 무사하니.”
“당신답지 않게 늦었군요.”
“네가 하림(下臨)할 정도의 힘밖에 없는 것을 탓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이래서 그냥 두기 싫었는데. 톨비쉬가 낮게 말하며 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이내 베인이 천천히 손을 거두자 여주인공인 다에와 라울이 사랑을 속삭이는 노래를 부르지만, 한 편에서 그 사랑을 엿듣고 있던 오페라의 유령, 에릭이 분노에 떨며 울분을 토하는 장면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시야에 들어온 베인은.
“긴 머리?”
“이쪽이 조금 더 본모습에 가깝지.”
“웃기는군요. 당신 진짜 본모습도 아니면서.”
미묘하게 스파크가 머리 위에서 튀는 게 느껴진다. 심지어 둘 다 웃는 얼굴로. 아무튼, 이럴 때가 아니다. 서둘러 관객들을 살피고 배우들을 살펴봐야 한다. 나는 꼼지락거리며 톨비쉬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동거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꽂히는 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동공을 떨며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뭐지, 이 알 수 없는 위압감.
“그대는 여기 있는 편이 나쁘진 않아.”
“당신은 여기 있는 게 좋습니다.”
“도대체 둘이 무슨 관계에요.”
그러자 그 둘이 내 물음에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눈을 가볍게 흘겼다. 베인은 심사가 꼬인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띄웠고 톨비쉬는 상당히 이마 핏줄이 설 정도로 강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둘이서 무언가 작당을 한 건지 동시에 돌아보며 나에게 입을 열었다.
“친구.”
“친우지요.”
“친구 다 죽었네.”
나는 살 떨리는 느낌을 고스란히 받으며 속마음에 담아두려던 마음을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말에 베인은 제법 유쾌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아무튼, 이럴 때가 아니다. 톨비쉬의 팔을 억지로 손으로 풀어내며 나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이상해요. 분명 마지막까지 점검했는데. 저런 실수가 날 리가.”
“당연하지. 실수가 아니거든.”
“가능하면 저도 움직여 드리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저도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네요.”
도망친 건 아니고. 극장 안에 숨어 있어. ‘건너온’ 존재는 아니야. 그냥 인간 같군. 베인이 어딘가를 주시하듯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무언가 발견한 듯 2층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나도 따라 시선을 올리니 익숙한 인형을 지닌 그림자가 화들짝 놀라 어딘가로 허둥거리며 도망치는 게 보였다.
“저도 같이 가요.”
“안됩니다. 당신은 여기 있어야 해요.”
“난 상관없는데.”
어차피 난 자신 있다고. 기껏 해봤자 인간인데. 베인의 말에 톨비쉬는 미간을 한 것 찌푸리고는, 피로 낭자한 극으로 마무리 지어주고 싶은 게 아니면 알아서 적당히 해결하시죠. 하고 말했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끼어 이도 저도 못 하는 물고기 신세가 된 것 같아 있는 힘껏 톨비쉬의 발등을 발뒤꿈치로 찍어 눌렀다. 톨비쉬는 ‘밀레시안?’ 하고 놀란 듯 말하며 몸을 껴안았던 팔을 그제야 풀어주었다.
“밀레시안이 뭔진 모르겠는데, 전 그런 이름 아니에요. 아무튼, 익숙한 얼굴이니 꼭 같이 가요. 누군지 알 것 같아서요.”
“사양치 않고.”
“…. 그에게 흠이라도 나는 순간 각오해야 할 겁니다, 베임네크.”
베임네크. 베인은 애칭 같은 건가. 톨비쉬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나지막하게 깔린 어두운 오페라 극장 사이에서 잠시 붉은 이체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제야 처음 보았다. 일그러진 피부에 눌려버린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며 가면 아래로 일렁거리는 붉은 빛을 내뿜는 눈동자를. 내가 쳐다보는 것보다 심기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던 건지 그는 느릿하게 톨비쉬 앞으로 다가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 그의 눈은 제대로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입만 웃고 있을 뿐. 반면에 톨비쉬는 차분한 얼굴일 뿐이었다.
“잘 들어, 기사 단장. 나는 나약한 것들이 아무것도 못 하면서 입만 설치는 꼴은 제일 싫어한다고. 지금의 네가 그들과 다를 바가 뭐지?”
