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려죽겠으나 벨릭을 연성하고 싶었다.. (야간 근무라 저녁 8시~ 아침 8시 까지 일함)
*급하게 쓴것이라 문체나 어휘가 맞지 않을수도 있으며, 오타가 있을 수 있습니다.
1.
“일시적일 수도 있으나 분명한 기억 상실증입니다.”
“......”
개선 여부는? 그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듣는 나보다 더 암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덕분에 나는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나에게 닥친 현실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의사와 몇 마디를 나누는 벨져를 잠시 바라보다가 병원 한쪽 벽에 있는 커다란 유리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따듯한 봄날의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지금.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 한 가지.
나는 어제 뭘 했더라.
그와 사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한다. 능력 탓인 걸까. 그와 함께 다니며 여러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고 했으니까. 나는 그와 첫 만남밖에 기억이 안 나지만.
첫 만남. 3년 전 눈 내리는 겨울. 메트로폴리스에서 만난 검은 로브의 사내. 벨져 홀든. 드문드문 단어로 기억나는 것들을 떠올리며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멍하게 창문만 바라보고 있자 순간적으로 아이의 짧은 단말마 같은 비명이 들리더니 이내 얼마 안 가 창문 너머로 푸른 풍선 하나가 둥실 떠오른다.
“풍선.”
“뭐?”
“...아무것도.”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나의 말에 순간적으로 반응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풍선과 관련된 다른 기억이 있었나. 그가 나를 뚫어지라 쳐다봐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하늘을 올라가는 파란 풍선에 시선을 주었다. 풍선 끝자락에 달린 리본이 팔락거리며 눈앞을 어지럽게 흩트려 놓는 것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벨져.”
“.......”
“돌아가자, 우리 집에.”
그래. 돌아가자 벨져. 나의 병으로 우리가 이렇게 힘들어할 시간보다, 그대를 행복하게 해 줄 시간이 나에겐 필요해. 눈을 감자마저 깊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2.
“호오, 제법 하는데.”
“그대야말로.”
웃겨 죽겠다, 하여간. 지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 덕분에 이미 쌓아 올린 탑의 군데군데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와 나의 오기 덕분에 탑의 머리부분과 아랫부분은 멀쩡하지만, 중간 부분이 쥐 파먹은 듯 블록이 거의 없이 아슬아슬 지탱하는 탑. 젠가의 묘미는 이런 게 아닐까. 그가 여유 있게 다시 중앙 부분을 공략하며 나무토막 하나를 빼내 가볍게 흔들며 ‘봤지?’ 하는 뉘앙스를 내는 것에 그를 한참 노려보다가 심혈을 기울여 천천히 중앙의 나무토막 하나에 손을 대었다. 잘만 하면...!
“릭 톰슨.”
“아, 그러지 마. 벨져.”
“사랑한다.”
“푸핫. 잠깐, 벨져!”
아, 이럴 때 그런 말 하면! 손에서 땀이 비실비실 새어나온다. 그가 자꾸 옆에서 사랑한다, 사랑한다. 속삭이니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기습적으로 볼에 입술을 댄 그 덕분에 손으로 붙잡고 있던 블록 하나가 탑의 균형을 무너뜨려 버렸다. 잔뜩 골이 나서 눈을 흘기며 그를 쳐다보자 그가 으쓱거리며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 자세를 취해버린다.
“못난이.”
“이 얼굴이 못난이라 하는 건가?”
“그렇소. 우리 못난이.”
피식 웃으며 그의 볼에 입술을 비비자 그가 헛웃음을 날린다. 그의 웃음은 내가 좋아하는 아침 햇살을 닮아서 눈부셨다. 가만히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팔을 괴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뭘 보나.”
“잘생긴 그대 얼굴.”
“매일 보는 얼굴일 텐데. 질릴 때가 되었겠지.”
“전혀.”
오히려 더 기억해 두어야지. 사랑하는 나의 벨져 홀든.
그대의 잘 뻗은 콧날도. 약간은 도톰한 입술도. 가지런하고 날렵한 눈매와, 나를 불러주는 나지막한 목소리까지.
오, 벨져. 사랑하는 나의 벨져. 벌써 그대의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려 해. 그대가 눈앞에 있는데도.
