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음악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nzU9ep48iA8&list=PLKzg0DeoAjD_jS457C_6Af4XyHayGN5we&index=27
- 제가 썼던 추측글을 바탕으로 한 5.0 스토리 기반의 커플링 글 입니다. (수위x)
- 에메트셀크&빛전
- 앵스트적(슬픈) 요소
- 에메트셀크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으로 인해 불편하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 제가 기본으로 깔고가는 떡밥 추측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빛전=14 아씨엔의 일원중 한명, 이후 탈퇴한 사람 (정확하게는 조디악 소환할땐 없었다 했지요.)
=> 에메트셀크와 빛전=14아씨엔의 일원중 한명은 아주 긴밀한 사이.
약간의 스포적 내용이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1.
어차피 늦을 거다 생각은 했는데, 저 멀리서 허둥거리며 책을 품고는 달려오는 모양새가 딱 봐도 자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가면도 심지어는 벗고 달려오다가 이내 품 안에서 덜그럭덜그럭 가면을 꺼내 쓰고는 몰래 고양이처럼 들어와 내 옆에 앉는 녀석의 행동에 턱을 괴던 손을 내려, 자신의 책을 옆으로 조금 밀어 보여주곤 한심하단 얼굴로 쪽수가 쓰인 작은 글자를 두어 번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환하게 웃으며 책을 서둘러 펴 보이는 행동에 다시금 고개를 저어버리며 눈 앞 교수의 말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결국, `옳다`라는 것의 정의는 마음대로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후드가 벗겨진 줄도 모르고 열찬 강의 중인 교수에게 시선이 다들 꽂혀 있다. 수백 명이 들어찬 강의실.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교수들을 쳐다보는 시선들은 다들 흥미로움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플루토. 있다가 민중 관리국 좀 가자."
아주 작게 옆에만 들릴 정도로 속삭이는 소리에 이건 또 무슨 심보인가 싶어 옆을 쳐다보니 연한 붉은 빛을 띤 입술 한쪽 입꼬리가 당차게 올라간다. 로브 안쪽은 이미 꾀죄죄한 몰골일 테지만. 가면 너머의 빛나는 눈동자까지는 망치진 않았던 것 같다. 에멧은 짧게 "왜." 하고 물어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자 더 작고 중요한 비밀을 말하는 것 처럼 속삭이며 웃기 시작한다.
"왜긴. 오늘은 내가 바로 어엿한 아모로트 시민으로서 `성인`이 되는 날이니 그렇지."
아, 그렇지. 그제야 이 녀석 생일이 나보다 한참 먼저란 것을 알아차렸다. 성인이 되면 관리국에서 성인 증표를 때야 하고, 이것으로 회의에 참석할 권한을 얻을 수 있다. 그건 녀석이 항상 바라는 바였다. 별을 관장하는 14명의 위원회의 의장들이 홀을 가득 울릴 성량으로 나누는 대화는 녀석이 항상 좋아하던 것이었으니. 나도 성인이 될 날이 조만간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축하는 해 주어야겠다 싶어 고민하던 찰나에 유난히 허전한 녀석의 목덜미 옆을 스치듯 쳐다보았다. 보통 사람의 경우는 장신구도 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검소하게 입을수록 더 좋다곤 하지만, 허전한 목덜미 위를 올려다보니 도톰한 귓불 아래가 보인다.
“플루토?”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텅 빈 강의실을 울렸는지, 교수가 ‘거기, 할 말이 많으면 밖으로 나가도 좋네.’ 하고 단호하게 말을 한다. 저 영감은 귀도 좋지. 교수의 말에 움츠러든 네 모습에 다시금 책에 집중했다. 이제는 본래 이름도 까먹지 않을까 싶은 이름으로 자꾸 불러대는 것이 지겨우니 그냥 입막음 용도로 선물을 주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고 생각을 하며 까만 글자들이 줄지어 선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2.
“오늘은 둘이 어디 가나 봐?”