“…….”
“지켜야 할 게 많은 놈은. 이렇다 할 선택도 하지 못하지. 네 그 어중간한 행동이 눈물겹게 감사할 때가 많아.”
“베임네크.”
“셰익스피어나 잘 처리하지 그래. 네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없어. 인간의 일에 크게 개입하면 할수록 손해 보는 건 네가 아닌가? 그 자 때문에 밀레시안이 여기까지 흘러들어와서 이런 허술한 일들에 당하고 있는 게 아니냔 말이다.”
이내 부드럽게 다시 당겨진 손에는 베인의 까슬한 손이 맞잡혀 있었다. 그것을 본 톨비쉬는 무언가 슬픈 얼굴을 보였지만 짧은 한숨과 함께 등을 돌렸다. 내용도 모를 말이 오가는 것에 어리둥절한 사이 뒤편으로 사람들의 손뼉 치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어느새 극이 ‘돈주앙의 승리’를 연극하는 장면까지 다다른 것이 보였다.
“베인. 일단 얼른 가야 해요. 이 이후에 오페라의 유령과 여주인공이 돈주앙의 승리를 노래하며 만나는 장면에서 라울이 붙잡히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도 위험할 수 있어요.”
“베임네크, 당신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하.”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내가 움직이는 것 또한. 밀레시안을 위한 일이란 걸. 아무리 당신이어도.”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붙잡을만한 능력은 없지 않겠습니까. 이번은 양보하죠. 각각 한 마리 토끼를 잡는 거로. 나는 셰익스피어를, 당신은 이쪽의 겁을 상실한 인간을. 그렇게 말하며 톨비쉬는 잠시 나를 쳐다보고 다시 웃어 보였다.
“좋네요. 아무런 희생도 없이 당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모습을 보니. 이런 삶도 나쁘지 않아요.”
그럼. 이만. 톨비쉬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말 그대로 모습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것처럼. 금빛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지자 붉은빛도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 베인. 그를 챙기고 어서 범인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오페라가 마무리되리라.
“어?”
“아. 이젠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으니까.”
왜 놀란 지 알겠다는 듯, 다시 짧아진 머리에 차분하게 다시 눈꺼풀을 덮어버린 왼쪽 눈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붙잡은 손을 바라보고는 내 손등에 가볍게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 모든 장면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익숙한 느낌까지 받을 정도였다.
“마법인가요?”
“오, 그대는 21세기를 산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
“……. 이 일이 다 끝나면 설명해 줄 생각은 있고요? 지금 모든 게 다 너무.”
“물론이지. 그대가 원한다면.”
그대는 참, 속이기 쉽군.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베인의 말에 나는 그의 구둣발을 슬쩍 내 발로 밟아 줄 수밖에 없었다.
7.
“오면 죽인다!”
아니, 틀림없이 네가 죽을 것 같아. 나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는 속마음이 튀어 나가지 않게 침을 삼켰다. 누가 봐도 인질처럼 잡혀 있는 베인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고 있지 않은가.
그사이의 이야기를 설명하자면 이러했다. 속이기 쉽다니, 뭐니 하는 베인의 발을 즈려 밟아주고 급하게 우리는 2층으로 달려나갔었다. 헉헉거리며 베인의 뒤를 따라가려 하니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베인처럼 달릴 수 없어 버거워하자 그가 ‘그대가 나보다 늦을 이유는 하나도 없어.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해봐.’라고 말하자마자 발에서 활기가 돋아나며 빠르게 도약하기 시작했던 것부터 말해야겠군. 우리가 쫓아오는 것을 알아차린 그 어둠 속의 주인공은 허겁지겁 2층에서 1층까지 계단을 다섯 칸씩 뛰어 내려가며 기어이 지하까지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 저런.”
“지하에는 함정이!”
“없어.”
“에?”
그대가 혹시나 내가 잘 때 찾아올까 봐 다 치워놨거든. 아무리 그대라도 지금은 함정이란 함정에 다 걸려버리고 마니. 결국, 안 찾아 왔지만. 나는 그의 말 덕분에 웃고 있지만 뼈가 있다는 말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랑 침대에서 낮잠을 잔 이후로 단 한 번도 지하에는 발걸음을 옮긴 적이 없었는데. 사실 그가 주로 극장에서 이것저것을 준비하던 나에게 와준 터라, 거기까지 내려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 더 컸지만.