마치, 내일 아침이면 모든 것을 잊을 것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듯.
3.
방 한 쪽에 가득 쌓인 유리병 위에 작은 젠가 나무토막 하나가 담긴 유리병이 올려졌다. 그의 손수건이 담긴 유리병.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작은 꽃송이가 메말라져 병 속에 담겨 있다. 그가 나에게 준 선물일까. 병뚜껑 위에 쓰인 날짜를 쳐다보고는 서랍장 속에 고이 숨겨둔 일기장을 꺼내 펄럭였다. 종이끼리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는 팔락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정확하게 병뚜껑 위의 날짜와, 일기에 쓰인 날짜와 일치하는 것을 찾고는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 12월. 부드러운 겨울 내음에서 나오는 봄. 사랑하는 벨져 홀든의 꽃 선물.]
꽃선물을 해줬구나. 유리병 속을 뚫어지라 쳐다 보다가 조그마한 천 조각 하나가 들어 있는 유리병을 집어 들어 다시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3월. 꽃가루가 귀찮은 벨져 홀든의 손수건.]
...이런것도 모았나, 과거의 나는. 어쩐지 그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상상이 가 웃어버렸다.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자, 바로 손수건에 베인 그의 향수 내음이 부드럽게 코끝을 스쳐 지나간다. 기분 좋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향기를 감싸 안고 있다가, 후다닥 뚜껑을 닫았다. 혹여나 향기가 다 사라졌을까, 뚜껑을 꼭꼭 두어 번 더 돌리며.
“벨져 홀든.”
그의 이름만은 잊어버리지 않으리라. 그의 얼굴만은. 그의 그 부드러운 손길만큼은 잊어버리지 말자며 다짐하고는 눈을 감고 일기장을 덮었다. 벨져 홀든. 그의 얼굴을 떠올리려 하자 머리가 뿌옇게 흐려지며 그의 모습이 안개 낀 것 마냥 흐릿하게 생각이 난다. 그가.. 어떻게 생겼더라. 일기장을 이마에 대고는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이... 이름이 뭐더라. 덜컥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서둘러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벨져 홀든. 그래, 벨져 홀든이였어. 일기장을 다시 덮고 그대로 방 한 쪽에 마련된 긴 벨벳 소파 위에 누워버렸다. 팔걸이에 반만 걸쳐져 종아리부터 발까지 축 늘어진 것이 내 기분 같아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장이라도 보고 오자.”
머릿속이 복잡해질 것 같아 코트와 지갑을 챙기고는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가 집에서 최대한 보내는 시간을 늘리라고 했지만, 당장에라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이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가 좋아하는 슈니첼을 해줄까, 스스로 기분을 달래며 식탁 위에 메모지로 ‘장 보고 올게. 벨져.’라는 짧은 글만 남긴 체 근처의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생각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4.
시장은 여전히 북적였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의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기분에 잠시 시장거리를 멈추어 있다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간만에 화창한 날씨에 들고온 코트가 무색해져 팔 한쪽에 코트를 벗어 걸쳤다. 주렁주렁 차고 있던 시계들도 오늘만큼은 가볍게 하나만. 때 이른 여름 날씨 차림의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천천히 판매대를 둘러보며 오늘 식사메뉴와 어울리는 재료들을 선점해 보기 시작했다. 통통한 가지, 탐스러운 붉은빛을 띠는 토마토. 그 어느 것 하나 맛없어 보이는 것은 없다. 한참을 둘러보다 결국 정육점에서 고기 한 근을 두둑이 사고 샐러드 용으로 만들 채소들을 골라 담고 계산을 마쳤다. 역시 오길 잘했다. 시장 특유의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저절로 기분을 들뜨게 한다. 야채 가격에 대해 흥정을 하는 아주머니들 사이에 껴서 오이피클을 좀 더 얻은 것도 꽤 좋은 소득이라며 신이 나서 묵직한 장바구니를 흔들었다.
“...그런데.”
장바구니를 흔들다가 말고 시장 중앙에 멈추어 서서 멍하니 앞을 주시했다.
내가 왜 시장에 왔지?
5.