같은 강의실에 있는데도 몰랐는데. 입구를 나와 민중 관리국에 가려 하자 발길을 붙잡는 목소리에 나와 녀석도 둘 다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찌푸리며 말을 건넨 상대, 휘틀로다이우스에게 시선을 주자, 옆에 덜렁이 녀석이 ‘휘틀!’ 하고 달려가기 시작한다. 저러다 넘어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서 빠른 걸음으로 그 손목을 붙잡아 걸음을 늦추었다. 붙잡힌 손목에 시선을 주던 녀석이 웃으며 걸음걸이를 늦추며 동시에 휘틀로다이우스에게 다가가자 주먹을 쥔 손으로 입을 가리듯 웃은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너희는 여전히 사이가 좋구나.”
“뭐, 변함없는 짝꿍이지. 그렇지?”
옆구리를 팔꿈치로 푹 찌르며 웃는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며 찔려진 배를 문지르고는 혀를 차며 시선을 피했다. 그것마저 휘틀로다이우스에게는 재미있는 광경인지, 또 웃기 시작하는 것에 미간을 더 찌푸렸다. 그래서, 어딜 가려던 중인데? 하고 되물어보는 휘틀로다이우스의 말에 녀석이 배를 당당하게 내밀 듯 허리를 쭉 피고는 오늘 성인 등록을 하러 간다며 힘을 주어 말했다.
“벌써? 좋겠네. 둘이 잘 다녀와. 난 교수님이 부르는 바람에 같이 못 가줄 것 같으니 말이야.”
녀석의 둥그런 머리를 로브 위에 손을 얹어 두어 번 쓰다듬어 주는 것에 녀석이 또 뭣도 모르고 달려들어 가볍게 안는 것에 한숨을 쉬고는 먼저 발을 돌리려 하자 휘틀로다이우스가 손짓을 해 보이더니 녀석보고 먼저 가라는 듯 등을 부드럽게 밀고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너, 언제까지 버티려고 그래.”
“뭐가.”
“라하브레아 교수님이 자꾸 나한테 언제쯤 네가 위원회 자리를 맡을 것 같으냐고 물어본단 말이야.”
“늘 그랬듯이 ‘제가 어떻게 압니까.’하고 대답하라니까. 그 영감은 질리지도 않나, 왜 자꾸 너에게 물어보는 거지.”
“네가 대답을 똑바로 하지 않으니까. 차라리 그냥 대놓고 말하지그래.”
저 아이랑 같이 위원회에 들어갈 거라고 말이야. 나는 서둘러 눈을 크게 뜨곤 녀석이 멀어진 것이 맞나 싶어 서둘러 눈으로 녀석의 뒤를 쫓았다. 다행히도 한참을 앞서 팔랑거리듯 걸어가고 있는 녀석이 보여 안도하고는 이를 뿌득뿌득 갈며 한껏 웃어 보였다.
“누가 저런 칠칠이랑 같이.”
“거짓말 하는 것도 아주 능숙하구나, 너는.”
아무튼, 얼른 대답은 해 드리도록 해. 나에게 물어봤자 답이 없는 걸 아시는데도 불구하고 물어본다는 건, 너를 조금씩 압박하려는 의도도 보이니까 말이야. 어차피 네가 가진 힘은 위원회의 의장들도 감탄할 정도로 좋은데. 다음 에메트셀크의 자리는 반드시 너일 테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휘틀로다이우스가 이내 무언가 또 깨달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오늘 창조물 관리국에 아주 특이한 게 들어왔어.”
“.......?”
“누군가는 그걸 ‘크리스탈’이라고도 부르고, ‘보석’이라고도 부르자고 이름을 지으려 하는 것 같던데. 마치 네가 아끼는 그 아이의 혼처럼 반짝거리지.”
너라면 그 이데아로 좋은걸 만들 수도 있잖아? 성인을 맞은 아이에게 줄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거야. 로브 아래로 드러나는 창백한 입술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는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나는 시선을 주었다. 반짝인다라. 어느새 뒤를 돌아보며 빨리 오라는 듯 손짓을 해 보이는 녀석의 가슴 정중앙에 환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난히 주민들 사이에서도 빛나는 혼을 가진 녀석에게는 늘 묘한 이끌림이 있었다. 나는 또 그렇게, 그 빛을 쫓아가듯 녀석에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3.
“진짜 기다려 주게?”