“하지만, 이상하군. 지나치게 동선이 짧아. 지하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눈치로군.”
“음, 아무래도. 그는-.”
“이런.”
그가 갑자기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는 급하게 달려가던 방향을 틀어 내 몸을 안고는 그대로 바닥으로 뒹굴기 시작했다. 뭐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휙휙 바뀌는 시야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뭐냐고 물어보려 미간을 좁히며 둔탁한 통증이 느껴지는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손에 찰박거리며 차가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물이…….”
“지하가 물에 잠겼군.”
그리곤 내가 발을 디디려던 바닥을 보고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언가 첨예한 칼날들이 수없이 박힌 벽돌이 내 발 바로 앞에 있었으니. 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나는 침을 삼켰다. 이거 미친놈 아니야.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 틀림없네.”
“고마워요. 방금 그 말을 제가 하고 싶었죠.”
“아니. 그대를 구해준 것보다 조금 더 문제가 생겨서.”
“예?”
발이 묶였어. 베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발을 쳐다보았다. 무언가 로프 같은 것이 발에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이건 또 어떻게 설치한 거지? 나는 힘을 주어 로프를 풀기 위해 그의 발목과 끈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벌리려 애를 썼다. 하지만 손만 따갑게 쓸릴 뿐 풀릴 줄 모르는 로프는 점점 그 끈이 어딘가로 당겨지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흠.”
“흠이 아니고, 이거 끊을만한 도구가 없어요?”
“저기 벽돌에 박힌 칼날들을 쓰면.”
“오, 제가 지금 당장 끊어낼-.”
“좋겠는데, 그 전에 끌려가겠는걸.”
베인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팽- 하는 진동 때문에 물에 파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베인은 팔짱을 낀 상태로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는 딱 한 마디만 던지고 그대로 끈이 당겨지는 동시에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대가 날 구해줘야겠어, 아무래도.’
나는 그를 따라 급하게 물 안으로 잠수를 했고, 겨우겨우 빛이 비치는 물 위로 올라왔을 땐 지금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수로 창살 같은 곳에 로프로 묶인 채 잔뜩 젖어 웃고 있는 베인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베인의 목을 휘어 감은 로프를 금방이라도 조일 듯 당기고 있는 범인의 모습을 말이다.
“오…. 오면 죽인다 했어!”
“진정하세요.”
“진정이고 나발이고! 앞으로 이 극장에선 연극을 못 하게 해주지. 차라리 연극을 포기해! 그럼 이 사람을 살려주마.”
어쩐지 익숙한 뒤태라 했더니. 그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극장의 주인이었다. 내가 오기 전부터 쭉 이 극장에서 일하다가 개인적으로 극장을 차렸다 했으니, 당연히 이 극장의 지리 정도는 잘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러니 어디 있었는지도 모를 수문을 열었지.
“베인, 괜찮아요?”
“아아, 죽을 것 같군.”
전혀 죽을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데. 나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내 행동에 열이 받은 타 극장주는 베인의 목을 조르는 로프 끈에 힘을 더 주며 고래고래 지금 나를 비웃은 거냐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진정하세요, 진정.”
“이 위선자 같으니. 네가 극장으로 들어오면서 모든 게 안 풀리기 시작했지. 너만 없으면…!”
“제가 죽는다고 그 극장이 다시 살아나겠어요? 아저씨가 장사 수완이 없는걸.”
“뭣!”
나는 베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만 있었다. 자기가 죽는 거엔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오히려 그의 태도가 더 불쾌했다. 다쳐도 내가 다치고, 아파도 내가 아프려 하는데 그는 자처해서 나 대신 무언가를 하려는 경향이 강해 보였다. 원래부터 저런 성격이었을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 무언갈 맹목적으로 희생하는. 그런 성격이었을까.
“포기할게요.”
“그래, 죽……! 뭐?”
“포기한다고요. 어차피 이제 할 만큼 하기도 했고.”
나는 덤덤히 말하며 타 극장주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이곤 천천히 물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기는 방이 넓어서 그런 것인지, 물이 생각보다 깊게 들어차진 않았다. 해봤자 남자 성인의 허리쯤 오는 정도랄까.