한참을 시장에서 머뭇거리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이유 모를 묵직한 장바구니를 챙기고서. 가로수가 우거진 길을 지나 나뭇잎 내음을 맡고, 저물어 가는 달빛과 함께하는 가로등 길을 지나치면 제법 커다란 나의...
“나의?”
무언가 이상하다. 오늘따라 나는 무언가가 다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공허하고 허전한 느낌. 커다란 주택의, 정원 딸린 내 집에는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때맞춰 불어오는 바람이 나뭇잎들을 간질이며 푸른 녹음 소리를 내었다. 마치 비라도 오는 듯 쏴- 하는 옥빛 소음은 나의 정적을 깨기엔 충분했다. 내가 불을 켜고 장을 보러 갔었나? 혼란스러운 머리를 헝클어트리고는 한숨을 푹 쉬며 주머니에 든 열쇠꾸러미를 꺼내 입구에 가져다 대려다 멈칫거렸다.
“...어떤 키더라.”
쩔그렁 쩔그렁. 이젠 집 열쇠가 뭔지까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것도 아닌데. 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잔뜩 울려 퍼지며 한참 이 열쇠, 저 열쇠를 꽂아가며 낑낑거리기를 몇 분. 제대로 끼워지지도 않았는데 열쇠 구멍에 열쇠를 쿡쿡거리며 집어넣으려다가 갑자기 문 손잡이가 철컥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건 또 무슨 일? 당황스러워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문을 열어주는 인영을 확인했다.
“릭 톰슨. 내가 나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 강도야!!!!”
나는 그대로 장바구니를 강도의 얼굴로 던졌다. 잘 익은 토마토가 든 봉지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바닥에 떨어졌으나, 강도와 나는 말없이 서로가 하던 행동 그 자세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6.
단 둘이서 마주하는 식사. 어쩐지 식기도 다 2인분으로 준비되어 있었지만, 당장 이 복잡한 상황이 더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식기가 하나 더 많은 것쯤은 잊기로 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눈앞의 이 상황. 아무 대화도 없이, 얼굴도 몰랐던 사람이랑 식사하는 이 이상한 상황. 한참을 말없이 식사만 하며 접시가 포크에 부딪혀 다각거리는 식기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지는 것에 참다못해 토마토 파스타를 아무렇게나 헤집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그대를 여기에 초대했다고?”
“그래.”
정확하게는 다른 의미로 초대한 거지만. 그의 말에 다시 그의 끝말을 되새기며 ‘다른 의미?’하고 말끝을 올렸으나 돌아오는 것은 어딘가 미묘한 시선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대를 알지 못하오. 애초에.. 그... 당신처럼.. 어딘가 귀티나 보이는 도련님과 친분을 쌓을 무언가가 없는데.”
“글쎄. 어떨까.”
그는 짧고 간결한 대답만 연신 내뱉은 체 웃으며 샐러드에 든 양상추조각을 조금 포크로 찍어 먹을 뿐이었다. 그는 이미 장으로 봐온 슈니첼을 이미 다 먹고 나서 입가심으로 차 한잔까지 느긋하게 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입은 셔츠. 하얀 머리카락은 적당히 느슨하게 묶여 있어, 어딘가 단정하고 엄격한 이미지를 보였지만.. 무언가 편안하고 안심되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왠지 지금의 그는 가장 편안한 상태인 것만 같았다.
“내 나이 26살 먹고 이런 일은 처음인데.. 오늘따라 왜 이리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지.”
“...네 나이는 33살이다.”
“그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아! 오늘 식사도 다른 사람이랑 약속한 건...”
그는 말없이 종잇조각 하나를 보여주었다. 어딘가 급하게 쓰인 글씨체. 분명한 내 필체였다. 종이 끝에 남겨진 낯선 이름에 미간을 좁혔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 이름이 벨져?”
“그래. 벨져 홀든 이다.”
어딘가 이 남자는 성명으로 불러줘야 할 것만 같음에도 꽤 친근하게 이름으로만 그를 부르고 있었나, 나는. 그 정도로 친했다면 기억날 법도 한데. 게다가 33살이라니. 내 7살의 나이는 어디로 훌쩍 사라진 것일까.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머리를 감싸 쥐자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책상을 톡톡, 손톱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그 소리에 그를 쳐다보니 그는 혼자만 평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식사가 끝났으면 그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소. 안타깝게도 오늘은 상태가 별로라.”