“어차피 들릴 곳도 있으니까. 사람도 오늘은 많으니 시간이 걸릴 것 같군. 대기하고 있다가 서류 작성할 때 즈음엔 돌아올 수 있겠지.”
“그래, 얼른 다녀와.”
잘 다녀오라며 엉덩이를 두어 번 두드리는 녀석의 행동에 눈을 내리떠 미간을 좁히고는 가볍게 이마를 한 대 툭 치곤 밖으로 나와 창조물 관리국으로 걸음을 향했다. 하늘은 오늘도 유난히 푸르고, 타워 너머의 태양 빛은 환하게 아모로트를 빛내고 있었다. 기분 좋은 바람까지 불어 사람들은 활기에 가득 차 있었고, 나 또한 묘하게 올라오는 특이한 감각에 휩싸여 창조물 관리국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혹시 ‘크리스탈’인지 ‘보석’의 이데아를 가져갈 수 있나 해서.”
“아, 있습니다.”
다들 관심이 없어서 조금 구석에 두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사라지는 직원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았다가 품 안의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똑딱거리는 시계의 바늘이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지만, 이보다 초조할 순 없었다. 톡톡 하고 안내 데스크의 책상을 검지로 두드리며 기다리고 있자니 작은 상자를 가져오는 직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게 바로 ‘보석’ 이데아입니다.”
상자 안에 비단 같은 붉은 천을 투명하게 비추는 보석이란 물체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 손가락 두 마디 길이 정도의 크기일 줄 몰랐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크다며, 대충 고개를 숙이곤 이데아를 받아 길을 가는 내내 창조 마법으로 이것저것 손을 대 보기 시작했다.
“......너무 화려해.”
태양을 닮은 황금색 금속으로 보석을 장식한 목걸이를 만들었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서 고개를 저어버리곤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은으로 세공된 반지가 튀어나왔다.
“.........”
이건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더 적절한 게 없었을까 싶어, 녀석의 허전했던 귓불을 떠올리며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가볍게 금장식으로 귀를 고정하는 장식 아래로 보석이 달린 귀걸이를 만들어 내었다.
“흠.”
이 정도면 남들에게 잘 들키지 않을 수 있을뿐더러, 녀석의 허전했던 귀를 장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법 만족스러운 결과물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민중 관리국으로 발을 디디자, 벌써 서류 작성을 마친 듯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며 안내 데스크에서 서류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녀석의 뒷모습에 저도 모르게 올라갔던 입꼬리를 내렸다.
“처리 되었습니다. 더 변경하실 부분이 있나요?”
“아뇨,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담당자의 손끝에 있던 창조마법으로 만들어진 깃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유롭게 서류의 위를 누비고는 청량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서류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것에 만족스러움을 느끼곤 한껏 올라간 광대와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고 이쪽으로 뛰어오다 넘어지려는 것에 서둘러 달려가 가볍게 허리를 감싸 안았다.
“성인 기념으로 코라도 깨려고?”
“그렇지만, 이런 날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고.”
이제 드디어 ‘아이’라는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까. 그렇게 말을 하며 품 안에서 기쁜듯한 표정을 해 보이는 네게 품 안에 숨겨 두었던 귀걸이를 꺼내서 주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워 주자 저 멀리서 아마도 녀석의 친구인듯한 사람이 반갑게 손까지 흔들며 이쪽으로 달려온다.
“축하한다! 드디어 너도 성인이구나!”
“하우메아!”
친우의 이름을 부르며 같이 또 마주 달려가기 시작하는 녀석의 행동에 품 안에 귀걸이를 다시 안으로 집어 넣어버리곤 눈물겨운 동병상련의 재회의 순간을 바라보았다. 친구인듯한 녀석이 머뭇거리고는 이내 자신 있게 품에서 무언가 꺼내 건네주는 것에 나는 잠깐 숨을 들이켰다. 녀석이 평소에 늘 가지고 싶다 했던 서적. 이데아를 자꾸 추출해 나가는 바람에 이데아가 부족해 마저 만들지 못했던 그것. 팔짱을 끼곤 그 모습을 바라보다 품속의 귀걸이 한 쌍을 잠깐 꺼내 바라보았다.
“되다 만 것.”
누군가의 바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나만의 소망으로 만들어진. 되다 만 것. 눈을 잠시 감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이내 녀석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입을 열었다.