“그러니 그를 놔줘요.”
“내가, 그대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부터 고려를 다시 해보는 건 어때. 너무 그대를 쉽게 포기하는 거 아닌가?”
미묘하게 입술 끝이 비틀린 베인은 뭐가 그리 또 맘에 안 드는지 빙글빙글 웃던 낯은 어디로 가고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또 문제인 거야.
“가치가 있어야 사람을 구하나요?”
“날 살린다고 그대가 얻을 건 하나도 없지. 차라리 내가 죽고, 그대는 확실한 증인이 되어서 이놈을 처리하는 게 낫지 않아?”
“이 새끼들이, 지금 뭐 하자는.”
우리 둘 사이의 대화에서 미묘한 기류를 느낀 것인지 극장주는 소리를 빽 지르고는 줄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주려 했다. 그러자 동시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두 시선을 마주하고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닥쳐봐.”
“조용히 좀 해보세요.”
나는 한숨을 푹 쉬며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저 사람은 도대체 뭐가 저렇게 꼬여있는 거야.
“그럼 당신이 아까 나를 구한 이유는 뭔데요.”
“그대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럼 그런 가치가 없다 하면, 다신 나를 안 볼 거고요?”
그는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곤 찰랑거리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그는 다신 안 볼 거라고 대답할 것 같았다. 우리는 어떠한 관계로 얽매인 사람들은 아니니까. 우리가 연인이던가? 아니. 우리가 원수였나? 아니. 얽매일 관계가 없다는 건 붙잡을 이유가 없음을 뜻했다. 그런데도 베인은, 관계를 이어나가길 바라는 사람처럼 늘 곁에 있었다.
“내 가치를 당신이 정해버린 것처럼.”
“…….”
“적어도 지금은 나한테서의 당신 가치는 내가 정하는 거야.”
게다가, 꼭 가치가 있어야만 구하나요?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어 보이곤 극장 주인에게 다가갔다.
“그러니 끈 내려놓으세요. 그만둘 테니.”
“……. 정말이겠지?”
“예.”
그러자 주인장은 미심쩍은 얼굴을 하곤 천천히 베인의 목을 묶었던 줄에 힘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목만 묶은 게 아니고 팔의 줄도 묶여 있기에 얼른 풀어주기 위해 다가가려 하자, 갑자기 풀어진 목줄 덕분에 축 늘어졌던 목이 천천히 들리더니 우두둑 소리를 내며 철장에 묶였던 끈이 팽팽하게 늘어나며 끊어지기 시작했다. 아, 느낌이 안 좋더라니.
“정말은 무슨.”
그는 그만둔다고 했지, 널 살려 보낸다고 한 적은 없거든. 베인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무엇을 보았는지 모를 정도로 기겁을 한 극장 주인이, 이내 붉은 빛이 베인의 눈가에서 번쩍이자 정신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멍하게 변하곤 어딘가로 비척비척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극장주를 바라보고 있던 베인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한참을 극장주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해결 된 건가. 극장주가 알아서 잘하겠지.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젖은 등을 손으로 쓸어 만져주며 그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조금 내밀어 밑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요?”
“……. 피곤한데.”
“많이 피곤해요? 여기 침대가 물에 젖었으려나.”
그는 말없이 내 손을 붙들고는 침댓가로 느릿하게 걸어 나갔다.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진 것 같은 그를 따라가자니 지하실 너머로 듀엣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건 마지막. 오페라의 유령에게서 벗어난 두 연인. 라울과 다에의 노랫소리다. 오페라의 유령이 크리스틴 다에가 사랑했던 그의 연인인 라울을 인질로 삼아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하며 라울을 죽이려 하자. 다에가 오페라의 유령에게 입을 맞추며 그러노라 했지만…. 유령은 그 입맞춤에 무엇을 느꼈는지 결국 두 연인을 그냥 보내주게 되어버린다. 수많은 박수갈채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극은 무사히 끝났나 보다.
“침대는 안 젖었군.”
“그럼 쉬고 있어요. 저도 금방 마무리하고 올게요.”
“가지 마.”