“갈 수 없다.”
“...배 째라 이거요?”
그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째서 저 아무렇지 않은 표정 속에서 묘한 슬픔을 찾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의 표정을 바라보니 더 마음이 복잡해져 오기 시작한다.
“연인을 찾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
“누가?”
“네가.”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인이 있었나. 어딘가 마음 언저리가 다시 하나에 박힌 것 마냥 쿡쿡 아파졌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서 어렵사리 입을 때 내었다.
“그대 연인이 어떻게 생겼길래?”
“그 사람은.”
나의 눈동자를 주시하는 그의 눈에는 얼핏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청량한 푸른색의 눈동자는 거짓 하나 없는 곧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복잡한 마음을 씻어내려 주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에, 난생 나에게 봄이란 느낌을 전달해준 좋은 미소를 가진 사람이다.”
“.........”
그는 어렵나? 하고 반문을 하더니 이내 내 글씨체가 쓰인 종잇조각을 매만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봄빛을 머금은 나뭇잎처럼 부드러운 눈을 가졌다.”
“그대는 지금 나랑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남은 것이지?”
미간을 좁히며 그의 말장난 같은 대답들을 곱씹으며 커피 한잔을 입가에 담았다. 커피 특유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느낌보다 쓴맛이 올라오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그의 옆에 있던 잔 한잔. 마치 나를 위해 준비해 둔 것 마냥 자연스럽게 있는 두 개의 찻잔 중 아직 한입도 대지 않은 찻잔을 바라보자, 그가 찻잔 접시를 들어 올려 내 앞에 내려주었다. 불그스름하면서도 투명한 느낌. 별로 입맛에 맞지 않았던 걸로 아는 홍차 위로 내 얼굴이 비쳤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군. 이쪽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라. 네가 이 질문에 답을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괜한 걸 물어본 느낌이다.”
“.........”
“내 연인은, 지금. 과거와 미래를 오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한 모금 들이켠 홍차는 커피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온화하게 내 몸속을 퍼져 나갔다. 풀잎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는 느낌은, 어쩐지 커피의 잔잔한 향보다 더 좋게 느껴져서, 저절로 복잡했던 머리가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과거와 미래?”
“그래. 그 사람은 안타깝게도 기억이 온전하지 않아.”
“저런.”
차분해 지는 마음 덕에 그의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더라. 그의 말에 따라 이미지를 연상시켜 보았다. 부드러운 갈색의 긴 머리. 어딘가 물결모양처럼 곱슬거리는 기다란 머리카락에 녹색 눈을 가진, 미소가 예쁜 여인.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이 사람이랑 어울리겠지. 엄청난 미인을 상상해 보다가 갑자기 문득 든 생각.
“그 사람이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
그래. 그의 대답은 짧고 무거웠다. 괜한 걸 물어봤나. 미안해지는 마음에 사과하려 마음을 먹고 홍차가 반쯤 남은 잔을 손으로 꼭 쥔 체 그를 향해 입을 열려 하자, 그가 먼저 선수를 쳐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말해줘야지.”
“.........”
“너의 과거도, 미래도. 사랑한다고.”
찻잔을 쥔 덕일까. 온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눈에 열이 올라서. 나도 모르게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결국은 이유 모를 물방울 하나가 뺨을 타고 홍차 잔 위로 떨어져 퐁 소리를 내버렸다. 나 스스로 더 놀라 냅킨으로 대충 눈가를 훔쳤다. 마음 한쪽이 아리게 행복한 느낌.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내일부터 내가 도와줄게.”
“...그래.”
그의 낮은 음성에는 어딘가 모르게 공허함이 담겨 있었다. 당장에라도 껴안아 토닥거려주고 싶은, 그런 공허함이.
7.
“침실이 하나밖에 없는데. 침대가 싱글이라 아마 좀 좁을지도 모르니 내가 소파에서 자겠소.”