“먼저 간다.”
“그래서……. 엇, 벌써?”
“그래. 네가 오늘 안에 대화를 끝낼 기미가 없어 보이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손을 휘저어 보이고는 민중 관리국 밖으로 발을 디뎠다. 아까의 상쾌한 바람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탑을 비추던 태양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둑해지는 도시의 거리와 하나둘 켜지는 가로등에 나는 그렇게 자신의 거처로 향하는 사람들과 반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4.
“엘리시움 들판의 청년이 따로 없네.”
“비켜.”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나는 풀밭에 누워 감았던 눈을 찌푸리곤 느릿하게 떠 보였다. 나와는 정반대로 내 머리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휘틀로다이우스에게 비키라 말을 했지만 비킬 생각이 없는지 빙글빙글 웃어 보이는 녀석의 행동에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줬어?”
“뭘.”
“뭐긴 뭐야. 네가 어제 그 이데아를 가져갔다는 것도 들었는데.”
“........”
어제, 결국은 귀걸이를 주지도 못하고 그냥 다시 한참을 근처 언덕에서 풀 내음이나 맡으며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하루가 그냥 지나가 버렸다. 품속의 작은 상자를 다시 꺼내서 뚜껑을 열자 작게 만들어진 귀걸이 한 짝이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나는 선뜻 그것을 휘틀로다이우스에게 건네주었다.
“가져.”
“이걸?”
고개를 갸웃거리던 휘틀로다이우스는 이내 상자를 잠깐 쳐다보고는 습관처럼 입을 가리고 웃었다.
“싸운 건 아닌 거 같고. 못 준거구나. 그렇지만 이렇게 빛이 나는 귀걸이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까 이건. 가볍게 귀걸이 하나를 집어 든 휘틀로다이우스가 내 로브를 넘기고는 귀에 귀걸이를 가볍게 가져다 대자 잠깐의 빛과 함께 귀에 귀걸이가 고정되듯 달라붙기 시작했다.
“네가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때 다른 한쪽을 그 아이에게 줘.”
무엇보다 네가 주는 선물을 아주 좋아할 아이니까 말이야. 이제 성인이 되었는데도 자꾸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 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니깐, 정말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이내 자신도 몸을 일으켜 로브에 엉겨 붙은 풀을 툭툭 쳐 털어내는 것에 나는 삐딱하게 서서 입을 열었다.
“왜, 위원회 자리를 거절했지? 너도 나 못지않게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니, 전혀 아니야. 나는 이 모든 것의 ‘재미’를 느끼는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거든. 그렇지만 너는 그것을 가엾게 여기기도 하고, 때로는 강하게 처리하기도 하지. 넌 나와 다르게 보이는 것에 대해 제대로 활용하는 능력이 있잖아?”
장난스럽게 웃고는 이내 가볍게 손짓 하나로 내 가면을 붉은색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에 나는 혀를 차며 가면을 주먹으로 움켜쥐었다.
“아주 잘 어울려, 미래의 에메트셀크.”
나는 미래의 창조국 관리소의 소장. 너는 미래의 14 위원회의 의장. 그게 가장 좋은 연극의 결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이는 휘틀로다이우스는 느릿하게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그저 붉게 변한 가면을 잠시 쳐다보고는, 어쩐지 따끔함이 밀려오는 듯한 귀걸이가 달린 귓불을 잠깐 매만지며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5.
“정작 네 성인 절차는 동네에 다 소문내고 다녔으면서, 내 차례는 까먹었다?”
“아니, 그게……. 뭐라 할 말이 없네. 미안.”
멋쩍은 듯 머리를 북북 긁어 보이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아! 하고 짧은 감탄사와 함께 성인등록을 마친 내 손을 붙잡고는 쩌렁쩌렁 울리게 무어라 외치는 녀석의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널, 기억해줄게!”
“뭐?”
“성인이 되고, 이번에 위원회 권유도 받았다 했지. 네가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기억해 줄게.”
당장 떠오르는 게 없거든 사실. 그래도 이쯤이면 친구로서 아주 괜찮은 선물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또 웃어 보이는 네 행동에 나는 너에게 들키지 않게, 아주 작게 손을 움직여 네 손을 마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꼭 기억해. 잊어버리기만 해봐.”