어차피 금방 끝날 거야. 톨비쉬, 그가 갔으니까. 베인은 잔뜩 지친 얼굴로 내 허리를 감싸 안더니 젖은 몸 그대로 침대 위로 누워버리고 말았다. 내 침대가 아니니 상관없나. 나야 좋지. 튼튼한 남자의 몸을 그대로 마음껏 누리듯 만지며 나도 긴장의 끈을 풀고 그의 몸을 끌어안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몸을 들썩였다.
“왜요. 나도 뭔가 보상은 있어야죠. 얼마나 긴장했는데.”
“이 일이 끝나면 뭘 하려고 포기했지?”
“뭐든 하겠죠. 꼭 이 길이여야만 하나요.”
꼭 이 길이어야 한다, 라. 그는 생각에 잠겼다. 잿 향기가 가득했던 그의 몸에선 물비린내만 잔뜩 풍길 뿐이었다. 그리곤 그는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고 나에게 푸념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대는 항상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지금 저 말하는 거 맞죠. 물에 다 젖은 생쥐 꼴이 된 저요.”
“그래. 빛이 물에 잠기면 더 아름답게 빛나는 법이지.”
그는 이젠 대수롭지 않은 듯 웃고는 품에 안겼던 내 얼굴을 떨어트려 시선을 마주했다. 다 젖어버린 반 가면엔 금이 가 있었고, 닫혔던 눈꺼풀은 어느새 올라가 있었지만 붉은빛을 내지 않고 적막한 노을같이 색만 보일 뿐이었다. 빨간색과 잿빛의 눈동자가 퍽이나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꼭 한 번쯤 그대랑 이런 ‘길’을 가 보고 싶었어. 또 다른 결말은 어떤 느낌일지.”
“그래서, 톨비쉬랑 진짜 친구예요?”
“어쩌면. 다른 ‘길’에선 그랬을 수도. 우리의 목적은 그대 한 명으로 통일될 수 있으니까.”
불편하겠다. 나는 그의 반 가면을 천천히 떼어내 주었다. 그는 순한 양처럼 그저 얼굴을 맡길 뿐이었다. 물기 어린 반 가면을 침대 협탁에 아무렇게나 올려두곤 젖은 그의 눈가를 더듬어 물기를 거두어 내자 그가 따라 하듯 내 얼굴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었다.
“정말 에릭 같은데.”
“좋아, 내가 유령인 에릭이라 해. 그대는 그럼 다에고? 애릭의 침대에 이렇게 엉망으로 뒹굴어 버리는? 라울은 톨비쉬를 시키지 그래.”
그는 어이없다는 말투로 내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말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가득 드리워 있었다.
“나는 나고. 그대는 그대야. 우리는 그 무엇도 될 수 없지. 게다가 내가 에릭이어도 결말이 너무 뻔하게 슬프지 않나? 다에인 그대는 라울인 톨비쉬의 곁에서 살아가겠지.”
“음, 좋아요. 나는 나고 당신은 당신이라고 하죠.”
“현명하군.”
그래, 어차피 꿈에서도 가지지 못할 그대이긴 하지. 나는 스러져가는 잔열이고, 그대는 떠오르는 태양인데.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그의 이마에 딱 소리 나게 중지를 튕겨냈다. 그는 제법 놀랐다는 얼굴로 양 눈을 껌벅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꿈이면 사치를 좀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꿈에서까지 인색하면 힘들지 않나요?”
“흠.”
“가치고 뭐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대는 참 쉽게 생각하는군. 하지만 나에겐 어려운 일이야.”
“내가 밀레시안 이라서요?”
그는 그 말에 입매를 굳혔다. 정곡을 찔렀나 보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약간의 실소를 곁들이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그놈의 ‘밀레시안’이 도대체 뭐길래. 나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어디로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은 그의 목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내가 아는 베인은. 2층 5번 박스의 로열석을 자기 혼자 독차지하고, 지하에 미친 트랩을 잔뜩 깔아 두고 혼자 오페라의 유령처럼 즐기는. 이상한 사람이거든요. 당신은 어때요? 밀레시안은 버려두고. 지금의 나는 어떻냐고요.”
“……. 내 평이 좀 가혹한 듯한데.”
“정상은 아니죠. 경찰한테 신고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글쎄, 그대의 평을 말하고자 하면. 이리저리 정신없이 쏘다니고, 잔 실수는 잦은데 잠은 안 자며 일하고.”
“…….”