부엌을 치우고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그를 돌려보내기에는 너무 시간이 늦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편으로 몰려오는 안도감을 숨기고 2층으로 계단을 옮기자 그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구도에 먼저 올라가던 내가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자, 자연스럽게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과 시선이 얽혔다.
“왜 그러지?”
“...아니.”
무거워 보이는 그의 뺨에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그의 볼을 매만져 줄 뻔 했다. 괜찮다고. 다 잘 될 거라고.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며 사랑한다고 이야기 하는 내 모습이 떠올려지는 순간 고개를 팍팍 돌리고는 서둘러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이윽고 침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풍경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
싱글 침대였는데. 분명. 퀸사이즈 침대가 떡하니 내 방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눈을 깜빡였다. 침대 덕분에 방 배치가 아주 달라져 있는 것에 당황스러워하며, 내 책상들과 실내장식용으로 사 두었던 수납장들이 다 어디로 가 있는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가 내 등 뒤로 오는 느낌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아니.. 분명 싱글..침대였는데 말이오.”
“안다.”
낡은 녹색 줄무늬가 촌스러운 그 침대. 버렸지. 그의 말에 괜히 욱해서 그의 발을 콕콕 밟아줄 뻔 했다. 그 침대가 좀 촌스럽긴 해도 아주 편안하고 좋았다고. 그래도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침실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분명 누군가가 자다 일어난 흔적이 보이는 침대. 웃긴 것은 침실용 가운이 두벌이나 어지럽게 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고, 침대의 크기가 큰 만큼 떨어져 있어야 할 베개는 두 개가 딱 붙어서 떨어져 있기 싫다는 티를 내고 있다. 내가 여기서 누군가랑 같이 잤었나?
“너도 연인이 있었나 보군.”
“....그랬나?”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지는 덕에 이마를 감싸 쥐었다. 어딘가 몸이 지탱되지 않아 휘청거릴 것 같자, 든든한 무언가가 날 받쳐 준다. 그리고 귀 뒤로 속삭이듯 들리는 그의 목소리.
“한숨 자면, 모든 것이 괜찮아 질 거다.”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며 옷을 제대로 벗지도 않은 체 그대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대충 침실 가운들을 걷어내어 협착 위에 올려두고는 그대로 그를 등진 체 눈을 감아버리자, 자연스럽게 침실의 불이 꺼진다. 그의 배려인 걸까. 어두워진 침실에 적막이 내려앉고 내 옆으로 그 사람이 눕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은 거리감이 있게 누운 그와 나 사이의 공백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저기.”
“왜 부르지?”
“...아니. 봄이긴 한데, 딱히 추워도 난방 같은 것은 하지 않으니까.. 그. 저녁에 추울 수도 있고.”
좀 붙어서 자자는 말을 하기가 이렇게 민망할 줄이야. 같은 남자끼리라 그런가. 아무래도 남자끼리 붙어서 자는 건 좀 그렇지, 하려던 찰나 등 뒤로 따듯한 온기가 느껴진다.
“그래. 춥군. 실례하지.”
딱 붙은 베개. 따듯하게 느껴지는 온기.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기분에 졸음이 몰려 오기 시작했다. 잠이 들것을 안 건지 아득하게 그가 귓가에 속삭이는 내 이름. 릭.
릭.
응.
릭. 사랑한다.
......
그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내 허리를 껴안았다. 그의 모든 것이 애처롭고, 안타까워 눈물이 났다.
사랑하는 벨져.
그의 말 하나에 모든 것을 스쳐 지나간 기억들이 다시금 하나둘 톱니바퀴를 맞추듯 돌아가기 시작했다.
[너의 과거도, 미래도 사랑한다고.]
그의 말 한마디가 목을 꽉 매워 차기 시작했다. 미련한 사람이 따로 없다. 참으로 미련한 사람이다. 매일 자기 입으로 미련하다, 미련하다. 말만 하더니 결국 자기가 더 바보가 되어버린 걸까. 기억도 못 하는데, 사랑한다 말하면 뭐가 변하기라도 할 줄 알았나. 목 끝까지 그에 대한 미안함이 들어차 결국 나는 대답해 주고 말았다.
사랑해, 벨져.
그는 내 대답에 말없이 나를 더 끌어안아 주었다.
별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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