“그래! 야, 그래도 나는 이렇게 말이라도 하면서 선물을 줬는데. 생각해보니 너는 왜 선물 안 줬어.”
투덜거리듯 말을 하면서도 내 손을 놓치지 않는 네 행동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버렸다. 너에게 언제 주어야 할지 몰라, 항상 품 안에 넣고만 다니는 그것이 너에게 어떤 순간에 가장 정확하게 전달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있던 피가 손을 타고 뜨거운 열기로 몰아 올라오려 하는 것에 나는 무작정 녀석의 손을 잡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야! 선물 이야기 하다 말고 어디 가!”
“줄게, 언젠간.”
“어, 정말?”
“그래. 네가 기억한다면. 언제까지고 기억한다면.”
한참을 거리를 벗어나 아무도 없는 골목 안에서 나는 녀석의 품을 껴안고 한참을 숨을 들이켰다. 녀석은 또 고개를 잠깐 올려다보고는 말없이 웃으며 네 몸을 끌어안아 주었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껴안고 있었다.
6.
너는 그날 이후로 갑자기 부쩍 바빠졌다. 너 또한 14 위원회의 소속으로 추천받았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발을 놀리고, 우리는 각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렇게 서로를 등지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문득 너의 빛에 이끌려 뒤를 돌아봤을 때, 너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이미 잡히지도 않을 거리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하데스, 아니 에메트셀크. 전번의 일은 아주 고마웠어. 덕분에 불사조도 평안하게 사라졌겠지.”
이제는 붉어지고 남들과는 다르게 생겨버린 모양새의 가면을 벗고는 어느새 다가온 휘틀로 다이우스를 마주 보았다.
“저런, 슬퍼 보이네.”
“용건이 뭐야. 용건이.”
“이번에, 14 위원회에서 내린 결정. 정말 할 거야?”
그가 아주 슬퍼할 거야. 그는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말하는 휘틀로다이우스를 쳐다본 나는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품 안의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세계의 종말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막으려면 우리보다 더 거대한 힘이 필요했다. 거기에는 동포들의 희생이 필요했을 뿐이다. 우리는 영생을 사는 존재. 잠깐의 사라짐일 뿐이다. 다시 부활시키면 되는 것이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가면을 썼다.
“그게 정말 정답일까?”
휘틀로다이우스의 표정을 알 수 없는 가면 너머의 눈을 바라보고 나는 눈을 내리떴다.
“정답이란 건 없어. 특히나 인생에선.”
그냥 나는, 녀석에게 귀걸이를 건네고 싶은 좋은 타이밍을 노릴 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휘틀로다이우스는 멀어져가는 나의 뒤에서 낮게 입을 열었다.
“그가, 14 위원회를 그만두었어. 자신의 손으로.”
그리고 그 말은 나를 뒤돌아보게 하기엔 충분했다.
7.
너와 나는 마주 보고 있었다. 이번엔 친우가 아닌, 어쩌면 적이라고 해야 할 수도 있는 관계로 말이다. 너는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너를 쳐다보았다. 오가는 시선에는 어떠한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넌 아직 모르고 있구나.”
“너야말로 뭘 모르는군. 인류는 가장 완벽한 존재로 남아야 한다. 이건 모두가 살기 위한 선택인 거야.”
“정말 ‘모두’일까?”
네가 말하는 ‘모두’는 네 팔 안으로 굽혀진 동포들만 의미하는 게 아니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네 얼굴을 보고는 가면을 벗어 던졌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지, 너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동포도 중요하지만, 정말 나에게 중요한 건.
“에메트셀크. 여기까지로 구나.”
앞으론 볼 일이 없겠지. 우리 둘 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야. 나는 너무 슬퍼. 너를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가장 가까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멀 게 있었구나, 우리는.
곧이어 빛과 어둠의 공존이 부딪히기 시작했다. 강렬한 빛에 어둠이 침식되어 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동포들의 희생으로 만들어낸 존재가 아스러져 가기 시작했다. 균열이 가는 소리와 함께 나는 허탈해진 어깨를 늘어뜨렸다.