“몸은 몸대로 축내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건강관리는 전혀 하지 않는 듯하고.”
“…….”
이게 지금 내 욕을 하는 것인지, 정말 평을 말한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나는 그의 목에서 손을 떼 그의 양 뺨을 주욱 늘렸다. 그는 피하는 기색 없이 늘어난 볼로 야무지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일에는 적어도 열정을 다 하는 것 같군. 그런 하찮지만, 인간다운 점이.”
마음에 들었지. 잔뜩 뭉개진 발음 사이로 나오는 말들은 멋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나는 고개를 조금 올려 그의 일그러진 살로 뒤덮여버린 눈꺼풀 위로 입을 맞추었다. 모든 게 차갑게 느껴지는 그의 몸 중에서 그나마 따듯함이 맴도는 듯했다.
“저도 당신의 그 사이코패스적이면서 나르시시즘적인 느낌이 썩 마음에 드네요.”
“이건 욕이라는 걸 잘 알겠군.”
“피곤하다면서 그런 건 또 눈치가 빠르네.”
나는 덤덤하게 그의 잿빛 눈꺼풀 위에도 입을 맞춰 그의 눈을 감겼다. 그러자 갑자기 온 세상이 허물어지듯 뭉개지며 어둠만이 찾아오는 것에 아, 하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렇군. 꿈이구나. 무언가 직감이라도 한 듯 제 허리를 껴안아 오는 베인의 팔을 손으로 삭삭 문질러 주며 열기를 더해주었다. 그리곤 안심하라는 듯 그의 허리를 껴안자, 좀 전같이 차가운 냉기는 어디 가고 미적지근한 온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잘 자요.”
꿈인 걸 인지하자마자 내 몸 또한 어디로 빨려 들어가듯 나른해졌다. 분명히 이 기시감은 그와 예전에도 한 번 느끼긴 했지만.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어쩌면 영원히 그를 다신 보지 못하겠구나, 싶은 짐작이 들었다. 나는 저물어가는 시선 사이로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훤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그’다웠다.
8.
“아주 그냥 이대로 죽지 그러십니까?”
“그러면 나야 좋지.”
베인은 픽 웃으며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케흘렌의 보랏빛 눈동자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베인을 훑고 지나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으니 절대 깨우지 말라는 명령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몇 달을 그저 잠을 잘 정도로 일이 큰일이라곤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어이가 없어 그를 흔들어 깨운 것도 몇 번째인가. 반응이 없어 어찌할지 고민하던 찰나에 그가 식은땀을 흘려가며 눈을 떴다.
“도대체 꿈속에서 어딜 갔다 왔냐는 겁니다.”
“…….”
가치를 따지지 않는 곳? 베인은 그렇게 말하며 이마를 쓸어 넘겼다. 어딘가 무거워 보이는 그의 표정에 케흘렌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혀를 찼다.
“셰익스피어가 도주했다가 다시 감금당했다는군요. 신들이란 작자도 허술하기가 짝이 없지.”
“그랬군.”
“근데, 그 허리춤에 그건 뭡니까?”
허리춤? 베인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날래기도 하지. ‘그 사람’이 틀림없이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아 보낸 것이 틀림없는 반가면 이었다. 검은색의 반가면.
“아아. 유령 역할을 했더니 보상으로 주더군.”
“뭔…….”
미친 소리를 다 듣겠다며 케흘렌은 한숨을 쉬다가 이내 가면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두는 베인을 보고 말했다.
“밀레시안이 깨어났다는 보고도 있으니 움직이시죠. 시간이 별로 없으니.”
“그래야지.”
베인은 갑옷을 갖춰 입으며 시선을 내렸다. 금이 가버린 검은 반가면. 그가 생각했던 길 하나가 결국은 닫히고 말았다. 하지만, 굶주린 짐승에게 먹이라는 희망이 들어오면 최후까지 발악하는 게 짐승 아니던가.
“그 전에, 친구를 좀 만나야겠군.”
“당신이 친구가 있습니까?”
“아마도.”
“틀림없이 미친놈일 거야.”
케흘렌의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베인은 크게 웃어 보이며 문밖을 나섰다. 그의 책상 위에 올려진 반가면은 그저 촛불 빛을 머금고 일렁거리는 그림자에 따라 춤을 출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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