무엇을 위해, 살렸고. 무엇을 위해 죽이려 했는가. 어차피 너는 나와 함께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인데.
늘어져 가는 몸이 물을 먹은 듯 무겁게 처지는 기분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인간의 형상을 한 빛이 크게 일렁이고 퍼지더니 이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빛 너머로 네 모습이 보였으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8.
인간은 아주 작아졌다. 그러나 나는 늘 기억했던 대로 가장 완벽한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네가, 너와 걸어가던 거리를 만들었고, 건물을 솟구치게 하였다. 나의 깊은 어둠 속, 심연 어딘가의 잊힌 그날의 기억을. 어쩌면 내가 너를 마지막으로 막을 수 있었던 그 시간을. 품 안에 낡은 시계를 들여다보자 멈추어버린 시간과는 다르게 초침이 흘러가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린다. 나를 통과하는 나의 동포들. 나와는 말을 섞지 않는 동포들. 나는 그 모든 것이 네가 돌아왔을 때, 다시 나를 추억하는 기억이 되게 하도록 너의 이름을 네가 성인 등록을 했던 것처럼 ‘만들어진’ 민중 관리국에 등록해 놓았다.
언제든 네가 돌아올 수 있게. 그리고 언젠간, 너에게 주지 못한 선물도 주기 위해.
9.
사람은 망각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완벽한 인간이었을 때엔 그렇지 않았다.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고, 그런데도 또다시 나와는 다른 길을 걷기를 원했다. 너도 지키지 않은 약속을 내가 지켜야 할까. 네가 나를 마주하는 첫 순간의 눈빛에 나는 아주 안도했다. 네가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고, 증오해서. 나는 다시금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아씨엔으로서. 14 위원회로써 움직였다. 나는 쪼개어진 인간들을 흉내를 내며 살아가 보기로 했다. 식사하고, 아이를 낳고. 때론 네 이야기가 어렴풋하게 담긴 연극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나를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네가 나에게 불신의 눈빛을 보내며 서 있을 때. 그리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볼 때에 나는 안도했다.
네가 기억을 되찾았을 때. 그때 나를 정말로 미워할까 봐. 정말로 증오할까 봐. 차라리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너와 마주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네가 나아가는 길에 혹시나, 나와 같은 결말이 있을까 하는 기대를 걸며 나는 너에게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나오는 ‘기억’해 달라는 말을 은연중에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10.
공허함이란 것에 대한 정의는 이런 것이 아닐까. 네가 날린 일격으로 인해 뚫려버린 몸의 가운데를 손바닥으로 쓸어 만져보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두운 물밑에서 다시 햇볕이 내리쬐는 기분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여전히 단호하기만 한 네 얼굴에선, 아직도 우리의 옛 기억이 떠올려지지 않은 것 같다.
다행이다. 나는 안심했다. 네가 후회할만한 일로 만들고 싶진 않았으니까. 적어도 내 죽음에 대해선 말이다. 그래도 조금은 슬펐다. 네가 말했던 슬픔이란 게 어쩌면 이런 감정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너도 약속을 지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기어이 나도 지키질 못했으니 공평한 셈으로 칠까 싶었다.
그렇게 나는, 슬픈 얼굴로 너에게 기억하길 부탁했고, 너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안심했다.
언뜻, 품 언저리의 귀걸이가 절그럭거리던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그래도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 먼저였다. ‘이데아.’ 하나의 관념. 어차피 이것 또한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나는 귀걸이를 마지막으로 없애버렸다. 내 몸과 함께.
너를 기다렸던 건물들을 원래대로 복귀시켰다. 다 부서져 버린 건물들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같이 마주했던 그 날처럼 환한 태양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네가 지어주었던 그 이름으로 나를 소개할 걸 그랬나 보다. 너에게 내 진짜 모습을 보여준 것도 다시 생각해보니 처음이었던 것 같다. 우리끼리의 비밀스러운 호칭. 나는 좋았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원래의 내 이름으로 너와 마주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 플루토는 행성의 이름입니다. 이 행성의 다른 말로는 ‘하데스’가 있습니다.
* 왜냐하면에 대한 이유는 다음 칠흑 업뎃을 플레이하시다보면 이유가 나올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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